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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113

영태공주릉(永泰公主陵): 무측천 손녀의 묘에 얽힌 이야기... 글: 야독문사(夜讀文史) 1958년, 섬서(陝西) 함양(咸陽)부근의 양산(梁山)에서 채석노동자들이 산을 깎아 돌을 캐고 있었다. '쿠궁'하는 큰 소리와 함께, 열린 깨트린 돌의 아래에 크기가 균일하고, 배열이 나란한 돌로 쌓은 석벽이 발견된다. 이는 분명 능묘(陵墓)이다. 공사팀은 즉각 공사를 중단하고, 현지의 문화재당국에 연락한다. 문물국은 소식을 들은 후, 즉시 고고인원을 파견하여 현장조사를 진행한다. 사료기재를 종합하여, 연구자들은 이곳은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와 여황 무측천(武則天)의 합장능인 '건릉(乾陵)'이라고 판단한다. 그후 몇년간 고고학자들은 건릉주변을 탐사했고, 차례로 여러개의 배장묘(陪葬墓)를 발견한다. 그중 1킬로미터 바깥의 배장묘는 전문가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 묘는 총면적이 .. 2023. 4. 10.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의 여덟 아들: 2명은 황제가 되고, 5명은 비명에 죽다.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당고종 이치(628년 7월 21일 - 683년 12월 27일). 자는 위선(爲善), 당나라의 제3대 황제. 당태종 이세민의 아홉째 아들이다. 정관23년(649년), 당태종이 사망한 후 태자 이치가 즉위하니 바로 당고종이다. 당고종은 즉위후 "영휘지치(永徽之治)"를 열어 당나라의 국력을 전성기로 끌어올린다. 다만, 현경5년(660년)이후, 당고종은 자주 머리가 어지러워, 조정의 정무를 처리하는데 영향을 주어, 무측천이 점차 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홍도원년 십이월 정사일(683년 12월 27일), 당고종은 정관전(貞觀殿)에서 사망하니, 향년 56세였다. 그의 아들들은 당나라조정 내부투쟁의 원인으로 이치의 8명의 아들은 대부분 선종(善終)하지 못했다. 1. 이충(李忠) 이충은 당고종 .. 2023. 2. 20.
무측천(武則天) 사후, 무씨일족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글: 심근배조(尋根拜祖) 무씨일족은 원래 후손이 번성한 부유한 상인가족이었다. 무측천이 황후에 오른 후, 무씨일족은 계견승천(鷄犬昇天)한다. 무측천이 사망하면서(705년), 무씨일족은 모래사장에서 벌거벗고 수영하는 사람들처럼 '바닷물의 엄호를 잃은 그들은 즉시 사람들의 표적이 된다' 한때 무씨일족은 작점짐소(雀占鴆巢)하여 이당(李唐)강산을 찬탈한다. 그후 십여년에 걸친 '용상보위전'에서 이당종실을 포함하여 수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렇다면, 죄괴화수(罪魁禍首)인 무씨일족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씨가족의 족보도를 보면, 무측천의 부친대는 형제가 4명이다. 즉 무사릉(武士棱), 무사일(武士逸), 무사양(武士讓), 무사확(武士彠)이다. 그중 무사확이 무측천의 부친이다. 우리는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2022. 8. 29.
무유서(武攸緖): 무측천의 가족중 유일하게 화를 피한 인물. 글: 덕혜(德惠) 무주(武周)왕조를 건립한 무측천은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이다. 그녀는 재위시에 불교를 대거 숭상했고,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전후로 적지 않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무측천이 살아있을 때 무씨가족에게 대거 작위와 상을 내렸으나, 그녀가 죽은 후 무씨세력은 차례로 제거당한다. 당시 무씨가족중 세력이 가장 컸던 사람은 무삼사(武三思)이다. 그는 양왕(梁王)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무숭훈(武崇訓)은 안락공주(安樂公主)와 결혼한다. 그러나 신룡3년(707년), 부자는 모두 처형당한다. 태평공주(太平公主)의 남편인 무유기(武攸曁)마저도 묘가 파해쳐지고, 둘 사이에 낳은 아들 둘도 살해당한다. 나머지 봉상(封賞)을 받았던 무씨가족들은 속속 강등당하거나 탄압받았다. 다만, 무씨가족.. 2022. 4. 11.
순릉(順陵): 한 여인의 무덤, 왜 황제능보다 규모가 클까?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시안(西安)에서 공항확장공사를 하면서 가장 바빠진 것은 고고발굴팀이다. 설날연휴기간동안 섬서성 고고연구원 공항신성 고고연구기지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 연휴도 포기하고, 연장작업을 하면서 고고발굴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공항확장공사과정에서 각 시기의 묘장 3,500여개를 찾아냈고, 발굴임무는 아주 어렵다. 1,300여년전 이곳은 "홍독원(洪瀆原)"으로 불렸고, 당나라때 귀족들의 묘가 모여있는 곳이다. 최근 10년동안 연이어 상관완아(上官婉兒), 설소(薛紹)등의 묘지를 발견하여, 당나라 역사를 연구하는데 고귀한 자료가 되었다. 함양공항의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규모가 거대한 능묘인 순릉이 있다. 비록 천년이상의 비바람을 맞았고, 지면건축물은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거대한 석상을 보면.. 2021. 5. 31.
당중종(唐中宗) 이현(李顯): 4명의 여자들 손아귀에 쥐어지낸 황제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당나라때의 황제들 중에서 이현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인물이다. 범문란(范文瀾) 선생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당중종은 당고종보다 더욱 유약하다. 이 말을 보면 범문란 선생은 이현도 무시했지만, 이치(李治, 당고종)도 멸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현은 후세인들이 "육미지황환(六味地黃丸)"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황제일 뿐아니라, 부친, 동생, 아들, 조카가 모두 황제이다. 더더욱 불가사의하게도 그의 모친 또한 황제이다. 바로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이다. 아마도 이런 인물은 역사상 유일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의 부친과 동생 이단(李旦)도 역시 '육미지황환'이라고 말한다. 다만 만일 당나라 황제세계표를 본다면, 그가 이런 칭호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 2021. 5. 24.
해독이 어려운 건릉(乾陵)의 무자비(無字碑) 글: 중원수장대강당(中原收藏大講堂) 섬서에 위치한 건릉은 당고종 이치와 여황 무측천이 묻혀 있다. 그래서 중국역대제왕릉중 유일하게 두 황제가 합장된 묘이다. 능원내성 주작문밖의 사마도 서쪽에 당고종 이치의 문치무공을 칭송하는 공덕비인 "술성기비(述聖記碑)"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동쪽에 나란히 서 있는 비는 바로 그 유명한 "무자비"이다. "무자비"는 완전한 거석을 조각해서 만들었다. 높이는 7.53미터, 너비는 2.1미터, 두께는 1.49미터, 총중량은 98.84톤에 달한다. 비의 윗쪽에는 8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신(碑身)의 양측에는 '승룡도(昇龍圖)'가 새겨져 있다. 용의 몸은 튼튼하고, 자태는 신선처럼 표일하다. 전체적으로 비는 웅혼하고 조각도 정교하여 황실의 위엄을.. 2021. 4. 21.
태평공주(太平公主): 지나친 사랑은 사람을 망친다.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공주당년욕점춘(公主當年欲占春) 예전에 태평공주는 봄날까지도 독차지하고 싶어했지. 고장대사압성갑(故將臺榭壓城閘) 그래서 넓은 땅을 차지해서 온갖 건물을 지었고, 장안성을 압도했다. 욕지전면화다소(欲知前面花多少) 지금까지도 꽃을 보면서 왔는데, 앞으로 얼마나 먼데까지 꽃으로 뒤덥혀 있을까 직도남산불속인(直到南山不屬人) 종남산에 이를 때까지 이 땅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모두 태평공주의 땅이다 태평공주를 묘사한 시 중에서 한유(韓愈)의 이 시는 가장 유명한 것일 것이다. 시가 비록 짧지만, 이 여인이 점유한 땅이 얼마나 넓은지, 그녀가 지은 정자 누각이 얼마나 장관인지, '욕점춘'이라는 세 글자로 다 표시했다. 그녀의 광망한 심리상태와 사치와 허영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한 몇 마.. 2020. 7. 15.
"삼갑(三甲)"은 1,2,3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글: 왕동지(王東志)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삼갑"이라는 말로 1,2,3등을 표시한다. 이 단어는 스포츠경기보도에서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매체의 보도에 "누구누구는 4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아쉽게도 삼갑에 들지 못했다."등등의 유사한 내용이 많다. 사실상, "삼갑"은 1,2,3등을 표시하거나 3등을 표시하는 말이 아니다. 이 단어는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이다. "삼갑"이라는 단어는 원래 고대 과거제도에서 나왔다. 에는 '삼갑'이라는 단어와 해석이 없다. 에는 '삼갑'의 유래를 적어 놓고 있다: "태평흥국8년, 진사(進士)의 여러 과에 율의(律義)를 시험보기 시작했다....진사를 삼갑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 뜻은 태평흥국8년(983년) 전시(殿試)이후 진사를 일갑(一甲), 이갑(二甲), 삼갑(三甲)의.. 2020. 5. 7.
우림군(羽林軍): 당나라 궁중정변의 결정적 요소 글: 엽서도(獵書徒) 우림군은 중국고대에 가장 유명하고 역사가 오래된 황제의 금군(禁軍)이다. 처음 나타난 것은 서한(西漢)시기이다. '우림'이라는 것은 "위국우익(爲國羽翼), 여림지성(如林之盛)"(나라를 위한 날개가 되어, 숲처럼 무성하라)의 의미라고 한다. 당고조때 당나라는 궁성의 이북에 주둔하며 황제와 황실을 보위하는 것을 주요 직책으로 하는 황제의 사병을 창설했다. 즉, 북위금군(北衛禁軍)인데, 국가의 군대인 남아부병(南衙府兵)에 상대되는 것이다. 그후 당태종, 당고종 양대에 걸쳐 계속 변화하며, 최종적으로 '북위금군'에서 정예부대가 독립하게 되는데, '좌우우림군'이라 명명된다. 우림군은 황제의 개인적 호위부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황실과 궁정의 안전을 보장하는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또한 황제.. 2020.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