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1563년, 흥화전투(興化戰鬪)가 끝나면서, 복건연해의 국면은 이미 어느 정도 제압되었다. 그러나, 왜구의 핵심인 해상집단은 여전히 원래의 체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속히 정비하여 계속 보전(莆田)을 중심으로 한 해역에서 새롭게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날로 위축되는 활동공간은 왜구의 생존현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리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일으킨 선유전투에서 패배한 후 부득이 오랫동안 경영해온 복건해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왜구는 천연적으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전형적인 해안의 밀수집단으로서, 각지역의 왜구는 탄생때부터 아주 선명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구성원의 구조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대로 무역에 종사하거나, 어업에 종사하거나 소금을 판매하던 사람들의 후예이다. 다만 불가피하게 인근 성의 협력자들도 가입하고, 심지어 일정 비율의 외국국적의 참여자들도 끼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진압하는 관청은 항상 "외번적구(外番賊寇)"라고 불렀다. 다만 민족주의가 고양된 시대에는 쉽게 외국침입자로 성격규정이 되기 쉬었다.
다음으로, 각 지역의 왜구는 필연적으로 지리분포상의 양면성을 지녔다. 왜냐하면 사적으로 선박을 건조하고, 해금(海禁)을 돌파하는 것은 어쨌든 소수의 인원이다. 그리고 대부분 연해의 무인도와 인근국가의 항구주위에서 활약했다.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반대로, 장기간 고향을 벗어나고자 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원거리항해를 할 수 있는 배를 만들 경제력도 없었다. 그래서 계절적으로 집단활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고향에 남아서 통상적인 일을 한다. 다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바로 왜구가 신속히 인원을 발전시킬 수 있는 핵심요소였다.
다른 한편으로, 명나라의 정부는 전면적인 방어체계를 건립한다. 그런데, 이는 왕왕 여러 헛점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대대로 병사가 되는 군호(軍號)집단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서 땅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절강, 복건과 광동에는 평원이 협소하고, 충분한 비옥도를 가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인구가 증가하면 쉽게 부담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다만 그들은 확실히 그 지역내에서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고 있고, 자주 부족한 급여를 채우기 위해 인근 토착민들을 약탈했다. 그래서 쉽게 원한을 살 수 있었다. 설사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위하여 군호를 벗어나 일반백성이 되지만 그래도 왜구습격의 주요목표가 되어 버린다. 오로지 지방간청의 기록에서만 그들은 가장 순수한 피해자로 기록된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왜구와 명나라당국간의 장기간에 걸친 충돌은 끝이 나지 않았다. 비록 전자는 군사기술, 대규모군대조직능력이나 물자조달공급측면에서 모두 절대적인 열세이지만, 심후한 지방의 기반을 가지고 견실한 배후기지를 가질 수 있었다. 일단 패배하면 현지에서 해산했다가, 조금 지난 후 비용이 가장 적게드는 방식으로 재집결한다. 후자는 원래의 군정체계가 이미 많이 약화되었지만 힘들여 구조적인 안정을 유지해야 했고 해산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상대방에 비하여 유지비용이 몇 배나 들었다. 계속하여 신규병사를 모집해야했다. 전기의 광서 낭병(狼兵)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우대정책으로 포르투갈인들을 매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척계광 휘하에서 복역하는 광공(鑛工)과 유대유(兪大猶)가 모집해온 강서남부의 산민(山民)은 모두 같은 현상의 두 개의 측면이다.
1563년 봄의 흥화전투가 끝난 후, 원래 복건 보전에 집중되었던 왜구는 어쩔 수 없이 해산하게 된다. 그중 상당부분은 내륙의 시골로 돌아갔다. 병력이 부족했던 명나라관군은 이들을 추격할 수 없었다. 다만 일부 구성원은 배를 몰아 바다로 나가 장주(漳州)와 조주(潮州_의 외도(外島)로 잠시 피난한다. 그러나 피차간의 연락은 끊기지 않았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겨울에 전면적인 반격을 할 준비를 하였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신의 해외관계를 이용하여, 일본의 히라도항(平戶港, 나가사키 북부의 항구)과 유구의 나하(那覇)에서 용병을 모집한다.
이와 동시에, 조산(潮汕) 현지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 지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비룡황제(飛龍皇帝)로 자칭하는 장련(張璉)의 주위에 단결해 있었고, 직접 명나라가 광동동부에 배치한 대부분의 병력을 묶어놓고 있었다. 심지어 강서남부를 지키는 명장 유대유까지도 깜짝 놀라게 만들어, 그는 휘하의 6천명의 신군을 이끌고 복건으로 돌아온다. 그외에 뇌주반도(雷州半島)에서 활약하던 조산출신 왜구우두머리 증일본(曾一本), 그리고 장주남부를 점거하고 있던 대해적 오평(吳平)은 모두 병력이 부족한 명군이 더욱 상대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당연히, 계속하여 중임을 부여받는 척가군도 북건현지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었다. 척계광은 보전의 왜구를 소탕하는 작전을 완성한 후, 이미 6천여명을 북방으로 돌려보내 휴식하게 한다. 다만 현실적인 요소 즉 절강현지의 방어에 심각한 헛점이 드러난다. 남은 6,400여명은 이곳에서 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각각 복주, 흥화, 천주와 장주의 핵심지역에 나누어 주둔시켜야 했다. 수군전함은 봉화문, 남일산, 오서(浯嶼), 동산, 소정등의 연해수채의 방어능력을 회복하는데 쓰였다. 바꾸어 말하면 소수의 척가군이 직접 지휘하는 육군외에 전체 복건해안은 이미 기동증원역량이 남아있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563년 10월, 오랫동안 준비해온 왜구는 다시 한번 복건지역에서 대규모 반격을 개시한다. 그들은 규모가 27,000여명에 이르는 병력으로 대체로 셋으로 나뉘어졌다. 이는 단기간내에 동시에 기습하기 편리하기 위함이고, 수비군의 허실을 탐지하기 위함이었다. 그중 일본 히라도에서 온 분대는 절강 대산을 기습했고, 유구에서 출발한 함대는 조공노선을 따라 직접 복주로 향했다. 장주 매령에 집결한 인원은 우선적으로 금문도이 오서기지를 공격한다. 남오도의 조주해적은 직접 우회하여 천주로 간다. 전란의 봉화가 순시간에 복건 각지에 올라간다. 각지로 나뉘어 지키고 있던 관군은 더욱 압력을 받게 된다. 다만 왜구들의 이상 지역에서의 기습은 역량에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위소, 수채의 관병들은 승전보를 올릴 수 있었다.
사실상 왜구의 이번 기습의 진정한 의도는 여전히 반년전에 자신들이 패배하고 떠났던 보전이었다. 단지 구체적인 목표를 수부(首府)가 아니라 해안에 더욱 가까운 선유(仙遊)로 삼았을 뿐이다. 첫째는 이전의 충돌에서 여러번 점령당하고 정멸했던 평해위를 포함한 요새는 기본적으로 파괴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함대가 비교적 가볍게 바다에서 쉽게 돌격한 후, 목란계(木蘭溪)를 거슬러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내륙의 군현을 고른 것이다. 다음으로, 보전은 비적이 집중되는 곳이어서 내지의 호응자들이 모이기 좋았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시종 명나라 복건해적방어의 약한고리였다. 쌍방이 다시 한번 통제권을 놓고 격전이 발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전에 절강성 태주에서 발생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장면이 직접 바다에 연하지 않은 보전 선유에서 발생한다. 그해 11월 1일, 제1차 왜구가 16척의 전함을 타고 흥화로 들어간다. 그리고 신속히 내하를 따라 선유로 직진한다. 이틀 후, 다시 5척의 왜구가 동일하게 진입한다. 다만 그달 6일, 선유성아래 운집한 인원이 15,000여명에 달한다. 확실히 그중 절대다수는 해로로 온 것이 아니라, 본토 혹은 다른 내륙에서 모인 지방반군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비교하면, 명나라의 관군은 선유성 안에는 200명의 위소주둔군이 있고, 그외에 250명의 민병이 방어에 협조하고 있었다. 기세등등한 왜구를 맞이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이미 퇴로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현령 진대유(陳大有)의 지휘하에 적극적으로 전투를 준비한다. 벽돌로 성벽을 견고하게 수리하고, 조정에서 원군을 파견할 때까지 사수하는 것이다. 적은 여전히 중형장비가 부족하고 그저 성벽을 기어오르는 구식방식으로 공성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여러번 시도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이때 척계광은 자신이 가진 1,600명의 기동정예병을 이끌고 남쪽의 천주에서 상륙한 왜구를 물리쳤다. 비록 이미 사람을 절강으로 보내 나머지 절반의 척가군으로 하여금 남하하게 시켰지만, 멀리 있는 물로 가까운 불을 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의연히 병력을 이끌고 선유로 간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진대유에게 평화협상의 방식으로 시간을 끌어달라고 한다. 마침 포위공격하던 왜구들도 무혈입성을 기대하고 있었으므로 잠시 강공을 멈춘다. 그리하여 성내의 명군은 잠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시간을 이용하여 방어설비를 다시 수리한다. 현지애서 재료를 구해 성벽을 수리할 뿐아니라, 사다리를 파괴시킬 수 있는 비구(飛鉤)도 만든다. 유일한 곤경은 물자조달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는데, 잠시 강제분배의 방식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쌍방의 대치는 12월 6일까지 계속된다. 왜구측에서는 인내심을 잃고 다시 전투를 시작한다. 이전에 그들은 이미 선유성의 주위에 4개의 영채를 세운다. 그리고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대량의 운제(雲梯)를 만들었다. 다만 토목분야의 부족으로 포위공격자들은 호구+호장으로 구성된 전면적인 봉쇄공사는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성내의 수비군이 외부의 증원군과 비밀리에 통신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는 은환을 남긴 것이다. 예를 들어, 한무리의 결사대가 성벽을 오를 때, 돌연 관군이 바깥에서 기습해 와서 불을 질러 운제를 불태운다. 얼마후에는 총포를 발사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그리하여 왜구들은 대량이 관군이 현장에 도착한 것으로 오인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모두 척계광의 소수기동부대가 벌인 일이다. 그중에는 계속 척계광을 따른 2개영의 척가군 사병들이 있었다. 그리고 400명의 편장(偏將) 곽성(郭成)을 따라 도착한 묘족무장부대도 있었다. 위기에 선유를 지원온 소규모부대는 바로 후자인 오랑캐용병이었다. 다만 수적인 차이가 엄청나서, 비교적 먼거리에서 암중관찰할 수밖에 없었고, 허장성세의 방식으로 교란시킬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척후병들이 대규모 부대가 도착하지 않았아는 것을 파악하고 나서야 비로소 선유성에 대한 공격이 재개된다. 그리고 다른 부대는 다른 주변의 마을로 나뉘어져 주둔하며 휴식하고 있었다. 단기간내에 이들이 전장의 중심으로 지원오기는 힘들었다.
마침내 그해 12월 하순, 6천여명의 척가군이 절강에서 보전의 전선에 도착한다. 이제 명나라의 관군은 포위공격을 해결하는 반격을 시작한다. 척계광은 왜구가 사방에 나뉘어 주둔하고, 서로간의 연락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동시에 기습하여 그중 하나의 세력을 해결하는 전략을 고안한다. 상대방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남부영지에 타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신임하는 부하장수 호수인(胡守仁)으로 하여금 반수의 인마를 이끌고 강공하게 한다. 동시에 진호(陳濠)와 이초(李超)로 하여금 각각 한 부대의 사병을 이끌고 동,서의 양익을 공격하는척 하게 한다. 곽성의 묘족부대는 북부에서 유사한 견제를 진행한다. 왜구는 이미 모든 주의력을 선유성을 함락시키는데 두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변화를 제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26일, 명군은 4로로 나누어 선유외곽의 목표영지를 공격한다. 새벽에 짙은 안개가 엄호를 해주어서, 근거리에서도 상대방을 발각하기 어려웠다. 왜구측에서는 성을 함락시키는데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8개의 금방 만든 이동공성탑으로 성벽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기조 전에, 자신들이 주변경계를 소홀히하는 바람에 치명적인 일격을 당하게 된다. 적지 않은 결사대가 이미 높은 곳에 올라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영에서 위험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할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응전해야 했고, 흐트러진 대형으로 완전한 대형을 갖춘 적군을 맞이해야 했다. 그 결과 증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전방의 동료들은 이미 궤멸하여 흩어지고 있었다. 금방 수백명이 전사한다. 결국 자신들이 만든 영루로 들어가서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혼란스러운 국면을 겨우 안정시킨다.
다만, 명군은 여러번의 전투경험으로, 진지를 강공하는 것은 전혀 이점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외곽의 나무담장을 철거하는 동시에 계속 화공으로 영장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왜구로 하여금 영루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각각 동서 양족의 다른 영루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척계광은 즉시 주력부대를 둘로 나누어 뒤를 쫓으면서 협공한다. 거기의 왜구는 원래 수량이 많지 않았다. 두 방향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전을 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던 북쪽의 영지도 불리한 상황을 보고는 스스로 도망쳤다. 많은 관군은 피를 묻히지 않고 거기를 점령했다. 그렇게 선유의 포위는 풀리게 된다.
이때, 보전의 내륙에는 아직도 상당한 수량의 왜구무장세력이 있었다. 명나라관군이 통계낸 전과를 보면, 그들이 4개영에서 죽인 왜구의 수량은 천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3천명의 '구조'했다는 현지지지자들이 있었다. 어쨌든 전체대군의 1/3수준도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머지 인원은 원래의 방식대로 해산했고, 인원이 많지 않은 객군은 둘로 나뉘어서 천주와 혜주방향으로 간다. 그러나 위기일발이던 선유성의 수비병에게 있어서 이런 결과는 너무나 반가운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명군이 비록 선유전투에서 거둔 성과가 유한하지만, 지방에서의 항쟁정서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태주전투에서 절동연해에 조성되었던 시범효과와 마찬가지로, 해상의 왜구들은 현지인들에 대한 호소력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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