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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안록산(安祿山)은 반란후 1년만에 죽었는데, 안사의 난은 오랫동안 지속된 이유는...?

by 중은우시 2022. 1. 3.

글: 압사룡(押沙龍)

 

"안사의 난(安史之亂)"의 주인공 중 하나로서, 안록산은 아주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능력도 있고, 야심도 있다. 그러나, 아주 집착적인 사명감같은 것은 없었다. 대사를 이루는 사람들은 왕왕 이런 사명감이 필요하다.

 

안록산은 투기꾼에 더 가까워보였다. 그는 낙양을 점령한 후 서둘르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대연(大燕)이라 한다. 그러나, 형세가 일단 악화되자 그는 신념을 잃어버린 듯했고, 이제 끝났다고 여기는 듯했으며, 곧 질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부하가 그를 위로한다. "대사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수만의 무리를 거두어 천하에 횡행하며 도척(盜跖)이 되더라도 오년 십년은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안록산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네가 내 마음을 풀어주는구나!" 금방 황제에 오른 인물이 어찌 비적이 되어 강호를 유락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겨우 5년, 10년을 버티는 전망만으로 크게 기뻐한단 말인가. 아무리 보아도 큰 뜻을 품은 효웅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이건 그의 개인적인 성격만이 아니라, 안사집단의 인물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이런 문제가 있었다. 반군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물건을 강탈하는 것이다. 그후에 빼앗을 재물을 범양(范陽)의 고향집으로 보냈다. 이건 홍타이시(皇太極, 청태종)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좌산조(座山雕, <임해설원>의 비적두목)와 비슷하다. 이건 당나라와 선명한 차이를 보인다. 안사집단은 군사적 효율이 아주 높았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계획이 없었다. 그저 되는대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당나라정부는 정치적으로 고도로 민감했고, 이를 위해 군사적효율까지 희생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안록산에게는 병이 있었다. 그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는데 몸에 심각한 저창(疽瘡)이 있었고, 눈은 실명했다. 반란을 일으킨 후 1년여도 지나지 않아 몸이 이렇게 망가지다니, 확실히 그건 너무나 우연스럽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가지고 음모론적인 추측을 전개하기도 한다. 기실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안록산은 실제로 너무 뚱뚱했다. 그의 채중은 전해지는 바로는 350근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나라때의 '근(斤)'은 현재의 근보다 무겁다. 그래서 안룩산의 체중은 거의 400근(200킬로그램)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몸을 씻을 때 스스로 옷을 벗고 입을 수가 없었다. 반드시 두 사람이 그의 배를 받쳐주고, 그후에 한 심복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로 그의 뱃살을 떠받치면서, 그에게 허리띠를 매어주어야 했다. 당현종은 이로 인하여 특별히 그에게는 시종을 데리고 화청지에서 목욕하도록 허락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필자는 양귀비와 그와의 사이에 섬씽이 있었다는 것을 의심한다. 아무리 취향이 독특하더라도 양귀비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겠는가? 이 정도로 뚱뚱하면 생활을 스스로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안록산이 그 어떤 병을 얻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기이한 것은 그가 어찌 오십여세가 되어서 비로소 병이 생겼는가 하는 점이다. 안록산은 병을 얻은 후, 성격이 크게 변하여, 부하들에게 아주 가혹하게 대하고 성격도 조급하고 폭력적이 된다. 이런 조급함은 한편으로 당연히 생리적인 고통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면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다. 반란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는 행동할 수 없었다. 눈까지 보이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그로 하여금 후계자문제를 다시 고려하게 했을 것이다. 안경서(安慶緖)는 법적인 후계자이다. 그러나 성격이 유약하고 말도 제대로 못한다. 말을 더듬었다. 안록산은 원래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원래 이 문제는 그리 시급한 게 아니었는데,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처하니 그를 끌어내리고 새로 후계자를 세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안경서가 먼저 손을 쓴다. 이것은 반군버전의 "마외파사변'이다. 그러나 더욱 잔혹했다. 당나라황실은 그래도 정치적 전통이 있었다. 일을 처리할 때는 정치적 영향도 고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외파사변이 타협으로 끝맺는다. 그러나 안록산이 이끄는 사람을 죽이고 눈하나 깜짝않는 오랑캐군사집단은 쌍방 모두 퇴로가 없었다. 안경서는 그저 안록산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안록산이 죽는 장면은 아주 피비린내가 난다. 그는 손으로 장막을 잡고 소리지르고 있었고, 그의 창자가 흘러나와 침대 위에 흩어진다.

 

당현종, 당숙종 부자간의 투쟁은 권력의 평화적인 이양으로 끝난다. 군대도 혼란에 빠지지 않고, 인심도 흩어지지 않았다. 다만 안록산의 사망은 극히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안경서는 부친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다. 그래서 법통상으로 자리를 잡기 어려웠다. 그는 군대를 장악하는 능력이 부친에 비해 한참 못미쳤다. 군대의 응집력이 확실히 떨어진다. 반군장수들의 입장에서 고려해보면, 우리는 안록산에 충성했는데, 이제 어찌 그 안록산의 역자(逆子)에게 다시 충성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왜 이 평범하고 유약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더듬는 안경서를 위해 목숨을 걸고 돌진해야 한단 말인가? 하물며 안록산이 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억지로 안경서에 충성을 표시하지만, 그것은 대적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집단에는 우두머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분열의 씨는 이미 심어져 버렸다. 만일 원세개를 가지고 비유한다면, 안록산의 사후 반군집단은 '원세개시대'에서 '북양시대'로 접어든 것과 같다.

 

이와 동시에 안경서는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하나 내린다. 당시 몇몇 대장은 태원(太原)에서 이광필(李光弼)을 포위공격하고 있었다. 안경서는 다른 장수들에게는 계속 공격하게 하면서, 사사명(史思明)은 빼내어 범양으로 돌려보내 근거지를 안정시키게 한다. 당시 그는 이 조치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금방 이 조치가 그에게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두 집단의 분열

 

사사명은 안록산의 수하에서 가장 능력있는 장수였다. 그러나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안록산은 사사명을 그다지 중용하지 않았다. 사사명은 전혀 2인자라 할 수 없었다. 사실상 안록산은 사사명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한번은 안록산이 거란인과 싸울 때 패전을 기록한다. 그는 희생양이 필요했고, 사사명을 선택한다. 그러나 사사명은 아주 교활했고, 산 속에 숨어서 나오질 않는다. 사태가 완전히 정리된 후에 비로소 산에서 나와 안록산을 배알한다. 이때는 안록산에게 더 이상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을 때였다. 그리하여 안록산은 사사명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한다: "네가 살아있는데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

 

안록산이 거병할 때 사사명을 남하할 때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가 북방에 남겨서 근거지를 보살피게 한 몇 명중에도 사사명은 없었다. 그가 사사명에게 부여한 임무는 하북으로 나가서 소탕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 임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알았으려 삭방군(朔方軍)의 이광필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엉 온다. 하북이 아주 중요하게 바뀐 것이다. 사사명의 지위도 날로 올라간다. 당연히 그는 자주 이광필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도 이광필에게 패배했다. 누가 이광필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비교해서 말하자면 사사명의 실적은 나쁘지 않았다. 사사명은 바로 이때 독립하여 성장할 기회를 잡는다. 반대로, 반란초기 비교적 두드러졌던 몇몇 대장들 예를 들어 최건우(崔乾佑), 손효철(孫孝哲)은 오히려 전선에서 싸우면서 1인자인 안록산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보니 성장할 수가 없었다. 안록산이 나중에 망설이면서 사사명을 명목상의 범양유후(范陽留後)로 임명한다. 그러나 그를 범양으로 돌려보내진 않았다. 그에게 계속 남아서 이광필과 싸우게 한 것이다.

 

안경서는 사사명으로 하여금 범양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는 그에게 절호의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반군집단은 아주 큰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선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쉽게 두 개의 중심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범양의 중심이고, 다른 하나는 낙양-장안의 전선중심이다. 사사명이 북으로 돌아간 후, 이 두 개 중심의 분열은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반군은 한번도 하남, 관중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과객의 심리상태를 보인다. 강탈할 수 있는 한 강탈하고, 죽일 수 있는 한 죽여버린다. 그리하여 아주 잔혹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현지 주민들은 반군을 적대시한다. 이런 점령지역은 반군에 강력한 지지를 보내줄 리가 없는 것이다. 반군이 원래 빼앗았던 재물은 모조리 범양으로 운송했다. 그 결과 범양에는 물자가 쌓여있게 된다. 거기는 병력을 보충하기도 아주 쉬웠다. 동시에 주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시간이 흐르면서 범양집단의 역량이 점점 우위를 점하게 된다.

 

안경서는 앞네는 강적이 있고, 뒤에는 강력한 지원군이 없다. 말로는 대연국의 황제이지만, 그의 처지는 아주 난감했다. 758년, 당나라는 역량을 집중시켜, 안경서집단에 공격을 일으키며, 철저하게 격패시킨다. 안경서는 업성으로 도망치고, 완전히 포위된다. 사사명은 병력을 보내 지원한다. 그것이 상주전투(相州戰鬪)이다. 안경서를 구해준 후, 사사명은 그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사사명은 아주 간단하게 처리한다. 그를 데리고 와서 죽여버린다. 그를 죽이는 김에 안록산의 다른 네 명의 아들도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리고 스스로 대연황제에 오른다. 

 

이 사건으로 반군집단이 어떤 성격의 집단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관례에 따르면, 사사명은 안경서를 괴뢰황제로 모셔야 했다. 설사 그를 '시부(弑父)'의 죄로 죽여버리더라도, 다른 안록산의 아들을 괴뢰황제로 앉혀야 했다. 그후 천천히 황위를 찬탈하는 것이다. 최소한 그런 절차는 거친다. 그런데 어찌 바로 죽여버린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정권의 합법성을 얘기할 수 없게 되고, 적나라한 밀림의 법칙만 적용된다. 만일 적군인 당나라조정에서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바로 반군이 시종 정치적 색채가 뚜렸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무슨 이데올로기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전혀 거리낌없는 군사폭력집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완전이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된다. 일단 무슨 일이 생기면 분열해버린다. 정치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반군은 시종 당나라조정에 비해 취약했다.

 

다만 군사적으로 보면, 사사명은 아주 강대했다. 그는 당군을 궤멸시켰을 뿐아니라, 안경서의 잔여부대도 흡수한다. 범양집단과 전선집단이 통일된 것이다. 사사명은 이 부대를 이끌고 계속 서진한다. 망산{邙山)에서 이광필을 격패시키고, 섬주(陝州)성까지 밀어부친다. <캠브리지당사>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일 그의 아들 사조의(史朝儀)가 761년 다른 사람들과 공모하여 사사명을 죽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당왕조를 무너뜨렸을 것이다." 이 주장은 아마도 사사명의 능력을 너무 높이 평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영보전투(靈寶)전투후의 그 기세등등했던 시기는 확실히 반군에게 승리에서 가장 가까웠던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사건이 터진다. 역시 고질적인 그 문제이다. 부자관계.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는 교활한 인물이 아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겸허하고 관후한 사람이다. 부하들에게도 아주 잘 대해주고, 군대내에서 인기가 좋았다. 다만 아마도 그가 너무 군대의 지지를 받다보니, 부친인 사사명이 그를 시기한 것같다. 사사명은 아주 잔혹하고, 걸핏하면 도살했으며 부하들에 대하여도 마구 죽였다. 이런 사람인데 아들이 군대의 옹호를 받는 것을 보자 아마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부자관계이고 관계는 항상 긴장되지는 않았다.

 

<안록산사적>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사명은 원래 글을 못읽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느날 돌연 시를 짓기를 즐겼다. 사조의는 당시 회왕(懷王)에 봉해져 있었다. 마침 대장 주지(周贄)와 함께 전선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다. 사사명은 그를 위로한다고 두 사람에게 앵두를 한 바구니 보낸다. 그리고 앵두를 보며 시를 짓는다:

 

앵도일롱자(櫻桃一籠子) 앵두 한 바구니

반적일반황(半赤一半黃) 반은 붉고 반은 노랗다

일반여회왕(一半與懷王) 반은 회왕을 주고

일반여주지(一半與周贄) 반은 주지를 준다.

 

그러자, 수하중 한명이 끼어들었다. 뒤는 '일반여주지, 일반여회왕'으로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다. 그래야 운이 맞는 것같습니다' 그러자, 사사명이 불쾌해 한다: "나는 운이 뭔지 모른다. 어찌 내 아들보다 주지를 앞세울 수 있단 말이냐!" 

 

그런데, 뒤로 가면서 부자간의 관계가 갈수록 나빠진다. 사사명은 옛날의 안록산과 마찬가지로, 아들은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계자를 갈아치울 생각을 품는다. 사사명은 후계자를 작은아들 사조청(史朝淸)으로 바꿀 생각을 한다. 사조청은 계속 후방에 있었고, 사조의는 전방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다. 이치대로라면 사조의에게 공로는 없더라도 고로(苦勞, 고생한 노고)는 있을텐데, 사사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기이한 것이다. 일을 많이 할 수록 잘못되는 일도 많다. 사조의가 전투를 하면 할수록 부친은 그가 전투를 잘하지 못한다고 여기게 된다. 사조청은 후방에 있지만, 사사명은 그가 만일 전투에 가담하면 분명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사명은 계속 사조의의 약점을 들춘다. 그리고 이런 악독한 말까지 내뱉는다: "내가 섬주를 함락시키면, 이 놈을 죽여버리겠다!" 사조의는 무서워진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종용하에 먼저 손을 쓰게 된다. 사조명은 목졸려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나를 너무 일찍 죽이는 것이다. 왜 내가 장안을 함락시킨 후까지 기다리지 않는 것이냐? 아직은 대사를 이루지 못했다."

 

과연 대사를 이루지 못했다. 이는 거의 4년전 안경서가 부친 안록산을 죽인 것을 그대로 반복한 셈이다. 결과도 마찬가지로 나빴다. 새로운 범양-화북집단과 새로운 전선집단이 분열되기 시작한다. 반군집단은 가까스로 그를 새로운 대연황제로 받아들이지만, 하북의 몇몇 장수들은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명령을 듣지 않기 시작한다. 이대 반군의 실력은 기실 당군을 넘어섰다. 그러나 공격능력은 잃어버렸다. 당나라황제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인상은 이러하다. 미운 짓만 한다. 하루종일 정치적 권모술수나 벌이고, 전선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반군집단을 보면 우리는 바로 알 수 있다: 정치적 합법성을 갖추고 호소력을 가진 황제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양경이취(兩京易取), 하북난수(河北難收)

 

소각사(昭覺寺)전투이후, 사조의는 계속 도망친다. 복고회은(僕固懷恩)은 계속 추격한다. 사조의는 연전연패하고, 갈수록 물에 빠진 개신세로 두들겨 맞았다. 당나라의 정책은 "수악필판(首惡必辦), 협종(脇從不究)"(우두머리는 반드시 처벌하고, 협박받아 따른 자들은 책임을 묻지 않는다)였다. 그렇게 사조의만을 겨냥해서 계속 추격한다. 그래서 하북의 여러 장군들은 대다수 수수방관한다. 그냥 이 물에빠진 개가 어떻게 발버둥치는지 구경했다. 사조의가 마침내 본거지인 범양으로 도망쳐왔을 때, 범양은 이미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이 대연황제는 결국 목을 매어 자결한다.

 

당나라는 하북반군과 합의를 달성한다. 그들은 당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고, 동시에 자신의 하삭에서의 영지는 확보한다.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기로 한다. 전쟁쌍방은 기실 모두 승리하지 못했다. 당나라는 강산을 지켰지만, 반군도 한 지역은 차지한다. 8년이나 싸웠지만, 결국 이런 흐르멍텅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많은 사학자들이 당정부의 단견에 탄식하며 결국 무궁한 후환을 낳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왜 더 힘을 내지 않았단 말인가 왜 좋은 기세를 틈타 근거지를 박살내지 않았던가? 어떤 사람은 그것이 모두 복고회은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분명 이미 하북을 쳤으면서도 양구자중(養寇自重)하고자 해서 이런 화해방안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런 생각은 기실 당군의 실력을 너무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안사의 난은 왜 8년이나 싸울 수 있었던가? 안록산이 거병했을 때 이 전쟁은 확실히 8년이나 싸울 필요가 없었다. 당시 당나라의 역량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하서, 농우군단이 안록산의 주력과 싸우고 있었다. 하삭군도 하북으로 출정할 수 있었다. 만일 제대로 대응했다면, 당군은 확실히 1,2년내에 반란을 종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영보전투이후, 문제는 몇년내에 반란을 진압하는 느냐가 아니라, 반란을 진압하느냐 아니냐가 되어 버린다.

 

하서, 농우군단이 섬멸되고, 이 손실은 결국 보충되지 못한다. 당정부는 점유지역이 넓지만 강회이남은 진정으로 군사화되지 못했다. 그저 재정적인 지원만 가능했다. 군사적으로는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들었고, 반군에 공세를 벌이기에는 부족했다. 당군의 주요역량은 대체로 3부분이다. 삭방군의 주력. 삭방군은 하동군의 한 갈래이다. 여기에 반군에서 도망쳐온 평로군(平虜軍)이 있다. 이 역량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8년전쟁에서 쌍방의 실력은 서로 커졌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한다. 다만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반군이 연합하기만 하면 당군이 이길 수 없었다. 사사명은 반군의 두 집단을 통합해서 당군을 휩쓸려 관중으로 밀고 들어갈수 있었다. 반군이 분열되어 하북집단과 전선집단으로 나뉘면, 당군은 전선집단만 치면서 이길 수가 있었다. 즉, 영보전투이후 당군은 시종 약세를 보였다. 반군은 시종 분열된 상태로 곤경에 처했다. 소각사전투이후, 반군의 전선집단은 손실이 아주 컸고, 거의 멸망한다. 적군은 이제 하나의 집단만 남았고, 다시 당군이 우세를 회복했다. 다만 그렇다고는 하지만, 하북집단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강노지말(强弩之末)은 아니었다. 그들의 실력은 여전히 당군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북, 특히 하북북부는 아주 특수한 지역이다. 진인각 선생은 그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해본 바 있다. 그리고 이곳은 강렬한 '호화(胡化)'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당나라의 내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곳은 종족이 혼재되어 있고, 민풍이 용맹했으며 부녀와 아동들까지도 말을 타고 활을 쏘았다. 당나라제국에서 가장 군사적 잠재력을 지닌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이후의 당나라역사를 보면, 하삭지구의 전투력에 더욱 깊은 인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곳의 사병들은 왕왕 몇 주의 땅을 가지고 전체 당나라조정에 대항했다. 그리고 이후 거란제국의 강성을 유주번진만으로도 혼자서 변경밖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을 반군을 지지했다. 아마도 사람들은 반군이 시대를 역행했는데 어찌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반군은 점령지역에서는 확실히 잔혹했다. 마치 야수와 같았고, 당나라정부보다도 훨씬 악랄했다. 그래서 현지백성들은 반란군을 미워했다. 그러나 안사집단의 근거지에서는 달랐다. 사람들은 안록산등을 상당히 추앙했다. 심지어 종교적으로 떠받들기까지 한다. 반란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후까지 하북의 민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안록산, 사사명을 '이성(二聖)"이라 칭했다. 안록산 사사명이 부하장수이며 1대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인 전승사(田承嗣)는 백성들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 심지어 안경서와 사조의까지 추가해서 "사성(四聖)"으로 모시기도 했다. 하삭지구는 중앙정부에 대하여 적대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황영년(黃永年) 선생은 6세기에서 9세기의 중국정치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양경이취, 하북난수"(장안,낙양을 취하기는 쉬워도, 하북을 거두기는 어렵다). 이런 지역을 어찌 쉽게 평정할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당군의 실력은 그다지 웅후하지 못했다. 소각사전투에서 겨우 이겼는데, 하삭을 평정하는 것이 어찌 쉬울 수 있단 말인가? 당시 범양의 이회선(李懷仙)만 하더라도 5만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다른 군벌까지 합치면 10여만의 대군이 된다. 복고회은이 하북을 쳐들어갈 때 군대는 1,2만명에 불과했다. 반군을 소탕할 힘은 없었다. 당군의 주력이 북상한다고 하더라도, 아마 1,2년내에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복고회은은 확실히 공을 세우고 싶어했다. 당조정도 확실히 시원하게 타협에 동의한다. 다만 이런 결말은 어느 개인의 우둔함이나 음험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실력비교의 결과이다. 반군은 우두머리의 수급은 내놓았고, 당나라조정은 하삭의 토지를 내놓았다. 쌍방은 이렇게 겨우 공존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