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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충효군(忠孝軍): 금나라 최후의 최강전투부대

by 중은우시 2021. 12. 31.

글: 암암설사(巖巖說史)

 

1233년, 450명의 '충효군'은 기습을 통해 3,500명의 몽골철기를 참살한다. 몽골군의 총사령관 살길사복화(撒吉思卜華)는 도망가다가 맞아죽는다. 이어서 '충효군'은 승기를 틈타 계속 진격하고 8천의 한군(漢軍)은 뿔뿔히 흩어져 도망친다; 대장 동준(董俊)은 물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사천택(史天澤)은 황급히 도망친다. 장유(張柔)는 포로로 잡히는 것이 겁나서 길가의 풀숲에 숨는다. 낭패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귀덕전투(歸德戰鬪)는 금나라가 이미 멸망에 가까웠을 때이다. 그렇지만 '충효군'은 여전히 몽골철기를 격파했다.

 

충효군은 금나라말기의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는 강력한 부대였다. 단병작전능력은 아주 강하여, 1대1의 전투라면 몽골군도 충효군을 이길 수 없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충효군은 성분이 복잡하다. 대다수는 몽골군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도망쳐온 사람들이어서, 몽골철기와 철천지원한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충효군'은 남북조시대의 '북부병(北府兵)'과 유사했다.

 

충효군이 잘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병사들이 강인할 뿐아니라, 훈련도 잘되어 있었다. 그들은 도(刀), 모(矛), 화총, 궁전, 궁노를 다 사용하도록 훈련받았다. 육지에서의 전투이건 강위에서의 전투이건 모두 잘해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충효군은 모두 갑옷을 입고 손에는 장모, 궁전, 궁노를 들고 돌진한다. 돌진하는 빈도가 아주 많아서, 상대방이 상당히 큰 압박을 받게 된다.

 

1228년, 완안진화상(完顔陳和尙)은 400명의 충효군을 이끌고 멋진 전투를 벌인 바 있다. 그들은 전마를 타고, 8천의 몽골기병과 맞부닥친다. 충효군은 인원이 많지 않았지만, 여러번 돌격하자, 몽골기병이 결국 버티지 못한다. 총사령관 수부타이(速不臺)는 낭패하게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수부타이가 누구인가? 몽골4대명장중 으뜸이다. 나중에 러시아공국을 점령했다. '전투민족'조차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었다.

 

대창원전투(大昌原戰鬪)에서 400명의 충효군은 8천명의 몽골기병과 싸워서 압도한다.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중에 완안진화상은 여러번의 승리를 거두고 위주(衛州)등지에서 몽골군을 여러번 격퇴한다. 그리하여 충효군의 명성은 크게 떨친다. 아쉽게도 금나라황제가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충효군이 삼봉산전투(三峰山戰鬪)에서 패배하고, 완안진화상은 스스로 '죽음을 내려달라'고 청한다.

 

1232년, 삼봉산전투가 발발한다. 톨루이는 4만의 몽골기병을 이끌고 15만의 금나라군과 싸운다. 이 전투에서, 톨루이는 하마터면 전사할 뻔한다. 그러나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려, 금나라의 후방물자조달에 문제가 생기고, 황제의 지휘에 실수가 있었다. 금나라군이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며 망설이고 있을 때, 몽골칸 오고타이가 증원을 오고, 전국은 역전된다. 15만의 정예군이 모조리 무너진 것이다. 

 

삼봉산전투이후, 금나라는 원기를 크게 다쳐 회복하지 못한다. 금애종은 그후 계속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개봉에서 떠나 몽골군의 추격을 피한다. 이때, 완안진화상이 비록 전장에서 전사하였지만, 충효군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들은 포찰관노(浦察官奴)의 지휘하에 계속 몽골기병과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귀덕전투는 충효군이 다시 한번 몽골기병을 격퇴시킨 전투이다.

 

포찰관노는 금나라의 명장으로 일찌기 몽골에 포로로 잡혔었다. 나중에 기회를 보아 도망쳐 온다. 1232년, 삼봉산전투가 발발하자 포살관노는 용맹하게 적을 죽이고, 포위망을 뚫고 나온다. 그후에 양양성으로 가서 남송에 투신한다. 포찰관노는 남송에 금나라를 지원해 함께 몽골기병을 막자고 건의한다. 그러나 남송이 듣지 않았다. 몽골병을 격퇴시킨 후, 포찰관노는 금나라로 다시 돌아온다. 금애종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두 사람간의 갈등은 뿌리깊었다.

 

개봉에서 도망친 후, 금애종은 상당히 낭패스러웠다. 금나라병사들은 몽골군에게 중도에 공격당해 백공묘에서 참패한다. 금애종이 귀덕에 도착했을 때, 주변에는 사병이 거의 없었다. 고가과인의 신세였다. 이때 금나라병사의 대부분은 나가서 양식, 물자를 모았고, 황제의 곁에는 오직 포찰관노와 450명의 충효군만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역습에 성공한 것이다.

 

포찰관노는 금애종에게 건의한다. 충효군이 몽골군에게 거짓투항하였다가 기회를 보아 기습을 하여 승부를 짓겠다고. 황제도 동의한다. 이때 몽골군의 총사령관 살길사복화는 휘하에 3,500명의 몽골철기가 있었다. 대장 장유(장홍범의 부친), 사천택, 동준등이 뒤따랐는데, 휘하에 한족병사 8천여명이 있었다. 전투력에서 장유, 사천택, 동준의 한족병사는 몽골기병과 비슷한 수준으로 백중을 가리기 어려웠다.

 

연속된 여러번의 승리로 살길사복화는 금나라는 이미 경궁지조(驚弓之鳥)라고 여겼고, 그들의 투항을 받아들이며 방비에 허술해진다. 살길사복화와 담판하는 기간동안 포찰관노는 그들 군영의 구체적인 위치를 알아냈고, 몽골군의 방어배치현황도 파악한다. 왕가사(王家寺), 살길사복화의 주둔지에는 수비병사들이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포찰관노는 급습할 기회가 생기게 된다. 늦은 밤, 포찰관노는 450명의 충효군을 이끌고 출격한다. 그들은 배를 타고 북상한다. 이때 귀덕부는 이미 지키는 병사들이 없었다. 금애종은 작전이 실패할까 겁내어, 미리 북문으로 가서 배에 오른다. 언제든지 서주 방면으로 철수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다. 이 450명의 충효군은 다시 한번 승리를 거두었고, 아주 멋지게 싸웠다.

 

충효군은 밤을 타고 상륙하여, 돌연 몽골군영을 급습한다. 살길사복화는 어쩔 줄 모르고 진영도 흐트러진다. 단병작전에서 몽골기병은 충효군의 적수가 못된다. 하물며 밤중의 전투에서 그들은 충효군이 몇명이나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여 충효군은 마치 배추를 베는 것처럼 몽골병사들을 베어버린다. 

 

충효군은 용맹했고, 전투력이 강했다. 그래도 어쨌든 인원이 너무 적었다. 만일 몽골기병이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대응했다면 역시 살길사복화가 승자였을 것이다. 이때 포찰관노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린다. 70명의 병사를 보내 군영의 후방에서 '비화창'을 쏘아 몽골군영을 불태운 것이다. '충효군이 앞뒤로 협공하니, 살길사복화는 금군의 주력이 온 것으로 생각하여 급히 도망친다. 그러다가 맞아죽는다. <금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북군이 버티지 못하고 대패한다.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삼천오백여명이다. 목책을 모조리 불태우고 돌아온다." 

 

3,500명의 몽골기병이 전사한 것이다. 충효군은 승기를 잡아 한군의 군영으로 쳐들어간다. 사천택도 졸지에 공격을 받아 방어하지 못하고 도망친다. 장유는 풀숲에 숨어서 피했고, 동준은 패전후 물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장수들이 도망치니 한군은 진영이 크게 혼란스러워져 모두 도망치게 된다. 충효군이 대승을 거둔 것이다. 아쉽게도 금애종은 포찰관노와 갈등이 너무 깊어 귀덕전투이후 금애종은 기횔르 잡아 포찰관노를 죽인다.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