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방주자(方舟子)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제1차전국대표대회("1대")를 개최한 것을 중국공산당 성립의 표지로 본다. "1대"는 7월 1일에 개최된 것이 아니다. 이 날짜가 공산당건립기념일로 정해진 것은 모택동이 임의로 지정한 것이다. 공산당이 성립된 초기에는 도망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매년 건당을 경축하지도 못했다. 1938년 공산당이 섬서북부에 근거지를 마련 하고, 안정되고난 후에 비로소 모택동은 매년 건당을 기념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만, 모택동이 비록 1대 대표이고, 기록을 책임진 대표이기는 하지만, 자신도 "1대"를 도대체 언제 개최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연안에는 또 한명의 "1대"대표인 동필무가 있었다. 모택동은 동필무를 찾아가서 물어본다. 동필무도 구체적으로 어느 날에 개최했는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모두 개략 7월이라는 것만 기억했다. 왜냐하면 그때 날씨가 아주 더웠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그래서 7월 1일을 공산당성립의 기념일로 결정한다. 왜냐하면 그날은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는 그해에 쓴 <지구전을 논한다(論持久戰)>에서 금년 7월 1일은 중국공산당성립 17주년기념일이라고 밝힌다. 그후 중국공산당은 매년 "7.1"을 기념한다.
모택동, 동필무가 중공 "1대"를 도대체 언제 개최했는지 기억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1대에 참가했던 대표들중 누구도 도대체 어느 날에 개최되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각양각색의 견해가 나오는데 모두 모호하게 7월에 개최했다는 것이었다. 장국도도 만년의 회고록에서 7월 1일 개최했다고 말했ㄷ. 그는 기념일과 실제개최한 날을 혼동한 것이다. 공산당 "1대"를 개최한 구체적인 시간은 나중에 공산국제(코민테른)이 당시에 기록한 것이 남아 있어 확정된다. 코민테른에 보낸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원래 1921년 6월 20일 상해에서 개최하려고 했으나, 각지의 대표가 차례차례 도착하여 7월 23일이 되어서야 모두 도착했다. 그때 회의를 개막한 것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1921년 7월 23일이야말로 중국공산당이 성립한 날이다.
개회장소는 상해프랑스조계의 이공관(李公館)이다. 이공관은 상해대표 이한준(李漢俊)의 형님 집이다. 그의 형님은 외출했고, 이한준은 방이 아주 크기 때문에 그곳을 회의장소로 하게 된 것이다. 30일, 프랑스의 순포가 돌연 수색을 한다. 비록 순포가 사람을 체포하지 않고 바로 떠났지만, 대표들은 더 이상 거기에서 회의를 계속할 수 없다고 여긴다. 상해의 또 다른 대표인 이달(李達)의 부인은 가흥(嘉興)으로 옮겨서 회의를 계속하자고 제안한다. 당시 상해에서 가흥으로 가려면 기차를 타야 했다. 7월 31일에는 태풍이 와서 철로가 운행중단된다. 8월 2일이 되어서야 기차가 다시 운행되기 시작한다. 이달의 부인과 몇몇 대표가 먼저 가흥에 도착해서 준비를 한다. 8월 3일 다른 대표들도 속속 도착한다. 그날 그들은 놀이배를 한 척 구해서 관광객으로 가장해서 가흥의 남호(南湖)에서 회의를 계속하여 끝낸다. 마지막날 회의에서 공산당의 결의, 강령을 채택하고 진독수를 총서리로 선출한다.
회의에 참가한 대표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젊은이였다.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모택동과 함께 장사에서 온 하숙형(何叔衡)이었다. 그는 이미 45세였다. 회의의 다른 대표들은 그를 '노선생'이라고 칭했다. 그는 젊은이들과 여러 면에서 맞지 않았다. 그들은 하숙형은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그를 회의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하숙형은 비록 대표로서 상해에 갔지만, 회의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장사로 되돌아갔다. 남은 대표중 동필무의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래야 겨우 35세였다. 나머지 대표중 가장 젊은 사람은 겨우 19살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20살이었다. 지방마다 2명의 대표를 파견했고, 일본대표 1명이 있었다. 원래는 모두 13명인데, 하숙형이 떠나고 나서 12명이 남는다. 이들은 모두 젊은이들이고 모두 학식있는 사람들이었다. 교사, 대학생, 기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기억력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도 어느 한명도 "1대"를 언제 개최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이는 이들이 이 회의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그다지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날자를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흔적을 보면, 회의에 참석하러 갔던 사람들이 정말 이 회의를 별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산주의자는 두 명이다. 남방의 진독수와 북방의 이대조(李大釗). '남진북리(南陳北李)'로 불렸다. 다만 이 두 명은 모두 "1대"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대조는 북경대학의 교수이다. 북경에는 당시에 이미 공산당이 있었다. 역시 이대조가 도와서 성립한 것이다. 다만, 북경공산당이 개회통지를 받고, 2명의 대표를 보내달라곻 요청받았을 때, 그들은 이대조에게 참석하게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런 자잘한 일에 그렇게 바쁜 북경대교수가 가서 참가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경대학의 학생중에서 선발해서 보낸다. 첫번째로 선발된 사람이 당시 주로 학생운동을 하던 장국도였다. 북경공산당에서는 당시 두 명의 학생이 비교적 유명했다. 모두 북경대학 학생이다. 한 명은 등중하(鄧中夏)이고, 다른 한 명은 나장룡(羅章龍)이다. 두번째 대표는 당연히 이들 두 사람 중 한명을 뽑아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가려 하지 않았다. 둘 다 자신들은 너무 바쁘기 때문에 상해로 가서 회의에 참가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유인정(劉仁靜)이라는 19살의 학생과 장국도를 함께 참석하도록 보낸 것이다.
진독수는 당시 광동에 있었다. 그는 원래 상해에 있는데, 남방정부에서 초청하여 광동교육청의 청장으로 있었다. 상해조직에서는 이번 대표대회에 진독수가 직접 참석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사람을 일부러 보내어 그에게 부탁했다. 그는 포혜승(包惠僧)이다. 무한공산당의 사람이다. 그는 소련유학을 가고 싶었으나, 상해로 간 후에 소련유학을 가지 못하고 상해에 남는다. 포혜승은 기자이고, 진독수를 취재한 바 있으며, 진독수와 잘 아는 사이였다. 상해공산당은 그래서 그를 광주로 보내어 진독수에게 상해의 회의에 참석하도록 권유하게 한 것이다. 진독수는 그 회의에 참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교사(校舍)를 짓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만일 상해로 가서 회의에 참석하게 되면 그 일이 지체될 터였다. 그는 오히려 포혜승에게 광동의 대표로 회의에 참가해달라고 한다. 광동대표에는 또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진독수는 또 다른 젊은이 진공박(陳公博)을 보낸다. 진공박은 막 결혼했기 때문에, 마침 신부와 상해로 신혼여행을 가려고 했었다. 이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진독수도 이 회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진공박이 회의하러 간 것은 실은 신혼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진공박은 상해에 도착한 후, 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30일 가흥으로 장소를 옮겨서 회의를 계속할 때는 가지 않았다. 신부를 데리고 항주로 가서 놀았다. 8월 3일 그는 항주에서 돌아왔고, 마침 또 다른 대표인 주불해(周佛海)를 만난다. 그제서야 회의가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진독수가 총서기로 선출된 것도 알았다.
필자가 금방 얘기했듯이, 회의에 참가한 것은 주로 젊은 학생, 기자였다. 그들이 회의에 참가한 주요목적은 누군가 돈을 내주었고(코민테른이 그들에게 경비를 제공했다), 그 기회에 대상해로 가서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용경비로 관광가는 셈이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아마도 더욱 중요했을 것이고, 회의에 참가하는 것은 가는 길에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비록 그들은 회의에 참가했지만,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중시하지 않았다는 또 다른 증거는 바로 이번 회의에서 결의, 강령을 통과시켰지만, 모든 문건의 중문원시판본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도 그것을 남겨둘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1대"의 제1차결의, 제1차강령은 두개 판본이 있다. 하나는 러시아어판본이다. 코민테른에서 두 명의 대표가 회의에 참가했고, 코민테른에 회의상황을 보고했다. 이들 문건은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보존되었다. 중공건국이후, 1950년대에 소련에 코민테른의 당시 중국관련자료를 달라고 요구했고, 그제서야 이 문건의 러시아어번역본을 찾아낸 것이다. 그것을 다시 중문으로 번역했다.
그외의 하나는 영문판본이다. 회의에 참가했던 진공박은 1923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 유학간다. 1924년 석사학위를 받는다. 석사논문에서 연구한 것은 중국의 공산주의운동이다. 그는 "1대"에 참가한 바 있으므로 그럴 자격이 되었다. 이 논문에는 "1대"문건의 영문번역본이 붙어 있다. 회의에 참가한 대표에게 이들 문건이 있었고, 그는 그것을 영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논문은 1960년에야 발견된다. 영문의 번역본과 러시아어의 번역본을 대조해본 결과 내용이 일치했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다. 다만 중문판은 남겨놓지 않았다. 회의기록을 책임진 모택동까지 여하한 자료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들은 이 회의를 별 것 아니라고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중공 "1대"의 역사문헌은 주로 코민테른이 보존한 것이다. 코민테른은 왜 그 일을 그렇게 중시했을까? 왜냐하면 중국공산당을 성립시킨 것은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이 기획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찌기 1920년, 소련공산당은 러시아인 그레고리 보이틴스키를 파견한다. 중국어 이름은 오정강(吳廷康)이다. 그는 먼저 북경으로 가서 이대조를 찾는다. 이대조는 그에게 상해로 가서 진독수를 만나보라고 권한다. 그는 상해로 가서 진독수를 만난다. 그리고 진독수에게 활동경비를 주고 공산당을 성립시킬 준비를 하게 만든다. 1920년 8월, 상해에 중국공산당 임시중앙이 성립되고, 진독수는 총서기에 선출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920년 8월 중국공산당은 이미 성립되었다. 진독수는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이미 중국공산당의 총서기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다시 "1대"에 참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보이틴스키가 중국을 떠난 후, 코민테른은 1921년 다시 네덜란드인 Hendricus Josephus Franciscus Marie Sneevliet(중국명 馬林)를 파견하면서 소련공산당 극동국 간첩처의 니콜스키를 함께 상해로 보내어, 상해공산당에 경비를 제공하여 제1차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도록 한다. 이미 공산당이 활동하는 도시에서 각각 2명의 대표를 파견하게 한 것이다. 북경, 장사, 광주, 무한, 제남에서 모두 2명씩 대표를 파견한다. 일본유학생도 대표 1명(주불해)을 파견한다. 마린, 니콜스키는 코민테른대표로 처음부터 끝까지 회의에 참석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최후가 비참했다. 마린은 나중에 네덜란드로 돌아간다. 2차대전때 네덜란드는 독일에 점령당하고, 마린은 나치에 살해당한다. 니콜스키는 더욱 비참했다. 1938년 스탈린이 대숙청을 할 때 니콜스키는 원래 소련의 간첩인데, 오히려 외국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중국의 그 13명의 대표는 대부분 최후가 좋지 못했다. 다음으로 일부 대표의 운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상해의 대표부터 얘기하면, 지주인 이한준은 1924년 당에서 제명당한다. 1927년 국민당의 청당(淸黨)떄 비록 이한준이 이미 공산당에서 제명당했지만, 국민당 군벌은 그를 죽여버린다. 또 다른 상해대표인 이달은 진독수와의 불화로 1923년 탈당을 선언하고 교수로 지낸다. 학술연구를 했는데, 연구한 것은 그래도 공산주의였다.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탈취하자, 이달은 다시 공산당에 가입하고 무한대학 교장이 된다. 1966년 문혁이 시작되자 제명당하고 홍위병에게 맞아죽는다.
다시 북경의 대표를 보자. 장국도는 나중에 섬북소비에트정부 주석이 되고, 모택동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한다. 1938년 배신하고 국민당으로 간다. 그는 선종했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1979년 캐나다에서 병사한다. 북경의 또 다른 대표인 유인정은 1929년 당에서 제명당한다. 그는 '트로츠키파'였기 때문이다. 문혁때 그는 반혁명으로 체포되고, 진성감옥에 여러 해동안 갇혀 있는다. 문혁이 끝나고서야 석방된다. 1987년 그는 북경에서 시내버스에 치어 죽는다.
호남장사의 대표중 모택동은 별도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대표 하숙형은 바로 회의에 참가하려다가 쫓겨난 인물이다. 나중에 홍군에 참가한다. 1935년 홍군은 장정을 떠나 복건을 떠난다. 그러나 하숙형은 원래의 소비에트구에 남았고, 국민당에 포위되어 절벽에서 뛰어내려 사망한다.
무한의 대표중 한 명은 동필무이다. 동필무는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전인대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이 되고, 1975년에 사망한다. 선종했다. 무한의 대표중 다른 한명은 진담추(陳潭秋)이다. 그도 홍군에 참가하고 공산당의 간부였다. 1943년, 신강군벌 성세재(盛世才)가 공산당과 결별하면서 원래 신강에서 그와 협력하던 공산당원들을 죽여버린다. 거기에 진담추도 끼어 있었다.
제남의 두 명의 대표중 한명은 왕진미(王盡美)이다. 그는 1925년 폐결핵으로 병사한다. 또 다른 대표인 등은명(鄧恩銘)은 나중에 산동에서 공산당을 이끈다. 1931년 산동군벌 한복거(韓復渠)에 의해 처형당한다.
광동의 대표 진공박은 다음 해인 1922년 탈당을 선언한다. 1923년 미국으로 유학가서 4년만에 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그리고 국민당에 가입한다. 항전기간, 그는 왕정위를 따라 친일정부에 참여했고, 왕정위 정권의 2인자가 된다. 왕정위가 사망한 후, 진공박은 남경국민당의 주석, 행정원장이 된다. 그는 2호 대한간(大漢奸,매국노)이다. 항전승리후, 그는 일본으로 도망친다. 국민당정부의 요청으로 인도되고, 총살당한다. 광동의 또 다른 대표는 포혜승이다. 1927년 국민당 청당시 탈당하고, 나중에 국민당에 가입한다. 거기서 높지도 낮지도 않은 관직을 가진다. 나중에 마카오로 간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그는 돌아가고 싶어 모택동, 주은래에게 편지를 쓴다. 그들은 귀국을 허락했다. 귀국후 그는 정부에서 보살펴준다. 그러나 문혁때 비판을 받았다. 다만 심하게 받지는 않았다. 그는 문혁때 살아남았고 1979년에 병사한다.
마지막으로 일본유학생 주불해가 있다. 1924년 탈당하고, 국민당에 가입한다. 나중에 왕정위를 따라 친일정부에 가담한다. 왕정위정권이 성립될 때 그는 그 안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다. 행정원의 부원장을 지냈다. 항전승리후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장개석이 사면해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킨다. 1948년 감옥에서 병사한다.
합계 13명의 대표중 7명은 제명당하거나 탈당했다. 두 명은 심지어 대한간이 된다. 그 비율은 상당히 높다. 이는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한 건당의 원로들이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건한 공산주의신앙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공산주의를 신앙하는 것은 유행같은 것이었다. 이들 젊은이들은 아마도 유행을 따라가거나 혹은 따라다니며 즐긴 것뿐이다. 신앙이 굳건하지 못하니 쉽게 변절할 수 있었다. 단지 코민테른의 도움하에, 현재의 화법으로 하자면 외국세력의 지시하에 엉성한 조직을 세운 것뿐이다. 나중에 중공이 떠드는 것처럼 '건당'이 무슨 천지개벽할 사건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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