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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헌제38

[황자쟁위술] 무장탈위술(武裝奪位術) 내선득위패(內禪得位牌) 순편 무력으로 황위를 차지하는 범주에는 궁중정변의 방식으로 황제를 핍박하여 황위를 물려받는 것, 즉 선양(禪讓)받는 것이 포함된다. 선양은 비교적 온화하고 우아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중국고대에 요(堯), 순(舜), 우(禹)의 왕위가 선양으로 넘어간 것을 효시로 한다. 요,순,우의 선양방.. 2015. 10. 11.
중국역사상 주공을 망친 5명의 모사(謀士) 글: 문풍탁탁(文風卓卓) 천하를 쟁패하려면 좋은 무장이 필요할 뿐아니라, 좋은 모사도 필요하다. 그러나, 만일 운이 좋지 않으면, 아이큐가 20도 되지 않는 자를 만나게 된다. 중국역사상 가장 엉터리였던 5명의 모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1. 곽개(郭開): 조(趙)나라를 망치다. 조나라 말년의.. 2015. 4. 25.
유비는 왜 관우에게 작위를 주지 않았을까? 글: 생활문적(生活文摘) 고대의 제왕들은 인심을 얻고, 심복의 충성심을 얻어내고, 위엄을 보이고, 은총을 보여주기 위하여 왕왕 가관(加官), 진작(晋爵), 봉후(封侯)등등을 유효한 수단으로 자주 쓴다. <삼국지.촉지>를 뒤적여 보면 알 수 있다. 유비의 서촉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을 .. 2015. 2. 10.
조조는 동탁을 암살하지 않았다. 글: 불감왕언(不敢枉言) <삼국연의>에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동탁이 권력을 농단하고 있어서, 사도 왕윤이 신하들을 불러모아놓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돌연 조조가 박수를 치며 크게 웃는다. "조정의 공경들이 밤부터 낮까지 곡을 하고, 낮에서 밤까지 곡을 하.. 2015. 2. 10.
소년 제갈량은 조조의 손에 죽을 뻔했다 글: 유려평(劉黎平) 제갈량이 띠집(茅廬)을 떠나기 전에 조조와는 거의 만난적이 없는 것같다. 그러나, 소년시대에 제갈량의 목숨은 한때 조조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는 한헌제 초평4년(193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 해, 조조의 부친 조숭(曹嵩)은 전란을 피해, 산동 낭야일대에 거.. 2015. 2. 10.
삼국시대 공고진주(功高震主)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최후 글: 문방장궤(文房掌櫃) 어떤 사람이 어떤 일에 처하면 모두 자신이 처한 지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주(主)인지 객(客)인지. 예를 들어 주군의 앞에서 신하는 영원히 객의 지위이다. 절대로 주군의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특히 다른 사람이 있을 때에는. 삼국시대 양수(.. 2015. 1. 14.
황건적의 난 이후의 5년(2): 소란에서 내전으로 '황건'이후의 5년은 먼저 소란에서 내전으로 변화하는 5년이다. 동한의 변경지구와 소수민족의 반란(어떤 사람은 의거라고도 부르나 그건 각자 알아서 붙이면 될 일이다)은 건국이래 계속 있어왔다. 마원(馬援)의 이야기가 비교적 유명하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전삼조의 상황은 기본적으.. 2014. 12. 12.
황건적의 난 이후의 5년(1): 의의 글: 낙극(洛克) 장각(張角)이 이끄는 '황건적의 난"은 난을 일으킨 해에 동한정권에 의하여 진압된다. 이 점에 있어서 이전 두 왕조말기의 농민의거와는 확실히 다르다. 진말과 서한말기(정확히 말하면 왕망의 신말기)의 농민의거는 모두 난이 일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정권이 .. 2014. 12. 12.
유황숙(劉皇叔)의 신세내력 글: 마백용(馬伯庸) <삼국연의>의 첫부분 제1회에 유비가 등장하면서 자신은 한실종친이라고 내세운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으로, 한경제(漢景帝) 각하의 현손(玄孫)으로 성은 유(劉)이고 이름은 비(備)이며, 자는 현덕(玄德)이다." 이 부분은 정사(正史)의 기재에 부.. 2014. 8. 26.
<삼국연의>는 "존유폄조(尊劉貶曹)"인가? 글: 조종국(曹宗國) 역대이래로 논자들은 &lt;삼국연의&gt;에 '존유폄조'의 경향이 있다고 말해왔다. 필자는 기실 이것은 나관중을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관중은 확실히 유씨 한왕조의 정통관념을 떠받들었다. 다만 유비를 정통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짜정통의 전형으로 .. 2014.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