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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소년 제갈량은 조조의 손에 죽을 뻔했다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유려평(劉黎平)


제갈량이 띠집(茅廬)을 떠나기 전에 조조와는 거의 만난적이 없는 것같다. 그러나, 소년시대에 제갈량의 목숨은 한때 조조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는 한헌제 초평4년(193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 해, 조조의 부친 조숭(曹嵩)은 전란을 피해, 산동 낭야일대에 거주했다. 기실 그곳은 제갈량의 고향이다. 조조는 태산태수 응소에게 명하여 조숭을 영접하게 했다. 서주태수 도겸은 부하 음평(陰平)을 보내어 그를 호송하게 한다. 당시 조씨집안의 짐은 아주 많아서 마차가 100여대나 되었다. 재물이 이렇게 밖으로 드러나니, 음평과 그 부하들의 탐욕을 자극한다. 사졸들은 금은보화에 침을 흘린다. 그 결과 화, 비 일대에서 조숭의 일가 전부를 죽여버린다. 거기에는 조숭의 막내아들 조덕(曹德)도 포함되어 있었고, 재물은 모조리 강탈당한다. 그 후에, 음평과 사졸들은 도망친다.


이 일은 <삼국연의>에도 쓰여 있다. 조조는 대노하여 병력을 일으켜 부친의 복수를 한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이미 복수의 범위를 크게 초과했다. 그리하여 무고한 자들을 함부로 죽이는 지경에 이른다. 조조는 서주로 진격하고, 도겸은 패주한다. 당시 서주에는 동탁의 난을 피하여 장안, 낙양에서 온 주민이 대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조조가 지휘하는 대도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벌어져, 십여만을 갱살(坑殺)하고, 모조리 사수(泗水)에 던져넣어서, 사수의 강물이 흐르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조조를 살인광이라 하더라도 전혀 지나치지 않고 동탁보다도 훨씬 심했다.


조조의 대군이 도착한 곳은 사서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닭이나 개까지 다 죽여버리고, 성읍에는 더 이상 걸어다니는 사람이 없었다.(鷄犬亦盡, 城邑無復行人)". 이는 조조 자신이 쓴 "천리무계명(千里無鷄鳴), 백골폐어야(白骨蔽於野)"와 차이가 없다.


조조이 도살행동은 대량의 난민을 만들어 낸다. 난민들은 남쪽으로 도망친다.


조조의 도살이 서주,산동일대에서 이루어질 때 제갈현(諸葛玄)이라는 사람이 당시 유표의 부하인데, 경성으로 형주의 업무를 보고하러 가는 중이었다. 조조가 도살을 저지른다는 말을 듣자, 즉시 고향인 낭야로 돌아가서, 형인 제갈규(諸葛珪)의 미망인과 자녀를 데리고, 여강(廬江)으로 피난간다. 즉 지금의 안휘 일대로 간다.


이 제갈규의 자녀중에 바로 제갈량이 있다. 제갈현은 그의 숙부이다. 당시에 제갈량은 14살이다. 함께 피난한 사람으로는 동생 제갈균(諸葛均)이 있다. 그리고 누나와 여동생도 있었다. 조조는 당시에 39살이었고, 제갈량이 상대할 사람은 아니었다. 소년 제갈량의 눈에 조조는 이름만 들어도 전율하는 살인악마였다. 이는 제갈량의 나중의 정치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제갈현은 당시에 유표에 의하여 예장태수에 추천되어 있었다. 관직이 아주 높았다. 그러나 이 직위에 당시 조정은 따로 주호라는 사람을 예장태수로 임명했다. 한 자리에 두 사람이 있으니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결국은 무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제갈현이 주호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제갈량일가를 데리고 유표에게 간다. 가는 도중에 평정산에서 병이 난다. 이때 대명이 자자한 신의 장중경(張仲景)이 치료하나, 신의도 제갈현을 낫게 하지 못하고, 제갈현은 평정산에서 죽는다. 일설에 의하면 제갈현이 반란병에 죽었다고 말한다.


제갈량이 나중에 남양으로 가고, 유표는 그를 잘 돌보아 준다. 이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자신의 옛부하가 그의 숙부이고, 또한 나중에 제갈량의 처는 또한 유표 부인의 외조카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