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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황건적의 난 이후의 5년(1): 의의

by 중은우시 2014. 12. 12.

글: 낙극(洛克)

 

장각(張角)이 이끄는 '황건적의 난"은 난을 일으킨 해에 동한정권에 의하여 진압된다.

이 점에 있어서 이전 두 왕조말기의 농민의거와는 확실히 다르다. 진말과 서한말기(정확히 말하면 왕망의 신말기)의 농민의거는 모두 난이 일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정권이 무너졌다. 원래의 왕조통치자는 농민의 난에 휩쓸려 철저히 매몰된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보면, 장각의 '황건군'이 실패한 후, 동한왕조는 36년간이나 더 지속되었다. 당시의 황제인 한영제는 별래무양하게 5년을 더 살다가 병사한다. 만일 병사하지 않았다면 한영제나 동한정권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를 자신있게 말하기 힘들 것이다.

5년의 기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오년동안 어떤 일은 일어났고, 어떤 것은 사라졌다.

'황건적의 난'으로부터 한영제의 붕어에 이르기까지 딱 5년이 걸렸다.

이 5년에 대하여 지금까지 진지하게 연구해본 사람은 없는 것같다. 항상 모호하고 불명확한 말로 지나가곤 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연구할 가치가 있는 기간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동한에 대하여 '황건적의 난'까지 기술하고 끝낸다.

예를 들어 곽말약이 주편인 <중국사고>에서 동한부분의 마지막 장(章)의 표제는 '황건대기의'이고, 전백찬의 <중국사강요>에서 동한부분의 마지막 절의 소표제도 역시 '황건대기의'이다.

이것은 유물사관과 계급투쟁(농민의거)를 핵심으로 삼는 인사들만의 생각은 아니다. <캠브리지중국진한사>의 도입부에서도 이런 말을 한다.

"심지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185년의 황건적의 난이 발발한 것을 실제로 동한정권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다만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목(錢穆)의 <국사대강>에는 '동한흥망'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황건'이라는 글자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마치 '황건적의 난'이 동한의 흥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처럼.

필자는 검색해서 통계를 내보았다. <후한서>(사마표의 <속한지>포함)에 '황건'이라는 단어는 모두 108번 나온다. 그외에 '장각'도 41번이나 나온다.

여기서 알아아 할 것은 후한서의 저자인 범엽이 '황건'에 대하여 별도의 전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삼국지>(배송지의 주석 포함)에 '황건'은 모두 75차례나 나온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황건적의 난'은 동한말기의 대사건이다. 요즘은 계급투쟁을 얘기하지 않고, 전목과 같은 사람은 완전히 못본척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대사건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반드시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만일 동한의 흥망을 얘기하면서, 굳이 '황건적의 난'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확실한 이데오로기적 입장이다.

'황건적의 난'이 동한왕조의 최종결말에 철저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동한이 결국 멸망한 것은 황건적의 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황건적의 난'에서 동한이 정식으로 멸망하기까지, 즉 기원전 220년 동한의 한헌제가 조비에게 선양하기까지의 사이에 36년이라는 기간이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주 익숙하게 들은 말이 있을 것이다. 한헌제가 재위한 30년은 동한정권이 유명무실한 30년이었다. 무엇이 유명무실인가. 그것은 비유하자면 한 부부가 이미 같이 살고 있지 않는데, 이혼절차만 취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역사학자들은 한헌제가 재위한 30년을 삼국위진(三國魏晋)에 넣는다. 그 뜻은 이 시기는 이미 삼국시대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학술계와 민간은 보기 드물게 의견이 일치한다.

학계의 입장은 이미 위에서 설명했다. <삼국연의>의 영향을 깊이 받은 중국민중에 있어서, 이 점은 훨씬 더 뿌리깊게 박힌 인식과 습관이다. 그렇지 않고, 정말 220년 한영제의 선양때부터 삼국이 시작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많은 삼국의 영웅들은 모두 '삼국'시대의 문턱도 넘어서지 못한 것이 된다. 조조, 주유와 관우는 삼국인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한나라말기의 인물들만이 삼국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삼고초려', '적벽대전'은 더 이상 삼국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중국인들에게 상상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한헌제가 재위한 30년은 특수한 역사시기이다. 그것은 이중적인 속성이 있다. 마치 이미 바람이 깊이 나버린 남자와 같이, 법률관계로 보면 아직도 호적상의 부인의 사람이지만, 실제생활에서는 일찌감치 '정부'의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헌제가 재위한 30년은 동한정권의 유명무실한 30년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모든 일은 원인이 있다. 이런 유명무실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어찌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는가?

이는 바로 한헌제의 부친, 즉 그의 전임황제인 한영제로부터 얘기해야 한다.

'황건적의 난'에서 한헌제의 퇴위까지 전후 36년중, 한헌제가 재위한 것은 30년이다. 나머지 몇년은 무슨 시간일까? 중간의 몇 달을 제외하면 바로 한영제가 재위한 마지막 기간이다.

한영제가 재위한 마지막 몇년은 바로 '황건적의 난'이후의 5년이다.

황건적의 난은 동한왕조가 멸망으로 향하는 시작이었다. 이것은 비교적 공인된 견해이다. 다만 동한왕조가 언제부터 유명무실해졌는가에 대하여는 의견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면서 동한정권은 유명무실해졌다고 본다.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동한정권이 유명무실해진 것은 한헌제의 즉위때부터 기산해야 한다고 본다.

필자는 후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즉, 한영제가 재위한 마지막 5년을 한헌제가 재위한 기간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황건적의 난'에서부터 한헌제의 퇴위까지의 기간을 구분한다면 아래와 같이 몇 단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제1단계: 한영제가 재위한 마지막 5년(즉, 황건적의 난으로부터 한영제의 붕어시까지)

제2단계: 한영제의 붕어로부터 동탁의 사망까지

 (1) 한영제의 붕어로부터 동탁의 입경이전(하진의 난)

 (2) 동탁의 입경에서 동탁의 죽음까지(동탁의 난)

제3단계 동탁이후의 한위선대(漢魏禪代)까지(후동탁시기에서 조,유,손정권이 형성되는 시대)

 

이 3개의 단계는 앞뒤로 점점 발전하는 관계에 있다.

본문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위의 제1단계이다.

최소한 아래의 몇 가지 사건은 한영제가 재위한 마지막 5년을 특별히 관심가져야 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첫째는 한영제의 죽음이다.

모든 황제의 죽음이 대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황제는 죽으면 죽는 것이다. 그저 장례행사를 거창하게 하는 것을 제외하고(어떤 황제는 장례식조차 없기는 하다), 다른 특별한 의미는 기실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한영제는 다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최소한 동한 황제들 중에서, 개국황제 광무제 유수를 포함하여, 그 어느 황제의 죽음도 역사적인 전환점이라는 의미에서 한영제의 죽음과 나란히 얘기할 수있는 것은 없다. 

<캠브리지중국진한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한영제가 189년 5월 13일 눈을 감았을 때, 어떤 의미에 있어서 전체 전통제국은 그와 함께 죽었다. 비록 그 일이 즉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전체 전통제국은 우리가 동한만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서한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심지어 진나라까지도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대제국이 종결된 시점이다. 다음 대제국시대가 개막되는 것은 수,당을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영제의 죽음은 대사건이다.

 

다음으로, 앞에서 얘기한 '황건적의 난'도 대사건이다.

두 대사건의 사이의 과정은 분명히 주목할만한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한영제가 재위한 마지막 5년이 완전하고 독립한 시간대를 이루고 주목할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은 바로 한영제 당시의 연령과 황권상태와 관련이 있다.

동한왕조는 어느정도 부녀아동형 왕조라고 볼 수 있다. 모든 황제는 가장 앞의 3명이 18세이후에 등극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황제의 등극연령은 모두 18세가 되지 않는다. 그중 반수이상은 10살미만에 등극한다. 한영제는 등극때 12살이었다. 역시 아동황제에 속한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할 때 한영제는 28살이었다. 28세의 황제를 오늘날의 눈으로 보자면 역시 나이가 젊은 편에 속한다. 생각해보라 지금 28살짜리가 부현장에 올랐다고 말들이 많은데, 황제라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한나라때의 상황은 약간 다르다. 28세의 황제는 연부역강한 황제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노련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때의 한영제는 즉위한지 이미 16년이 되었다. 현재의 국가원수나 지역지도자들로 보자면 이미 3,4번 임기를 연임한 셈이다.

 

아마도 재위기간보다 더욱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한영제 재위시의 권력상태일 것이다. 동한의 궁정정치의 기본특색은 위에서 말하자면 부녀아동형이다. 이런 유형의 정치에 있어서는 또 다른 특색이 따라온다. 바로 황태후와 대장군이 결합한 최고권력구조이다. 이런 권력구조에 처한 황제는 유아기뿐아니라, 성년이 되어서도 원래 그에게 속해야할 황권은 여전히 황태후와 대장군의 손아귀에 꽉 쥐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전체 동한시기에서 광무제와 한명제, 한장제 3명의 황제를 제외하고, 나머지 황제는 재위기간동안 이런 권력의 구속과 족쇄에서 다행히 벗어날 수 있었던 황제는 단지 한순제와 한영제 두 명 뿐이다. 그들 둘은 재위기간동안 기본적으로 자신의 황권을 장악했다고 볼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권력은 확실히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가 책임을 남에게 미룰 수는 없다.

 

한영제가 재위한 마지막 5년이 단독으로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는 또 다른 측면은 나중에 삼국의 국면을 형성하는 주도적인 여러 인물들이 모두 이 시기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특히 조조, 유비, 손권의 세 집안은 모두 이후 사업의 초보적인 기초를 이 시기에 닦는다. 삼국 개국인물들이 밑천을 어디에서 구했는지를 알아보려면 눈을 이 시기로 돌려야 한다.

그외에,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5년은 바로 정치 혹은 경제의 한 시간단위이다.

이 시간단위는 동한의 이후 유명무실과 철저멸망과 일종의 뿌리가 나고 싹이 트는 관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