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방장궤(文房掌櫃)
어떤 사람이 어떤 일에 처하면 모두 자신이 처한 지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주(主)인지 객(客)인지. 예를 들어 주군의 앞에서 신하는 영원히 객의 지위이다. 절대로 주군의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특히 다른 사람이 있을 때에는. 삼국시대 양수(楊修)는 바로 전형적인 반면교사이다. 그는 주군 조조가 계륵을 씹기는 맛이 없고 버리가는 아까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군이 철군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자신의 총명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랑했다. 그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양수는 훤빈탈주(喧賓奪主)의 위험을 몰랐던 것같다. 아마도 이 성어는 1천년이후의 청나라때 비로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의 이전에 사마천은 유사한 성어를 만들어 냈다. 바로 "공고진주"이다. 즉 공로가 너무 크면, 군주가 놀라서 마음에 의심을 품고 경계하게 된다는 말이다. 공고진주의 출처는 <사기.회음후열전>이다: "신이 듣기로 용맹하고 담략이 뒤어나 주군을 놀라게 하는(震主) 자는 몸이 위험하고, 공이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내리지 못한다" 역사상 공고진주로 피살된 공신은 실로 너무 많다. 태사공이 이 성어를 만들어낸 이후, 가장 잘 배워서 활용한 사람은 손권이라고 할 수 있다.
육손의 공로는 동오에 있어서 주유에 못지 않다. 육손이 이릉전투후, 계속 형주에 머문다. 육손은 비록 무직을 맡았지만, 그 자신은 서생으로 자처했다. 그리하여 육손은 형주를 다스리는데 완전히 '문관화'하였다. 형주를 아주 잘 다스렸다. 육손은 병력을 훈련시키는데는 탁월한 군사가의 재능을 드러냈고, 형주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정예였다. 다만, 육손이 형주에서 너무나 뛰어난 활약을 하는 바람에 형주에는 "육백언(육손)이 있음을 알 뿐 손중모(손권)이 있음은 알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더욱 관건적인 것은 육손의 처가 손책의 딸이다. 그리고 손권은 손책의 후인에 대하여 계속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육손은 오랫동안 외지에서 병력을 이끌었고, 만일 그가 반란을 일으킨다면.....이때의 손권은 의심이 많았다. 그래서 '삼기육손(三氣陸遜)'의 사건을 벌인다. 결국 육손은 소위 '20조죄상'때문에 화가나서 죽는다. 비록 나중에 육항(陸抗)이 이 '20조죄상'을 완전히 반박해서 손권도 부득이 육손을 위하여 수령(守靈)을 해야 했지만, 모든 것은 이미 늦었다. 형주에서 병사한 육손은 삼국시대 가장 비참한 공고진주의 인물이 되었다.
이를 보면 훤빈탈주도 좋고 공고진주도 좋고, 모두 정확히 자신을 대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기를 좋아하거나 혹은 공이 높아서 불가일세하는 것은 모두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힘들다. 시시때때로 명백히 알아야 한다: 상사의 앞에서 당신은 말 잘듣는 부하이다; 스승의 앞에서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는 학생이다; 주군의 앞에서 당신은 완전히 주군의 뜻에 따라 집행하는 신하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유를 얘기해야 한다. 주유는 삼국시대 첫번째 공고진주한 자이다.(조조는 군왕이므로 여기의 논의에서 제외한다). 동시에 가장 행운아인 공고진주자이다. 그의 '공'은 도대체 얼마나 높은가? 오나라의 판도가 어디서 왔는지를 보아야 한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주유는 수석공신이라 할 수 있다. 손책이 죽은 후, 주유는 탁고중신중 하나가 된다. 그후, 주유는 주공에게 인질을 보내라고 설득하여, 이로 인해 이후 조조가 남하할 때 뒷걱정이 없게 만들었다. 조조가 진정으로 남하할 때에는 주유가 성공적으로 천고에 전해지는 적벽지전을 승리로 이끈다. 그후, 주유는 다시 죽을 힘을 다해서 남군을 취한다. 이들 공로는 손권이 후에 말한 바와 같이, "주공근(주유)이 아니면 고는 황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한 원인이다. 왜 주유는 행운아인 공고진주자라고 말하는가? 이는 그가 36살에 죽었기 때문이다. 비록 주유의 죽음을 오나라는 서천을 탈취할 기회를 잃었지만, 주유 개인을 보면, 이는 행운이었다. 주유가 정말 서천을 빼앗을 능력이 있었는지는 불문하고, 빼앗아서 진정 '이분천하'를 실현했다고 하더라도, 주유의 결말은 어떠했을 것인가. 일단 주유가 성도에 남아서 주둔하게 되면, 우리는 이렇게 상상할 수 있다. '삼기주유'의 상황이 나타났을 것이고, 아마도 세번에 그치지 않았을 수도 잇다. 그저 이 '기'의 주어는 제갈량이 아니라, 손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상상해볼 수 있다. 만일 주유도 육손처럼 6,7십세까지 살 수 있었다면, 아마도 정말 화가나서 죽었을 것이다. 다만 '행운'인 것은 주유가 촉을 취하는 길에서 죽은 것이다. '하늘이 영재를 질투한다'는 주유는 비록 유감을 남겼지만, 그의 인생은 완벽하게 끝날 수 있었다.
동오의 육손과 주유를 제외하고, 삼국시대 가장 유명한 공고진주자는 제갈량이다. 삼국에서 유선의 '수하'인 제갈량과 유협의 '수하'인 조조는 어느 정도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진주'를 따지자면 아마도 조조조차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한헌제는 한번은 조조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내가 당신의 사업에 장애가 된다면, 당신은 직접 나를 죽여도 좋다." 조조는 그 말을 들은 후 즉시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고 한다. 이때 이후는 다시는 한헌제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제갈량은 달랐다. 그가 조정에 서 있으면 유선은 뒤에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른채 앉아 있었다. 제갈량이 한번은 조당에서 환관을 크게 욕했고 놀란 유선은 그저 따라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출사표>는 바로 제갈량이 '진주'한 '죄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천고에 유전되는 글에서 제갈량은 일종의 부친이 아들을 훈계하는 투로 말한다. 그는 자신이 주공(周公)인 것처럼 말했다. 당연히 제갈량이 총명한 점은 바로, '국궁진췌'로 '공고진주'를 대체했다는 것이다(기실 <후출사표>는 제갈량이 쓴 것이 아니고, 제갈각이 쓴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국궁진췌'라는 말은 제갈각에게서 나왔고, 제갈량은 정말 자신의 이 조카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기실 제갈량의 '공'은 아직 완전히 '진주'하는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의 북벌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정해볼 수 있다. 만일 제갈량이 정말 장안을 취했다면 아마도 '태조고황제'는 그때 탄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아무리 총명해도 결국은 촉한을 도와 천하를 얻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공고진주자이면서 사마씨는 가장 성공한 편이다. 왜냐하면 최종적으로 삼국을 통일한 사람이 바로 사마씨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사마씨가 성공한 관건을 얘기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제갈량의 북벌이 사마씨의 병권을 강화시켰다고 말한다. 이 말은 당연히 맞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병권의 강화는 아직 대위칭제(代魏稱帝)를 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제갈량이 죽었을 때, 사마의의 손에는 확실히 중병을 장악하고 있었다. 다만 이때의 위나라의 병마는 전부 이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촉동맹후, 위나라는 동서 양전선에서 동시에 작전을 전개한다. 서쪽전선에는 먼저 조진이 있고 나중에 사아의가 있었다; 동쪽전선에는 만총, 문빙등이 지키고 있었다. 연의에서는 촉위를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동쪽전선쪽은 묘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만총, 문빙등 장수가 후세인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기실 이들은 모두 일대 명장이고, 모두 한 지방을 지킬 수 있었다. 사마씨는 당시에 위나라를 대체할 정도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다만 사정은 항상 변화한다. 위명제 조예가 죽은 후, 조상이 출현하면서, 사정은 완전히 바뀐다. 조상의 악행으로 조씨는 인심을 크게 잃는다. 사마씨는 이 시기에 조용히 굴기한다. 조씨가 이때 가까이 한 인물은 모두 하안(何晏)과 같은 공자형의 인물이고, 사마씨집안에는 인재가 넘쳐났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사마의는 고평릉사변에서 일거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사마의는 왕릉, 영호우를 주살하고, 사마사는 문흠, 관구검을 주살한다. 사마소는 제갈탄을 주살한다. 사마씨의 강산은 ㅏㅁ이제 확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씨의 성공은 제갈량이 요소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성공한 원인은 조씨의 몰락이다. 조상이 없었다면 사마의도 없었다. 조상이 폭정을 할 때 사마의는 인심을 널리 얻는다. 사마씨가 일단 조씨와 전투를 개시하면 인심이 어디로 향할지는 분명하다 어찌 이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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