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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황건적의 난 이후의 5년(2): 소란에서 내전으로

by 중은우시 2014. 12. 12.

'황건'이후의 5년은 먼저 소란에서 내전으로 변화하는 5년이다.

동한의 변경지구와 소수민족의 반란(어떤 사람은 의거라고도 부르나 그건 각자 알아서 붙이면 될 일이다)은 건국이래 계속 있어왔다. 마원(馬援)의 이야기가 비교적 유명하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전삼조의 상황은 기본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고, 사건이 적었다. 전환과 과도는 한화제(漢和帝)때 나타난다. <중국사고>에는 이렇게 말한다: "화제이후 7,8십년간, 크고 작은 100여차례의 농민의 난이 있었다." 계산해보면 매년 농민의 난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소란의 기점은 한안제가 즉위한 이후부터 계산해야 한다. 한안제시기의 소란은 주로 강족, 선비족, 오환족, 남흉노, 그리고 월남/광서의 변경지대(북,서,남의 3개방향이 위주이다)의 소수민족지구였다. 강족이 그 중에 중요했다. 영초5년(111년)의 조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구적종횡(寇賊縱橫), 이적활화(夷狄滑夏), 융사불식(戎事不息)". 기실 '이적활화'가 가장 주요했다.

 

한순제때의 소란은 내지에서 대규모의 통제불능상태가 나타난다. 그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강회(江淮)지구이다. 이 곳은 중국역사상 전통적인 성격의 소란이 다발하는 지역이다. 만일 소수민족지구의 소날이 어느 정도 민족적인 동란요소를 담고 있다면, 한인을 위주로한 지구의 소란은 더욱 직접적이고 단순한 생존위기와 압력을 드러낸다.

소란이 모종의 변질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한환제의 등극을 전후한 시기이다. 장기적인 변방의 전투는 동한제국을 소모전의 진흙탕에 빠지게 만들어, 자금소모가 커서(한영제가 나중에 대거 매관매직한 것도 이와 관련있다), 막아내는데 피곤했다. 피곤한 몸에는 병이 많이 생긴다. 한환제때의 소란은 이미 더 이상 변방 혹은 강회등 전통적으로 소란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에 한정되지 않았다. 이미 거의 전체 동한의 관할범위에 퍼졌다. 그 중에는 중앙이 주로 통제하는 지역인 하남, 하북도 포함된다.

 

이 때의 소란은 하나의 특수한 현상을 나타냈다: 스스로 명호를 정한 것이다. 소위: "한안제이후,...황제와 왕을 칭하는 자가 십수명에 이르렀다.."(후한서. 장법등풍도양열전).  

백수이가 주편한 <중국통사>에는 스스로 명호를 세운 사례를 모조리 열거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인 신호를 예시하기에 충분하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면서, '창천은 이미 죽었고, 황천이 세워져야 한다"는 하늘도 뒤흔들 구호가 나타나게 된다.

한영제가 황제에 오를 때, 제국이 직면한 소란은 이미 거의 통상적인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만일 사적에 기재된 상황으로 보면, 이전과 비교하여, 상황은 오히려 약간 완화된 모습을 보인다. 반세기동안 지속되던 강족과의 전쟁은 마침내 한영제의즉위를 전후하여 잠시 조용해진다. 선비족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인 단석괴도 광화4년(181년) 사망한다. 이것은 모두 당국에게 약간의 숨쉴 여유를 주는 좋은 소식이다. 경내 각지의 소란은 여기저기서 일어났고,누구도 단기간내에 뿌리뽑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소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감각이 널리 퍼질 때,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황건적의 난은 동한에서 나타났던 소란의 계속이면서 총폭발이다. 동시에 모종의 새로운 전환점과 시작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동한왕조가 '황건적의 난'으로 망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간단한 논리인 것처럼 보인다. 다만 '황건적의 난'이 동한말기의 중요한 분수령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이 분수령의 간판에는 두 글자가 쓰여진다: 내전

'황건적의 난'의 이전에 있었던 각종 소란은 그저 소란이다. 내전의 단계로 승급되지는 못했다. '황건적의 난' 이후의 소란은 내전의 심연으로 향했다. 그리고 계속되면서 온천지에서 일어나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내전이 되었다.

황건적의 난 자체가 하나의 내전이다. 그 인원규모를 보건 전투의 치열한 정도를 보건 모두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황건적의 난이 동한말기 내전국면에 끼친 영향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더욱 많다. 즉 그것은 그후에 이어진 소란과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투의 도화선이다. <후한서.효영제기>를 보면, 황건적의 난에서 한영제의 붕어까지의 5년동안 각지는 거의 소란으로 가득 찼다. 너무나 많아서 눈이 어지러울 정도이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제친 것처럼.

이같이 전국각지에서 일어나는 소란은 나중의 내전에 불을 붙이는 불씨가 된다.

 

사건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황중의종(湟中義從)과 '어양(漁陽)' 이장(二張)의 반란이다.

황중의종 반란은 직접적으로 황건적의 난으로 인하여 일어났다.

중평원년, 북지에서 투항한 강족 선령종(先零種)은 황건적의 난으로 인하여 황중의 강족, 의종호 북궁백옥(北宮伯玉)등과 반란을 일으켜서 농우(감숙동부)를 뒤흔든다. 

소란을 먼저 일으킨 자는 북궁백옥이었다. 그러나 권력은 금방 변장(邊章)에게 넘어가고 나중에는 한수(韓遂), 마등(馬騰)등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 민족혼합적인 성격의 무장세력은 한헌제 말기까지 계속하여 존재한다. 조조와 원소가 관도지전을 벌일 때, 그들의 존재와 입장은 전투국면의 방향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후, 바로 직면해서 해결해야 했던 것은 바로 한수와 마등의 문제였다. 마초(馬超)가 조조에게 최종적으로 패전하는데 그 시기는 214년(건안19년)이다. 전후로 30여년간 존속했던 것이다.

 

어양 '이장'의 반란은 황종의종의 소란에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후거기장군 장온(張溫)은 변장등을 토벌하러 나갔다가...중평원년, 전중산상(中山相) 장순(張純)등은 한수 및 오환의 대인 과 연맹을 맺고, 계하를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백성을 노략질하며, 오환교위 기조, 우북평태수 유정, 요동태수 양종등을 죽인다. 무리는 십여만에 이르렀고, 비여에 주둔했다.(<후한서. 유우열전>)

이 두 건의 반란은 동한말기의 내전형세에 모두 심원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한나라말기의 여러 군웅들 손견, 동탁, 공손찬, 유우, 원소, 조조, 유비 및 도겸등은 직접 황건적의 난으로 전장에 나선 외에, 그들 인생의 가장 긴요한 시기는 거의 모두 이 두 건의 소란과 무시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

특히 동탁과 조조의 두 사람은 굴기와 칭웅천하의 근원이 모두 이 두 건의 소란으로 소급된다.

시간적으로 보면, 황중의종과 어양이장의 반란은 장각이 이끈 황건적의 난과 전후를 잇는 릴레이 관계에 있다. 공간적으로 보면, 관농과 하북의 두 지구는 바로 이후 한말내전의 주전장이 된다. 전쟁의 유린과 피해를 가장 크게 받는 두 지역인 것이다.

그외에,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후인 중평5년(188년), 새로운 황건운동이 죽은 재에 다시 불이 붙는 것처럼 권토중래한다. 북으로는 산서 곽태, 중으로는 하남 여남, 서로는 사천, 동으로는 청주,서주에서 일시에 황건적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서로 호응한다. 이들 새로운 '황건적'은 장씨형제가 이끌었던 황건적과 모두 진짜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의 기치를 내건다: 황건.

 

모든 이런 소란은 공동으로 한말내전의 초기 판도를 구성한다.

이때부터, 소란의 국면은 내전으로 전환된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한 것은 동한왕조가 평화시기에서 군사혼란기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군사적 전투가 기본적인 면모가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새 배경하에 일군의 군사전투를 장점으로 하고 원래 변방이나 밑바닥에 속한 인물이 속속 나타나서 강호에 이름을 떨친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다만, 모든 이런 조정의 이름으로 정벌하는 전투는 나중의 내전 즉 군벌간의 지속적이고 잔혹한 상호혼전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그저 서곡이나 도입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내전의 서막은 동탁이 입경한 이후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관동연합군이 '의기'를 높이 들고 집단적으로 동탁을 토벌한 때로부터 개막되는 것이다. 현재는 과도단계이다. 동한왕조의 마지막 평정과 질서시기이다.

 

장씨의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 다음 해, 간의대부 유도는 상소를 올려 환관에게 화의 근원이 있다고 통박한다. 환관은 참언으로 반격한다. 그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지금은 사방이 안정되어 있다". 비록 참언이지만, 어느 정도는 실제상황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이런 안정은 태풍이 몰아치기 이전의 안정이다.

 

황건적의 난으로 봉화가 천지에서 오르고, 천하가 대란에 빠진다. 그리고 더욱 강력한 폭풍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면 이때 동한조정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한 글자로 설명하자면 "공(空)"이다. 두 글자로 개괄하자면, "황량(荒凉)"이다.

"전야공(田野空), 조정공(朝廷空), 창고공(倉庫空), 이것이 삼공(三空)이다"(<후한서.진번열전>)

 

진번이 당시에 말한 '조정공'은 양기(梁冀)와 관련이 있다.

연희2년(159년), 양기가 타도된다. 관련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일시에 '조정은 텅 비게 된다"(<후한서.양기열전>)

그러나, 진번의 이 말은 후세의 각도에서 본 것이다. 한 마디로 개괄했다기 보다는 한 마디의 예언이다. 진정으로 '비는' 때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진번이 상소를 올린 후 몇년이 지나지 않아, '당고의 화'가 발생한다. 곧이어 한환제가 붕어하고, 한영제가 즉위한다. 그 후에 "두무,진번의 난'이 일어난다; 곧이어 제2차 '당고의 화'가 발생한다. 환관이 전면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관료선비는 사상유례없는 박해와 탄압을 당한다.

민국시대 학자인 왕동령은 이렇게 말했다: "당고의 화가 일어나자, 무수히 사람을 죽인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일망타진한다. 그중 학식과 절개로 일세에 뛰어난 사람이나, 명망이 삼공에 이르는 사람이 모조리 머리를 나란히 하고 살육당한다. 마치 양이나 돼지를 도살하듯이. 인심은 방황하고, 어찌해야할지를 모르게된다. 그래서 반대의 바람이 일어난다. 숨어서 은닉도회(隱匿韜晦) 몸을 숨겨 해를 피하려고 하게 된다."

이때붜 은닉도회는 선비의 기본적인 선택이 된다.

 

선비는 관료의 근원이다. 물은 근원이 없으면 흐르지 않는다. 선비들이 오지 않으면 조정은 더욱 비게 된다.

진번이 말한 '조정공'은 비단 수도 낙양의 중앙정부의 조정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중앙과 각 지방을 포함한 전체 국가정부시스템을 얘기한다. 사실상 한이후 중앙과 지방관리들 사이의 쌍방향 유동임직은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상황이 되는데, 동한이 특히 심했다. 

이 국가정부계통이 중앙정부이건 지방정부이건 동한말기에는 모두 대규모의 고갈현상이 나타났다.

 

원래, 중국은 자고이래로 '도관(逃官)'현상이 있었다. 최소한 전설이나 기록을 보면 그렇다. 허유(許由)는 최초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도관'은 이미 기풍이 된다. <순자.비십이자>에 나오는 위모(魏牟)와 진중자(陳仲子)는 이 유형의 대표인물들이다. 어떤 사람은 진나라가 통일한 이후이도 '도관'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증거가 충분하거나 분명하지는 않다. 왕망이 나라를 통치할 때,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도관붐'이 일어난다. 소위 '한황실이 멸망하고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자 선비들 중에서 분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관모를 망가뜨리고 서로 손을 잡고 갔는데 그 수가 부지기수였다."(<후한서.일민열전>). 동한이 건립되고 '도관'은 일종의 전통적인 기풍으로 개선되고 발양되었다. "벽거불응(辟擧不應)"나 해인수거(解印綬去)"하는 경우가 사서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당고'이후 '도관'은 더욱 심해져 붐을 이루게 된다.

 

그 결과 민간의 저명한 인사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관직에 있던 중하층인사는 관직을 버리고 떠난다.

예를 들어, 서서, 곽태, 신도반이 있고, 진식, 범염과 조일이 있다. 모두 멀리 숨을 수 있는만큼 멀리 숨었고, 다시 오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건안에서 조위때의 일부 저명인사들을 떠올리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비록 한영제가 붕어하기 전에 이미 약관, 이립의 사람이었지만, 이 기간동안에는 아무런 기록하거나 서술할만한 사적을 남기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더욱 직접적으로 '은거하고 관직에 나가지않았다'고 한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도관붐'은 더 이상 심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다. 원래 관직에 나가지 않았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관직에 있던 사람들도 속속 관직을 버리고 도망쳤다.

황건적의 난의 충격을 받은 사람이 누구일지에 대하여 사람들은 왕왕 보통백성을 생각하겠지만, 기실 가장 먼저 충격을 받은 사람은 관청과 관원이었다. 이는 여러 사료로 증명된다.

"관청이 불에 타고, 마을이 노략질당하고, 관리는 도망간 사람이 많았다."(후한서.황보숭열전)

황건적의 난 이후, 도적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자사, 이천석을 죽이는 자가 많았다.(원굉 <후한기> 중평4년)

요적 장각은 유주,기주에서 거병하였고, 연주, 예주, 형주, 양주에서 동시에 움직였다. 현민 곽가등은 역란을 일으키고, 성과 관청을 불태우고 백성을 괴롭혀서 사람들은 불안했고, 삼군이 위급을 고했다."

 

황건의 난 이전에 관료사회의 사람이 만일 돌연 관직을 그만두려고 하면, 관인을 버리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황건적의 난이후, 도관으로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정은 부득이 조령을 내리게 된다: "이제 서쪽의 강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황건적이 난을 일으켰다. 여러 관청의 관리들은 함부로 떠나서는 안된다."

서쪽의 강족 반란은 바로 황중의종사건을 가리킨다.

즉 관직에 있는 사람은 앞으로 함부로 관직을 버리고 떠나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 명령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그저 실효성이 없는 공문(空文)이었을 것이다. 대동란의 시대에 한 사람이 떠나면 어떻게 찾겠는가?

 

관직에 남아 있다가 피살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만일 이전의 '두,진의 난'과 '당고의 화'를 얘기하자면 그 피해범위는 중앙정부와 경사지구에 집중된다. 황건적의 난의 직접적인 충격대상은 바로 지방정부와 관리이다. 바꾸어 말해서, '당고지화'와 '황건적의 난'은 내외결합의 방식, 상하중합의 방식, 조야공건의 방식으로 동한정부의 관리를 비워버리게 된다.

진번이 말한 '조정공'은 일찌기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기 전에 동한조정에서 이미 관료가 부족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가평5년(176년)에서 광화원년(178년)까지의 연속3년동안 한영제가 3건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같은 일을 한 점이다.

 

희평5년(176년), 태학생중 나이 60이상의 백여명을 시험쳐서 낭중, 태사사인에서 왕가랑, 군국문학리의 관직을 내리다.

희평6년(177년), 장사꾼이면서 선릉효자가 된 사람이 수십명이었는데 모두 태자사인에서 임명했다.

광화원년(178년), 홍도문학생을 설치하기 시작하다.

 

이 세 가지 일은 인사배치와 관련있다. 그 실질은 바로 통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하층과 구석진 곳에 있던 인원을 발탁하여 관직에 임명했다. 모두 알고 있는 조조의 "유지시거(唯才是擧, 재주만 있으면 뽑는다)"는 것의 근원은 바로 한영제의 이러한 조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세가지 사건은 당시이건 후헤이건 모두 격렬한 반대와 공격을 방았고, 한영제의 여러가지 황당한 일중에 대표적인 건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조정공'의 배경하에서 관찰한다면, 모든 것은 이해하기 쉽다. 첫째, 조정에 사람이 없다. 둘째, 한영제는 자신의 사람이 필요했다. 

만일 '황건적의 난'으로 급한 상황하에서 한영제는 황보숭, 주준과 같은 군사인재를 찾아냈다. 당시 조정에서 조정대국을 주재할 정치적 인재를 찾는다면 정말 봉모인각(鳳毛麟角)으로 찾기가 어려웠다.

 

명청교체기의 왕부지(王夫之)는 <속통감론>에서 직접 이렇게 물었다:

"한나라가 망하는데 사직을 지킬 신하가 있었던가?"

그후에 스스로 답을 하여 말한다:

"주준, 노식, 왕윤은 그 일을 맡기에 부족했다. 오직 부섭(傅燮)뿐이다"

그러나, 이 유일한 부섭은 중평4년(187년) 반군(이 반군은 나중에 한수의 진영에 귀속된다)과의 전투중 전사하고 만다.

 

조정이 비었고, 남아있는 것은 환관뿐이었다.

한영제때의 환관은 규모나 세력에서 역사상 최고점에 달하다. '하진의 난'으로 원소 형제가 궁내에서 대거 환관을 도살한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며, 죽은 자는 이천여명에 달한다."(<후한서.하진열전>) 이천여명을 죽였으니 그중에는 억울하게 죽거나 실수로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환관의 수가 많음은 알 수 있다. 사실상, 한영제때 환관은 거의 전통적인 관료집단을 대체하여 궁정정치의 주도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환관의 실질은 어쨌든 후방에서 봉사하는 인력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가 있는 자들은 아니고, 국가의 정무를 관리할 능력도 없다. 비록 그들은 조정을 장악했고 한 때는 '부친, 형제, 자식이 여러 주,군에 다 퍼져 있었지만" 평상시여서 아무런 사건이 없는 때라면 그저 그들이 나쁜 짓을 한번 하고 마는 것이 되겠지만,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그들은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직접 '황건적'과 결탁하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한영제가 물으면 그들은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면서 물러났고, 물러날 때는 동시에 자신이 심어놓은 심복자제들까지 모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하여 조정내에는 '엉망인 자', '나쁜 자'들까지도 없어지게 된다.

 

만일 한영제시기의 조정정부를 규정한다면 대체로 이러하다: 환관이 권력을 잡으니 전통적인 선비는 오질 않는다; 소인이 횡행하니, 정직한 사람이 오질 않는다; 문학지사(文學之士)가 우대받으니(홍도문학), 경학지사(經學之士)가 오질 않는다; 매관매직이 성행하니, 청렴한 사람이 오질 않는다. 오고 싶어도 올 돈이 없다. 게다가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면서 '난세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도망치는 것도 모자란데, 하물며 관직에 나서겠는가?

이렇게 되니 조정이 비지 않을래야 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한영제의 '염정폭풍(廉政暴風)'은 멈추질 않았다.

한영제의 매관매직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많다; 한영제가 염정을 추진한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황건적의 난' 이전에 한영제는 염정활동을 진행한 바 있다. '황건적의 난' 이후에 한영제는 계속하여 염정활동을 벌였다.

탐관오리가 성행했는데, 가종(賈琮), 조조와 같은 관료사회의 강경파를 만나면 그저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니 관료사회의 사람은 더욱 적어진다. 

 

여기에 '삼호법(三互法)'이라는 관료사회의 회피규정이 있다. '유주, 기주 두 주는 빈 자리가 오랫동안 채워지지 않았다" 채옹은 일찌기 상소를 올려 지적한 바 있다. "유주, 기주의 옛땅은 빈 관직이 오래 되었다. 그러나 삼부선거는 한달이 지나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한영제는 이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설상가상이었다.

조정이 황량하고 공동의 경지에 이르르자, 조정의 이미지와 명망도 사라지게 된다. <삼국지>에는 이럼런 말이 나온다: "한나라말기의 왕공은 모두 왕복을 입으면서 폭건(幅巾)을 하는 것을 우아하다고 여겼다. 원소, [최표], [최균]과 같은 자들은 모두 장수이면서 겸건(縑巾)을 했다"

폭건은 평민의 복장이다. 왕복은 관직의 상징이다. "왕복을 입으면서 폭건을 하는 것을 우아하다고 여겼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유행같지만 실제로는 일종의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동한의 관료사회에 있어는 이는 고별의 계절이다.

이때 여전히 관료사회에 있던 인사들의 마음은 이미 조정의 정무에서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제,영제의 때 심한 자는 공경대부, 주목군수는 정무를 행하지는 않고 손님접대를 일로 삼았다."

이는 매 왕조말기마다 유공전사(由公轉私)하는 것은 필연적이면서 통상적인 현상이다.

이 모든 것은 동한정권이 기능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의 우두머리 상산 사람 장연(張燕)은 무리가 백만에 이르고, 흑산적(黑山賊)이라 불렀다. 하북의 여러 군현은 모두 해를 입었고, 조정에서 토벌할 수 없었다(<후한서.황보숭주준열전>)

조정은 날로 비어가는데, 소란을 부리는 무리가 '백만에 이르렀다', '토벌할 수 없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결말이다.

이것은 단지 시작이었다. 조금 지나니, 한중의 장로(張魯)에 대하여 사서에서는 마찬가지로 '조정에서 토벌할 수 없었다(朝廷不能討)'는 다섯 글자를 썼다.

동한왕조는 기본적으로 빈껍대기만 남았다.

 

설명이 필요한 것은 동한의 중앙정부(조정)이 날로 말라갔으며, 동한의 지방세력은 '황건적의 난'의 충격,파괴를 거친 후, 일종의 새로운 상황이 나타났다. 일부 지방의 호족과 명사들은 지방의 응집력의 중심이 된다. 이와 동시에, 동한말의 정국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자사(刺史)를 주목(州牧)으로 바꾼 것인데, 한영제의 재위말년에 발생했다. 이는 한영제와 동한 중앙정부 및 지방간의 권력쟁탈의 마지막 시험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형세가 급전직하하여 거꾸로, 더욱 치명적으로 동한왕조의 조정을 텅 비고 붕괴하게 만들었다.

이는 바로 동한조정이 봉화가 온천지에 가득 피어오르는 '황건시대'의 처지이다. 이것이 바로 고인이 형용한 '분거후삭(奔車朽索)'이 아닌가?

이때 그 손에 '후삭'을 쥔 사람 한영제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