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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113

임두두(林豆豆)는 부친 임표(林彪)의 9.13사건 진상을 말하지 못하도록 강요받았다. 글: 왕우군(王友群) 1971년 9월 13일, 중공당장에 "모택동의 친밀한 전우이며 후계자"라고 명시되었던 임표가 그의 처 섭군(葉群), 아들 임입과(林立果)와 트라이던트비행기를 타고 하북 산해관공항(山海關機場)에서 이륙하여 몽골의 원두르칸(溫都爾汗)에서 추락했고, 비행기에 타고 있던 9명은 모두 사망한다. 이것이 바로 당시 세계를 뒤흔들었던 "9.13사건"이다. 임표는 중국의 십대원수중 한 명이다. 1949년 중공이 권력을 장악한 후, 임표는 국무원 부총리, 중공중앙부주석, 국방부장, 중앙군위제1부주석등의 직위를 맡았다. 문혁때, 중공독재자 모택동(毛澤東)에 바로 다음가는 2인자에 올랐다. 임표의 사후 중공은 그를 "반당반국(叛黨叛國)"의 야심가, 음모가, 매국노, 모택동의 암살을 기도한 원흉으로 규정.. 2021. 12. 22.
1960년의 대상해(大上海): 기아(棄兒)가 넘쳐나던... 글: 세상연구소(世相硏究所) 1960년을 전후하여 진소영(陳素英)은 무석시복리원(無錫市福利院)의 직원이었다.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마치 하룻밤만에 복리원이 아이들로 넘쳐나게 된 것같았다. "복리원의 주위에는 매일 버려진 영아(嬰兒)들이 있었고, 파출소와 가도주민위원회에서도 계속 주운 아이들을 보내왔다...." 2005년 12월, 산동심친단(山東尋親團)이 무석에서 심친회(尋親會, 부모찾기모임)를 열었는데, 77세의 진소영노인은 반세기전의 그 일막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이 일어난 것은 무석만이 아니었다. 신속히 늘어나는 기아는 장쑤,저장일대의 여러 도시의 복리원들에 인구팽창의 압력을 가했다. 이런 흐름은 결국 상해까지 번져간다. 상해의 복리원도 곧 아이들이 꽉 차버린다. 기아는 상해의 길거리에서 계속 발견되.. 2021. 12. 21.
장유유(張維維): 나의 부친 장춘교(張春橋) 문: 너는 장춘교의 큰 딸이다. 부친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답: 나는 1947년 1월 6일생이다. 금년 허세로 칠십이다. 나는 집안에서 첫째이고, 큰여동생은 나와 2살도 차이나지 않는다. 막내여동생은 5살 차이가 난다. 남동생은 막내여동생과 다시 5살차이가 난다. 나의 부친은 개인적 야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모주석의 비서라고 생각했고, 모주석의 말을 들었고, 모주석을 위해 일했다. 그뿐이다. 그래서 만일 화국봉(華國鋒)이 그를 기용했으면 그는 계속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쓰지 않으니, 그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당연히 그는 모주석을 숭배하는 것처럼 화국봉을 숭배하지는 않았다. 그는 화국봉에게 의견을 냈고, 화국봉은 아마도 그게 기분좋지 않았을 것이다. 무대랑이 점.. 2021. 12. 11.
중국공산당 1대성립의 진상 글: 장우진(張又晋) 2009년 필자는 귀국하여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상하이를 거쳐가게 되었고, 며칠간 머물렀다. 그동안 친구들과 함께 중공1대구지(舊址)로 갔다. 거기는 지금 역사박물관이다. 필자가 1대박물관을 참관할 때 두 가지 소소한 사건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나는 13개의 실제사람과 같은 크기의 조각상이다. 당시 회의를 개최한 장소에는 당시의 탁자가 하나 놓여 있고, 13명의 1대대표들이 탁자를 둘러싸고 회의를 열고 있었다. 회의 의장의 위치에는 모택동이 서 있다. 기우가 헌앙하고 신채가 혁혁하며 정신이 환발하며 오른손을 들어 휘두르며 중국인민의 나아갈 길을 가르키고 있다. 동필무, 이달등은 양측에 앉아 있으면서 존경하는 눈빛으로 위대한 영수 모택동을 올려다 보고 있다. 장국도, .. 2021. 12. 2.
임표(林彪)의 "괴병(怪病)": 임표 운전기사의 회고... 글: 초성서(楚成瑞) 조적(祖籍)은 산동 액현(掖縣)이고 일찌기 관동으로 가서 요녕성 대련에 거주한다. 1945년 영구(營口)에서 동북인민자치군에 참여하고, 입대한지 3년만에 제4야전군의 총사령관 임표의 운전기사가 된다. 임표는 그의 차를 타고, 관외에서 관내로 들어오고, 다시 북평에서 개봉으로 남하하고, 그후에 한구로 진입한다. 1950년초, 꽃을 들고 환영하는 가운데 그와 임표의 '승용차'는 북경으로 돌아온다. 매년 이어지는 전투로 임표는 피로에 지쳐 쓰러졌다. 임표를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그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었다. 기실 이 병은 일찌감치 평형관전투전에 이미 앓았다. 그때 적군은 강하고 아군은 약했다. 그래도 전투에서 이겨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적을 1만명 죽이면서 아군 8천을 잃.. 2021. 11. 25.
6.4 천안문사태때 진압명령을 내린 핵심인물은......? 글: 일진천설(一眞濺雪) 1986년말, 베이징, 상하이, 허페이...등지의 대학생들은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탐관오리의 부패를 처벌하고, 정치체제개혁을 진행하고, 민주, 자유를 실현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당과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등소평과 그 주위의 완고한 원로들은 등소평의 추종자들인 리펑, 천시통같은 자들과 함께 학생들의 행위는 국외반중세력의 책동에 의한 반당, 반사회주의적인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당시 당중앙주석을 맡고 있던 후야오방등 당내의 개혁파들은 학생들의 행위를 애국행위로 보았다. 그들의 많은 요구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을 정확하게 인도하고, 설명하고 소통하여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으며, 학생들에 대한 무력진압에 반대했다.. 2021. 10. 27.
왕홍문(王洪文): 모택동이 세번째로 정한 후계자 글: 왕우군(王友群) 모택동이 정한 첫번째 후계자는 유소기(劉少奇, 류샤오치)이다. 1969년 11월 12일 모택동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죽는다. 두번째 후계자인 임표(林彪, 린뱌오)는 모택동으로부터 연이언 타격을 받은 후 1971년 9월 13일 몽골 원두르칸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한다. 그 후, 모택동은 나이가 젊고, 학문이 낮고, 입장이 굳건한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가지 고려 끝에 1973년 모택동은 그의 세번쨰 후계자로 왕홍문(王洪文, 왕홍원)을 고른다. 왕홍문 체포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한다. 1976년 10월 6일 저녁, 모택동이 생전에 지정한 네번째 후계자인 중공중앙 제1부주석 화국봉(華國鋒, 화궈펑)은 중공원수 섭검영(葉劍英, 예젠잉), 중앙판공실주임 왕동흥.. 2021. 6. 22.
진독수(陳獨秀): 중공 제1대 총서기의 최후 글: 왕우군(王友群) 금년은 중국건당100주년이다. 100년동안, 중공은 전후로 12명의 총서기(당수)가 있었다. 제1대 총서기는 진독수이다. 재직기간은 1921년 7월부터 1927년 8월까지이다. 그후 진독수는 면직당하고, 당적을 박탈당했으며, '일본스파이'로 몰렸고, 여러 '막수유(莫須有)'의 죄명을 뒤집어 쓴다. 진독수는 자가 중보(仲甫), 호는 실암(實庵)이며, 안휘 회녕 사람이다. 청나라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秀才)이다. 5번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거나 피난을 했다. 북경대학 교수, 북경대학 문과대학장을 지냈고, 5.4운동의 지도자중 한 명이다. 1920년 4월 소련공산당(볼세비키) 극동국 블라디보스톡분국 외국처는 그레고리 보이틴스키(중국명 吳廷康)를 중국으로 파견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전.. 2021. 4. 20.
모택동은 준의회의(遵義會議)에서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확립했는가? 글: 원빈(袁斌)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의 전당 및 전군의 최고지도자지위를 확립했다는 것이 중공의 일관된 설명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학자들은 장정역사연구를 통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현존하는 자료와 학자 허팡(何方)등의 연구에 따르면, 준의회의는 중공이 장정으로 도망하는 도중에 귀주 준의에서 거행한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이다. 주로 박고, 주른애, 이덕이 장정에서 통솔하던 군사노선의 잘못을 반성한 것이다. 그때 중앙홍군의 장정을 통솔한 사람은 소위 "삼인단"(총서기 박고, 정치국상위 주은래 및 코민테른 대표 이덕)이다. 회의에서 박고는 5차에 걸친 포위소탕에 대한 총괄보고를 했고, 주은래는 부보고(副報告)를 했다. 정치국상위 장문천(張聞天)은 '반보고(反報告)'를 하여, 삼인단의 군사노선의 .. 2021. 4. 7.
"4.8공난(空難)": 제4대 중공 총서기 진방헌(秦邦憲)의 최후 글: 왕우군(王友群) 1946년 4월 8일, 제4대 중국공산당수를 지낸 당시 중공주중경대표 진방헌, 중공 주중경대표 왕약비(王若飛), 전 신사군 군장 섭정(葉挺), 섭정의 처 이수문(李秀文), 딸 섭양미(葉揚眉), 아들 섭아구(葉阿九)등은 미군관찰조의 C-46수송기를 타고 연안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비행기는 안개가 너무 짙어 길을 잃고, 산서성 흥현 흑다산(黑茶山)에 부딛쳐 불이 붙고 폭발했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17명은 모두 사망한다. 역사에서 "4.8공난(空難)"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가장 젊은 중공당수 진방헌은 강소 무석 사람이다. 일찌기 소주공업전문학교에서 공부했다. 1925년 상해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5.30운동에 참가한 바 있다. 같은 해 연말에 중공에 가입한다. 1926년 10월,.. 2021.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