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연문사(浩然文史)
장사는 중국남방의 저명한 천년고성(千年古城)이고 일찌기 춘추전국시대부터 지방의 중요도시였으며 "굴가지향(屈賈之鄕)", "초한명성(楚漢名城)"이라는 아름다운 칭호가 붙어 있다. 그러나 만일 외지의 사람이 장사를 여행가게 되면, 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비록 최근 들어 마왕퇴한묘(馬王堆漢墓)같은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다른 역사적인 도시들과 비교해보면, 장사에 유명한 명승고적은 확실히 적은 편이다. 오래된 도시 장사의 역사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은 1938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1938년 11월 13일 새벽, 장사성, 백성들은 전쟁이 곧 닥칠 것이라는 그림자속에서 불안하게 잠들었다. 새벽2시경 시내에 돌연 불꽃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흉맹한 불길이 치솟았다. 장사성은 졸지에 불바다가 된다. 불길이 사방에서 치솟으면서, 백성들의 비명소리, 도망치는 모습, 그리고 도망치면서 급박하게 몰아쉬는 숨, 하늘까지 치솟는 불길로 온 도시는 혈홍색으로 바뀐다. 마치 인간지옥같았다. 이번 큰 화재는 3일간 지속되고, 장사성은 거의 재로 화한다. 이것이 바로 항전시기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만든 장사대화재사건이다. 대하재가 12일경에 발생했고, 12일은 전문코드에서 "문일(文日)"이라고 칭하고, 불이 밤에 일어났으므로 장사대화재를 "문석대화(文夕大火)"라고 불렀다. 이번 대화재는 무수한 생명을 집어삼켰고, 장사성의 무수한 문화재를 집어삼켰다. 그러나 대화재의 진상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1. 초토항전(焦土抗戰)
1937년 노구교사변(盧溝橋事變)이후, 일본군은 전면적으로 중국침략전쟁을 시작한다. 그후 1년여동안, 중일쌍방간에는 송호회전(淞滬會戰), 서주회전(徐州會戰), 태원회전(太原會戰) 및 무한회전(武漢會戰)등 대규모전투가 벌어졌다. 1938년 10월, 무한, 광주(廣州)가 함락된 후, 항일전쟁은 대치단계로 접어든다. 무한을 점령한 후, 일본군은 호남북부의 중요도시 악양(岳陽)을 점령했다. 악양의 남쪽은 바로 호남성의 성회도시인 장사이다. 자연스럽게 장사가 일본군의 다음 공격목표가 된다.
일본군이 다가오면서, 국민당내부에서는 "초토항전"정책을 확립한다. "초토항전"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계계(桂係)의 이종인(李宗仁)이 제안했다. 그는 1933년 <초토항전론>이라는 논문을 초안한다. 거기에서 이종인은 "초토항전"의 두 가지 핵심관점을 제기한다. 첫째는 전민족에게 일체의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분전하어 저항하여 일본군과 죽기살기로 싸우도록 격려한다. 설사 국가가 초토화되더라도. 둘째, 항전의 방식은 유격전, 지구전과 견벽청야(堅壁淸野)여야 한다. 그후 화북사건(華北事件)이 발발하면서, 이종인을 대표로 하는 '초토항전'정책이 형성되고, 국내외인사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게 된다.
1937년 전면전이 발발한 후, 이미 공산당과 제2차국공합작을 하기로 결정한 장개석은 점차 계계의 "초토항전"방침을 받아들이게 된다. 1938년 중경국민정부는 장개석의 명의로 <고전국국민서(告全國國民書)>를 반포한다. 이 문건에서 중국국민당안 이렇게 말한다: "소위 일관된 방침은 하나가 지구항전이고, 둘이 전면항쟁이며 삼이 주도권쟁취이다. 이상의 세 가지는 실로 우리가 적을 이기고 승리를 거두는 필수요소이다" 이는 계계의 이종인등이 제출한 '초토항전'사상과 일맥상통한다.
국민당이 받든 '초토항전'정책은 적극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확실히 국민당이 항전초기에 일본군의 침략에 굳세게 맞서는 결심을 나타냈고, 지구전, 유격전과 견벽청야를 전개하는 등의 항전방식은 모택동주석이 제기한 '지구전'과 '불모이합(不謀而合)'했다. 이건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다만, '초토정책'에는 폐단도 있었다. '국토를 초토로 만드는'것의 필요성과 기준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어떻게 견벽청야하여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인심을 고무시키는 정치선전하에, 이런 행위는 손쉽게 고정된 기준과 조치가 없이 권력자의 의사결정실수의 희생양이 되기 쉽고, 여러가지 조치가 부당함으로 인하여 '적 1천을 죽이기 위해 아군 8백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장사대화재사건은 바로 국민당정부가 '초토항전'정책을 잘못 실행한 결과이다.
악양이 점령당하고, 장사가 위기일발인 상황하에서 1938년 11월 7일, 장개석은 장사에서 군정회의를 개최한다. 장개석은 호남성주석 장치중(張治中)에게 '초토항전'을 집행하도록 요구한다.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 장사가 적의 손에 넘어가고 적이 이용하게 되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다. 장개석이 명확하게 장사를 불태워버리는 계획을 얘기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장사경비사령관이던 풍제(鄷悌)는 회의후에 경비사령부 참모처장 허권(許權)에게 이렇게 말한다: "장개석이 일본군이 신장하(新墻河)를 넘어 장사를 공격해와서 장사를 버려야할 때, 장사를 불태워버리라고 지시했다" 다만 장치중은 사후에 회의에서는 단지 무한을 지켜내지 못한 원인을 검토했고 '초토정책'을 견지할 것을 결정했지, 명확하게 장사를 불태우는 것은 얘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장사를 불태우라고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두개의 완전히 상반된 증언이 존재하지만 진상은 오직 하나일 것이다. 장개석이 장사를 불태워버리라고 명확히 지시했는지 아닌지에 불구하고, 회의후 장사를 불태워버리는 계획은 기본적으로 확정된다. 그러니, 장개석이 몰랐을 리는 없다.
2. 장사지상(長沙之殤)
장사를 불태우는 계획이 제기된 후, 그달의 11일, 12일 이틀동안 장치중은 풍제등은 장사성을 불태우는 계획을 제정한다. 계획은 개략 1개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5인1조로 각각 장사성의 각 지역에 위치하면서 방화하는 임무를 집행하는 것이다. 그외에 오토바이를 배치하여 돌면서 휘발유를 가지고 계속 불이 번지도록 도운다. 다만 방화이전에 방공경보를 울려, 백성들이 도시에서 빠져나가 화재를 피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장치중은 이렇게 말한다. 11월 12일 오전, "문시참전(文侍參戰)"을 수령한다: "한일소시도(限一小時到). 장사장주석(長沙張主席). 밀(密). 장사여실함(長沙如失陷), 무필전성분훼(務必全城焚毁). 망사전타밀준비(望事前妥密準備). 물오(勿誤)! 중정문시참(中正文侍參)" 풍제의 <분여일기(焚余日記)>기재에 따르면, 장치중은 밀전을 받은 그날 오후, 그와 호남성 보안처장 서권을 불러 회의를 연다. 긜고 이번 방화총지휘를 장사경비사령부 경비제2단 단장 서곤(徐昆)으로 결정하고, 그리고 그는 방화명령은 반드시 장치중이 명령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서 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장치중은 풍제등에게 "내일 반드시 강요에 근거하여 세칙을 준비해오면, 확정하겠다"고 했다. 이는 12일 저녁에는 장사성을 불태울 계획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13일 새벽 2시경, 원래 이 시간에 발생하지 않아야할 대화재가 사전에 발생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풍제의 일기 속에 기록된 내용이다.
장치중등의 계획에 다르면, 방화전에 먼저 군중을 소개시켜야 했다. 다만 돌연한 대화재로 장치중등도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더더구나 잠들어 있던 장사의 백성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시의 장사성의 건물은 대부분 나무구조여서, 큰 불이 일단 세를 불리자, 휘발유등 가연성물질의 도움으로 금방 만연해진다. 장사성을 불태우는 계획을 실시하기 위하여 모든 경찰과 소방대는 장사성을 떠났고, 소방차안의 물조차도 휘발유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사태를 깨달은 장사성의 백성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녔고, 운이 좋은 사람은 불길 속에서 살길을 찾았지만, 운이 나쁜 사람들은 불 속에 타죽는다. 어떤 백성은 물항아리 속에 들어갔다가 흉맹한 불길에 삶겨져 버리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방공동으로 도망쳐 들어갔다가 불에 타죽는다. 처연한 비명소리가 불길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게 장사성을 인간지옥으로 만들었다. 장사시장 석초림(席楚霖)은 이렇게 회고한다: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시민들은 꿈에서 깨어났고, 엄청난 불길앞에서 하늘로 올라갈 수도 없고, 땅으로 꺼질 수도 없었다. 노인과 아이 그리고 부녀자들의 곡성고 고함소리와 건물이 불타면서 나오는 폭발음이 한무더기로 엉켜서, 극단적으로 비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더욱 가슴아픈 점은 당시 전선에서 후송된 부상병들은 대다수가 움직일 수 없어서 대화재 속에 그대로 불에 타죽게 된 것이다. 십여명의 부상병은 우물에 뛰어들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담장이 무너지면서 우물을 막아버렸고, 우물은 그들의 집단 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화재가 발생했을 떄, 주은래, 곽말약등도 장사성내에 있었다. 나중에 곽말약은 <홍파곡(洪波曲)>에 장사대화재이후의 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연도의 광경은 정말 참혹했다. 도로에는 피난가는 사람으로 가득했고, 자녀를 데리고 상자를 들고, 곡을 하는 사람, 고함치는 사람, 욕을 하는 사람, 노인을 업은 사람, 부상을 입은 사람, 임신한 사람, 사병, 난민들이 어지럽게 한 무더가 되어있고, 나팔은 계속 울렸고, 차량은 계속 부딛쳤으며, 낭패한 모습은 정말 뭐라고 형용할 방법이 없었다."
이번 대화재는 개략 3일간 지속된 후 스스로 꺼졌다. 나중의 통계에 따르면, 이번 대화재로 장사성의 90%이상의 건물이 불에 탔고, 개략 3만명이 불길 속에 목숨을 잃었다. 수천년의 역사문화를 지닌 장사상은 며칠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장사성은 스탈린그라드,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함께 제2차세계대전중 가장 심하게 훼손된 4대도시중 하나가 되었다. 장사대화재와 화원구결제(花圓口决堤, 황하의 제방을 파괴한 사건), 중경방공동참안은 항일전쟁시기의 3대참안으로 불린다.
3 잔국수습(殘局收拾)
장사대화재사건은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사후에 대화재발생의 원인을 조사했으나, 더욱 수수께끼가 된다. 어떤 사람은 사전에 전보원이 장사로 전보를 보낼 때, "일본군이 이미 신장하(新墻河)에 도착했다"는 것을 "일본군이 이미 신하(新河)에 도착했다"로 보냈다는 것이다. 신하는 장사성에서 12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고, 그 소식을 들은 사병들은 공황에 빠져 도시를 불태워버리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장사성의 남문밖에 있는 부상병병원에서 불이 났는데, 병사들은 이를 신호로 잘못 받아들여 도시에 방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국민당이 고의로 벌인 일이라고 말한다. 오늘날까지도 사료의 한계로, 장사대화재가 왜 돌연 발생했는지는 시종 수수께끼로 쌓여 있다.
장사대화재가 장사에 치명적인 피해를 조성한다. 국내외의 인사들로부터 모두 질책을 받고 창끝은 장개석을 향한다. 여론은 장사를 지킬 수 없다고 불태워버리다니, 심지어 대학, 병원같은 기관까지 남기지 않았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국민당내부에서도 왕정위(汪精衛)등은 장개석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여론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장사대화재 이틀후에 장개석은 장사경비사령관 풍제, 서곤 과 문중부(文重孚)등을 총살해버린다. 다만 사실상, 장사대화재가 이들의 잘못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풍제등 3명은 희생양으로 보인다. 그외에 장개석은 장치중의 관직을 면직당하고, 중앙정부에서 구휼금을 보내어 이재민들을 도운다. 이를 통해 어느 정도 민심을 다독인다.
장치중은 면직된 후, 장개석은 설악(薛岳)을 호남성 주석으로 보낸다. 설악의 지휘하에, 중일쌍방간에는 저명한 장사회전이 벌어진다. 3차례에 걸친 장사회전에서 모두 일본군을 물리친다. 이는 일본군의 기세를 크게 꺽은 전투이고,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를 크게 제고시켰다. 동시에, 3차례의 장사회전의 승리는 1938년 장개석이 집행한 '초토항전'의 부분적인 착오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설악의 지휘하에 장사성은 폐허 위에서 다시 재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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