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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113

모택동(毛澤東)과 유소기(劉少奇)가 내부투쟁을 벌인 진정한 원인은...? 글: 무덕산(武德山)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공개한 글에서 모택동과 유소기간의 갈등에 관하여 대부분 "사청(四淸)"운동때의 "심각한 의견차이"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이데올로기 층면에서 고도로 일치했고, 모택동이 유소기를 비판한 관점과 방법은 기실 모두 모택동의 인가를 받아 대거 제창한 것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택동이 유소기와 "중대한 이론상의 의견차이"때문이 아니라, 유소기에 대한 불만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택동은 유소기에 대한불만때문에 "중대한 이론상의 의견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간의 갈등은 더욱 실질적인 원인이 있다.... 모택동 71세생일때의 식사자리 12월 26일, 모택동의 71세 생일이었다. 그날 저녁 모택동은 인민대회당 노북경청(老北京廳)에서 일부 사람들을 불러 .. 2023. 10. 17.
주은래(周恩來)의 여비서 양강(楊剛)은 왜 자살했을까? 글: 왕우군(王友群) 1957년 10월 7일 새벽, 양강은 그녀의 북경 매사후통(煤渣胡同)의 숙사 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녀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죽었으며, 나이는 겨우 52세였다. 이때 양강은 부총편집이었다. 이전에 그녀는 당시 국무원 총리인 주은래의 판공실주임비서였으며 주은래의 국제사무와 대외선전업무를 처리하는 조수중 한명이었다. 양간은 왜 자살했을까? 1. 인병설(因病說) 그녀의 미국인 친구인 존 킹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 費正淸)의 견해이다. 1955년, 그녀는 불행히도 교통사고를 당했고, 심각한 뇌진탕을 일으켰다. 치료를 받은 후에도 후유증이 남아서, 자주 두통으로 힘들어 하며 정상적으로 업무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부득이 병가를 청했고, 광동의 종화(從化), .. 2023. 10. 4.
"팔로군(八路軍)" 명칭에 관한 몇 가지 문제 글: 맹검홍(孟儉紅) 항전초기 홍군(紅軍)을 팔로군(八路軍)으로 개편하는 과정에 대하여는 여러 글과 책에서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다만, 여전히 약간의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예를 들어, 팔로군 번호의 유래라든지, 산하의 3개사(師)의 번호는 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지등등. 그리고 개편된지 1달도 되지 않아 왜 팔로군은 다시 제십팔집단군(第十八集團軍)으로 명칭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중공은 왜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고집했는지. 국민당과 공산당간에 팔로군 번호를 둘러싸고 어떤 다툼과 알력이 있었는지. 중공은 또 어떤 상황하에서는 "제18집단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지. 이런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이 시기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팔로군"은 원래 '월군(粤軍)'의 번호였.. 2023. 7. 7.
곽말약(郭沫若)과 문혁(文革) 글: 조대부화실(趙大夫話室) 57년전의 문혁은 수도 없이 많은 이슈를 남겼다. 그러나 중국과 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다수의 글은 그저 그 일부분만 건드리고 있다. 마치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모두 자신만의 문혁이 있다. 이는 자신과 가정이 문혁때 한 역할 및 경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문혁에 대한 평가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중국정계와 문단에서 유명한 인물이 서로 다른 시기와 공간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양극을 달린다니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어려운 점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 사람은 저명한 무산계급문학가, 시인, 극작가, 고고학자, 사상가, 고문자학자, 역사학자, 서예가, 학자이며 저명한 혁.. 2023. 5. 28.
모안영(毛岸英)의 죽음과 팽덕회(彭德懷)의 관계 글: 안창해(顔昌海) 오랫동안 중국당국의 공식 선전내용은 이러했다: 모택동은 "항미원조(한국전쟁)"를 위하여, 자진하여 장남 모안영을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시켰고, 모안영은 한국전쟁에서 희생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진상이 드러나고 있다: 공식 선전내용의 모택동이 자신하여 장남을 한국전쟁에 보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모안영이 인민지원군에 들어간 것은 조직의 안배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과 팽덕회는 관련이 있을까? 사건의 내막은 이러하다: 1950년 10월 3일, 모택동은 김일성으로부터 다급한 도움요청서신을 받는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서 아군의 작전을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0월 5일, 모택동은 한반도에 출병하여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10.. 2023. 5. 25.
주은래(周恩來)와 유소기(劉少奇)의 암중각축(暗中角逐) 글: 고문겸(高文謙) 1966년 8월 5일, 모택동은 에서 이상하리만치 격렬한 어조로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유소기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반동의 부르조아계급입장에 서서, 부르조아계급독재를 실행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거대한 문화대혁명운동을 탄압하고,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혼동하며, 혁명파를 토벌하고, 다른 의견을 억누르며 백색공포를 실행하며 스스로 득의하며 부르조아계급의 위풍을 키우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뜻을 꺽었다. 어찌 그렇게 독하단 말인가?" 모택동은 글에서 1962년 조정시기의 소위 '우경'문제를 연결시켜, 기세등등하게 유소기와 최종대결을 벌이겠다는 자세를 취한다. 모택동의 이 글은 그후 전체회의에 인쇄되어 배부되어, 회의참석자들이 유소기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전체회의는 바로 .. 2023.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