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우군(王友群)
1954년 8월 17일, 당시 중공정치국상위, 중앙정부부주석, 중앙군사위부주석, 국가계획위원회주석 고강(高崗)이 대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다. 향년 49세이다. 고강은 중공건정후 부국급(副國級) 고관으로 자살한 최초의 인물이 된다.
고강은 왜 자살했는가?
왜냐하면 그는 억울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중공에 큰 공을 세웠다: 드는 중공 섬북(陝北)근거지의 창업자중 한명이고, 모택동등이 강서에서 '장정'을 시작하고, 최종적으로 섬북에서 근거지를 마련하게 된다; 국공내전기간동안 그는 동북으로 파견되어 동북을 전국에서 가장 먼저 '해방'되고, 가장 '선진'된 지역으로 만들었다' 1950년, 모택동이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그가 이끄는 동북은 가장 중요한 군수기지가 된다; 1952년 그는 명을 받아 북경으로 와서 주은래가 이끄는 정무원과 동급인 국가계획위원회 주석이 된다. 업무실적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모택동은 한때 전국에 전보를 보내 고강을 배우자고 호소한 바 있다.
순식간에, 그는 "고강,요수석반당연맹" "당분열, 당과국가최고권력찬탈을 음모한" 야심가, "자산계급의 중공당내의 대리인"으로 몰린다. 고강은 너무 억울하다고 여겼다.
고강이 반당했는가?
중공은 고강이 반당했다고 말했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전후로 2건의 결의를 통과시킨다: 하나는 1954년 2월 제7기 4중전회에서 통과시킨 <당의 단결을 증강시키는데 관한 결의>이고, 다른 하나는 1955년 3월 중공전국대표대회에서 통과시킨 <고강요수석반당연맹에 관한 결의>이다.
중공이 고강을 비판하는 것은 주로 다음의 5가지이다:
첫째, 고강은 여러 번 유소기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유소기는 당시 모택동 바로 다음가는 중공의 제2인자였다. 고강은 솔직하게 이 점을 인정하고, 다만 주로 업무방면에서 이견을 제시했다. 이것은 반당이라 할 수 없다.
이 점은 모택동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고강의 비서 조가량(趙家梁)이 <반으로 잘린 묘비의 지난 이야기 - 베이징의 고강>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만한다. 고강이 베이징에 도착한 후, 거의 매일 모택동과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고강은 반성을 하면서, 모택동이 그에게 너무 많은 '사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베이징에 들어온 후, 유소기는 무슨 일을 하지 않아서 모택동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소기는 과거에 그저 백구(白區)에서 일했고, 근거지를 건설한 경험이 없다; 유소기는 군대를 지휘한 바 없어서, 군대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아서 국면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다; 유소기는 모택동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많은 일들을 모택동이 알지 못하게 하며, 자기 마음대로 당중앙의 명의로 강화, 문건을 낸다; 유소기의 사상은 여전히 신민주주의단계에 머물러 있고, 사회주의의 사상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를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어주어야 하며 필요한 경우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할 것이다.
모택동은 심지어 고강에게 동북의 적국자료를 조사해볼 것을 비밀리에 지시하기도 했다. 유소기가 1929년 심양에서 체포된 후 변절했는지 아닌지. 이 건에 관하여, 고강의 옛부하 장수산(張秀山)이 그의 회고록 <나의 팔십오년 - 서북에서 동북까지>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1980년 3월 19일, 등소평이 호요방과 얘기를 나눌 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고강이 감히 그렇게 나와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르신(모택동을 가리킴)에게도 책임이 있다." 중공건정초기, 모택동은 유소기, 주은래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고강이 유소기를 비판한 것은 완전히 잘못된 비판이 아니라, 맞는 비판도 있다."
둘째, 1953년 중앙재경회의에서 "비박사류(批薄射劉)"한다.(박일파를 비판함으로써 유소기를 겨냥한다)
박일파(薄一波, 보이보)는 유소기의 옛부하이다. 당시 재정부장을 맡고 있었다.
고강의 부인 이력군(李力群)의 회고에 따르면, 중앙재경회의가 시작되었을 때, 고강은 참가하지 않는다. 그는 중앙재경업무는 책임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는 제1차5개년계획을 수립하는데 바빴다. 나중에 모택동이 고강이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알고, 고강을 참가하라고 하고, 회의에서 발언하게 한다. 고강은 비서 조가량, 마홍(馬洪), 매행(梅行)으로 하여금 발언원고를 작성하게 하고, 모택동에게 보내어 검토를 요청한다. 모택동이 발언원고를 수정해준 후, 그 내용을 고강이 회의에서 발언한다.
고강의 비서 조가량에 따르면, 고강은 이 원고를 모택동, 주은래에게 보냈고, 모택동, 주은래도 모두 동의한다. 모택동은 "개인주의" 앞에 "자산계급"을 네 글자를 추가하라고 말하여, 원고의 내용보다 훨씬 강하게 언급하게 된다. 고강이 발언한 후, 박일파는 그를 찾아와 의견을 교환한다. 너무 과하게 나갔으며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고강은 모택동이 검토한 발언원고를 박일파에게 보여주었고, 박일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이 일을 반당이라고 할 수는 없다.
셋째, 1953년 조직공작회의에서 "비안사류(批安射劉)"한다(안자문을 비판하여 유소기를 겨냥한다)
안자문(安子文)은 유소기의 옛부하이다. 당시 유소기는 중앙조직부를 관장하는 중공 정치국상위였다.
고강은 이번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고강의 부하, 동북국 부서기 장수산이 회의에서 발언한다. 이 발언을 고강, 유수석이 손을 잡고 반당했다는 증거중 하나가 된다.
전 국방대학 교수 임온휘(林蘊暉)의 고증에 따르면, 장수산은 원래 이 회의에서 발언할 생각이 없었다. 먼저 중앙조직부 부부장 안자문이 여러번 그를 찾아왔고, 그후 유소기가 직접 그를 찾아와서 그에게 회의에서 발언해달라고 한다. 장수산은 고강의 의견을 구했고, 고강은 그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았다. 다시 그 이후 모택동이 장수산을 불러서, 그에게 회의에서 발언하라고 한다. 장수산은 발언원고를 준비하여, 모택동에게 보낸다. 모택동은 읽어본 후 장수산에게 말하라고 했고, 장수산은 비로소 회의에서 발언하게 된다.
이건 고강의 문제가 아니다. 요수석의 문제도 아니다. 심지어 장수산의 문제도 아니다. 반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넷째, 안자문이 사적으로 만들어 돌린 중공정치국위원 명단에 "유박무림(有薄無林)"이었다.
고강의 비서 조가량에 따르면, 1953년 4월, 중앙조직부 부부장 안자문이 사적으로 중공8대 정치국위원명단을 만든다. 명단에 박일파는 있었는데, 임표는 없었다.
어느날 정오, 모택동은 그의 기요비서에게 직접 이 명단을 고강에게 보내준다. 고강은 읽고나서 바로 보관한다. 모택동은 중앙의 소규모회의에서 안자문을 엄하게 비판한다. 일개 중앙조직부의 부부장이 어찌 이렇게 큰 권력을 가지고 이런 명단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안자문은 즉석에서 자아비판한다. 모택동은 이 일은 이것으로 끝내고, 외부에는 발설하지 말라고 말한다.
고강은 안자문에게는 그런 담량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마음대로 이런 명단을 만들리가 없고, 분명히 유소기가 그에게 만들라고 했다고 생각한다. 고강은 모택동이 이 일에 대하여 유소기에게 불만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모택동의 지시를 받지 않고, 일부 간부들과 얘기를 나누는 기회에 이 명단문제를 얘기한다.
요수석이 명단을 퍼트린 건에 관하여, 임온휘의 고증에 따르면,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만일 상황이 조가량이 말한 것과 같다뎜, 고강, 요수석이 이 명단을 퍼트린 것은 조직기율위반문제이지 무슨 반당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다섯째, 누가 모주석을 대리하여 중앙공작을 주재하느냐는 문제
1953년 12월, 모택동은 남방으로 휴가를 갈 준비를 한다. 누가 모택동을 대리하여 중앙공작을 주재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여러가지 견해가 있었다.
임온휘 교수의 고증에 따르면, <등소평연보>에 이러헥 기록되어 있다: "1953년 12월 15일 오후, 등소평은 모택동이 주재하는 중공중앙서기처확대회의에 참석한다....회의에서 모택동의 외출기간 중앙서기처회의는 유소기, 주은래, 주덕, 진운, 등소평, 고강, 팽덕회가 참가하여 집단적으로 토론하여 문제를 해결한다고 결정한다." 확실히 이번 회의는 유소기가 대리하여 주재한다고 결정하지 않았고, 이는 상당한 정도로 모택동의 원래 뜻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고강의 비서 조가량의 보충설명에 따르면, 회의전에 모택동은 고강에게 말했다. 그는 남방으로 가서 한동안 휴식할 것이며, 중앙의 공작은 유소기가 주재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윤번제로 주재하는 것이 좋을지, 네가 먼저 몇 사람을 만나 얘기해봐라. 고강은 즉시 진운을 만나 논의했고, 진운는 모택동에게 다른 고려가 있는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망설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윤번제도 괜찮을 것같다.'"
1953년 12월 15일, 모택동은 자신의 거처에서 회의를 소집한다. 그가 베이징에 없을 때, 유소기가 중앙의 일상업무를 주재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윤번제로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생각을 묻는다. 주은래가 먼저 의견을 표시한다. 그래도 유소기가 주재하는 것이 좋겠다. 유소기는 말한다. 그건 타당하지 않다. 내가 보기에 윤번제가 좋을 것같다. 고강이 즉시 말한다: 나는 윤번제에 찬성한다. 등소평과 진운은 유소기가 주재하는 것에 찬성한다. 주덕, 임백거, 요수석등은 윤번제에 찬성한다. 모택동은 의견을 통일시키기 어려운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오늘 결론을 내리지 말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
이상의 사실을 보면, 고강이 당의 회의에서 '윤번제'를 주장한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고강의 '윤번제설'을 가지고 그가 '당과 국가의 최고권력을 찬탈하려는' 증거라고 말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이상을 보면, 고강은 소위 '반당문제'가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다.
고강과 요수석은 반당연맹을 결성했는가?
1955년 3월 31일 모택동은 당의 전국대표회의의 결론에서 특별히 고강, 요수석이 결맹을 맺었는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도대체 이 연맹이 있었느냐고? 혹은 연맹이 아니라 두개의 독립국이 아니냐고. 두 개의 개별행동자가 아니냐고. 우리는 말한다. 고강, 요수석은 하나의 연맹이다."(<모택동문집> 제6권, 인민출판사 1999년판)
모택동은 5가지 이유를 들었다. 임온휘 교수의 고증에 따르면, 모택동이 말한 5가지 이유는 모두 근거가 없고, 성립되지 않는다.
즉, 고강, 요수석반당연맹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모택동은 왜 고강을 제거했는가?
당시 모택동과 유소기는 비록 이념상의 차이가 있었고, 모택동이 유소기에 불만도 있었지만, 모택동은 유소기를 낙마시킬 생각은 없었다. 유소기가 고강과 가장 큰 차이라면, 비판을 받은 후, 계속 나아가지 않고, 한번 또 한번 자아비판하였다는 것이다. 제1차는 중앙재경회의에서 자아비판하고, 제2차는 중앙조직공작회의후에 자아비판하며, 제3차는 제7기4중전회에서 자아비판했다는 것이다.
특히 1953년 12월 17일 등소평, 진운이 모택동에게 밀고한 후, 모택동은 고강에 대한 의심이 가중된다. 고강의 위협이 유소기보다 크다고 느낀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등소평은 이 건을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택동이 1953년말 중앙을 1선, 2선으로 나눈 후, 고강의 활동이 아주 활발했다. 그는 먼저 임표의 지지를 받고, 팽덕회의 지지도 받아낸다. 그리고 마음놓고 일을 벌인다. 그때 6개의 대구(大區)중 그는 4개 대구의 지지를 받아냈다.
등소평은 이렇게 말한다. 서남에서 그는 회유의 방법을 써서, 정식으로 나와 협의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유소기는 성숙되지 못했다. 나와 함께 유소기를 몰아내자. 나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유소기는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위를 고치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1953년, 임표는 병으로 베이징의 서산(西山)에서 휴양하고 있었다. 재경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 일부 대구의 책임자들이 그를 병문안하려 했고, 고강이 나서서 연락해서 몇개의 대구와 군대 책임자를 데리고 같다. 그리고 일부 지방의 지도자들도 갔다. 모두 2,30명이 간다. 그후, 병문안에 참여했던 왕학수(王鶴壽)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임총(林總, 임표)의 수준은 확실히 아주 높다. 문제를 아주 깊이있고 날카롭게 보고 핵심을 집는다. 현재 유소기라는 백구당의 사람이 중앙의 권력을 통제하고 있으니, 권력찬탈의 위험성과 가능성이 있다. 그는 모주석 주변의 위험한 인물이다." 당시 임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현재 중앙의 지도자중에서 모주석은 나이가 많다. 유소기는 안된다. 단지 고주석(고강)만이 경험이 풍부하고...." (장명원 <나의 회고> 중공당사출판사, 2004년판, 381페이지)
당시, 전국의 6개 대구중에서 동북, 서북, 화중, 화동 4개 대구가 모두 고강을 지지했다. 여기에 동북전장에서 고강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전공이 1위인 임표, 한국전쟁에서 고강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전공이 혁혁한 팽덕회등 군대지휘관들도 모두 고강과 관계가 아주 좋고, 고강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여긴다. 1953년 12월 하순, 모택동은 이해관계를 살펴본 후, 유소기, 등소평, 주은래, 진운과 손을 잡고 고강을 제거하기로 한다.
유소기,등소평,주은래,진운등의 고강에 대한 '무정타격'
모택동이 고강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후, 즉시 항주로 남하한다. 그리고 고강문제를 해결하는 난제를 유소기, 등소평, 주은래, 진운등에게 넘긴다.
1954년 2월 중앙 제7기4중전회가 끝난 후, 즉시 '고강문제좌담회'를 개최한다. 좌담회는 '잔혹투쟁, 무정타격'의 당내투쟁방식을 채용하여, 고강에 대하여 돌연하게 공격한다. 회의분위기는 공포스럽고 긴장된다.
진운이 먼저 발언한다. 고강이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고발한다: 중앙에 부주석을 더 많이 설치하여, 너도 하나 맡고, 나도 하나 맡자. 임표도 하나 맡으면 되겠다. 고강은 즉시 반박한다: 그 말은 네가 나에게 말한 것이 아니냐. 회의를 주재하는 주은래는 즉시 고강에게 더 이상 발언하지 말도록 엄격하게 제지한다.
두번째로 발언한 것은 유아루(劉亞樓)이다. 그는 고강이 동북전쟁때 사적으로 소련사람과 3일 밤낮을 얘기나누면서 정보를 제공했다고 고발한다. 외국과 내통했다는 것이다. 고강은 화를 벌컥내며 말한다: 너는 정말 유언비어를 잘 만들어 낸다. 나는 러시아어도 모른다. 뭘 얘기했단 말이냐. 회의장에서는 웃음소리가 나왔다.
좌담회에서는 오직 사람들이 고강을 고발하는 것만 허용되었고, 고강이 해명하고 반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고강은 '찬당탈권음모' '당분열음모'로 이미 규정되었던 것이다. 고강은 여러가지 건이 모두 그를 모함하는 것이라고 여겨 당중앙에 대질을 요구하고, 증거를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더더구나 유소기가 그를 반당탈권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고강부인 이력군의 말에 따르면, 그날 고강은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감정이 아주 격해져서 계속 말했다: 이건 모함이다. 이건 유언비어다. 그들은 나에게 말도 못하게 막았고, 나에게 반당을 인정하라고 핍박했다. 내가 반당했단 말이냐? 그들이야말로 반당이다, 모주석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핍박해서 죽이려는 것인가. 이들은 너무 비열하다. 나는 그들에게 속았다.
고강의 부하도 '무정타격'당한다.
1954년 3월 26일부터 4월 26일까지, 동북고위간부회의가 심양에서 거행된다. 517명이 참석했고, 170명이 열석한다. 주은래가 회의장에 도착하고, 유소기의 전비서, 동북국제1부서기 겸 동북정부주석 임풍(林楓)이 주재했다.
주은래는 제7기4중전회 결의를 전달하고, 고요반당연맹의 '주요사실'을 소개하면서, 고강, 요수석을 '자산계급극단개인주의'로 비난하고, 고강의 '일관정확' '정치적으로 맞고, 조직적으로 틀렸다', '동북이 맞고, 북경이 틀렸다'는 등의 개념을 타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회의에서, 이전에 고강에게 방파를 결성한다고 비판받았던 임풍, 고환(高桓, 동북군구 부정위)는 '정확노선'의 대표자가 되어 고강의 옛부하들 소위 '오호상장(五虎上將)'에 대하여 연속 1달간 비투한다.
1954년 4월 24일부터 28일까지, 짧은 5일만에, 중공중앙동북국에서 중공중앙정치국의 회의절차가 끝나고, 고강의 동북국에서의 '오호상장'인 장수산, 장명원(張明遠), 조덕존(趙德尊), 마홍(馬洪), 곽봉(郭峰)을 면직시키고 조사한다.
장수산은 동북국의 제2부서기로, 4급에서 8급으로 강등되며, 요녕 반산농장으로 내려보내어저 부장장이 된다. 동북국제3부서기 장명원은 중앙과학원으로 보내어저 판공실 부주임이 된다; 동북국 비서장 겸 농공부장 조덕존은 6급에서 12급으로 강등되어 동북제약공장 부공장장으로 간다; 동북국 부비서장 마홍은 북경제3건축공정공사의 부경리로 간다; 동북국 조직부장 겸 당교교장 곽봉은 여대기계5금공장의 부공장장으로 간다. 그후, 다시 진백촌(陳伯村)이 추가된다. 동북국 조직부 부부장인 그는 하르빈시멘트공장의 공장장으로 간다.
장명원은 이렇게 말한다. 상소하려고 해도 임풍이 말했다: "너는 상소하지 말라. 이건 모주석이 결정한 것이다."
동북의 각 성,시의 주요관리는 거의 모조리 교체되고, 안산시위는 8명의 상위가 모두 교체되며 서기 화명(華明)은 자살(미수)한다.
고강의 '완전잘못인정'도 소용이 없었다.
1954년 4월, 고강은 동북고위간부회의에서 그의 많은 옛부하들이 쫓겨난 것을 듣고, 아주 가슴아파한다. 고강은 자주 불평했다: "이들은 중국혁명을 위해 생사를 넘나들었다. 동북의 발전건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공헌을 했던가. 어찌 하룻밤만에 반당, 반모주석이 된단 말인가? 이런 죄는 모두 내가 떠안겠다.
1954년 4월, 그는 급히 <나의 반성>을 써서 본심에 어긋나지만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실질적으로 당을 분열시키는 활동에 이르렀고" 유소기를 끌어내리려고 기도하고, "자신이 주석의 유일한 조수가 되어, 장래 영수가 되려는 개인적인 야심욕망을 이루려고 했다"고 인정하다.
고강은 <나의 반성>을 제출한 후, 여러번 비서를 시켜 전화를 걸어 당중앙과 얘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초조하게 당중앙의 그에 대한 조치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다.
고강이 자살하기 며칠 전에, 정서가 극도로 불안정했다. 관교조(管敎組)는 여러번 당중앙에 대면보고하고, 서면으로 긴급보고도 올렸다. 상황이 위급하니 중앙이 급히 사람을 파견해서 고강과 얘기하여 잘 처리하여 의외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다.
다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이 내려오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찾아와서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결국 '관교' 8개월만에 절망한 고강은 결국 자살하고 만다.
결론
고강이 숙청당한 것은 이론적으로 말해서,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이 화근이다.
중공7기4중전회의 결의에서는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면서 고강, 요수석을 비판한다. 문제분석의 근본 지도사상은 바로 계급투쟁론이다. 결의는 이렇게 지적한다:
"이번 투쟁에서, 한편으로 외국제국주의는 절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국내의 이미 타도된 계급도 절대 자신의 사망을 절대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들 소멸될 계급은 절대로 반항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들중 적극적인 반혁명분자는 반드시 외국제국주의와 결탁할 것이고,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 당과 인민의 사업을 파괴하려 할 것이고, 중국혁명사업을 실패하도록 기도할 것이며, 반동정치가 중국에서 복벽하게 만들려 할 것이다. 제국주의자들과 반혁명분자가 우리를 파괴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중 하나는 바로 먼저 우리 당의 단결을 파괴하는 것이며, 우리 당내에서 그들의 대리인을 심는 것이다. 우리 당내에는 진독수, 장국도, 소련당내에서는 베리아가 나타난 바 있다. 이런 중대한 역사적 교훈은 표명한다. 적은 반드시 우리 당내에 그들의 대리인을 심을 분아니라, 일찌기 찾아낸 적도 있다. 이후에도 아마 불안정하고, 불충실하고, 다른 목적을 지닌 분자가 그들의 대리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공이 고강을 타도한 것도 이런 상투적인 논리이다. 그후 모택동이 팽덕회, 습중훈, 유소기, 등소평, 임표등을 타도할 때도 마찬가지 상투적인 논리였다.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생사존망을 건 권력투쟁이다. 백년중공은 계속하여 투쟁해 왔다.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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