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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관로(關露): 43년간의 매국노 오명을 벗은 후 자살한 여시인

by 중은우시 2022. 8. 31.

글: 제맥청청(薺麥靑靑)

1982년 3월 23일 베이징 차오네이대가(朝內大街) 203호

10평방미터가량의 한 작은 집에서, 중공중앙조직부는 정식으로 병상의 노인에게 결정문을 읽어주었다:

"관로(關露)의 역사문제는 이미 조사확인되었다. 매국노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관로 동지에게 억지로 붙여진 일체의 모멸적이고 사실이 아닌 말들을 취소한다."

마침내 오명을 씻은 노인의 혼탁한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역사의 잘못된 평가로 그녀는 일찌기 공인된 '매국노'였다. 43년간 죄인으로 살아가면서 공정한 판결을 기다렸다.

명예가 회복되는 날, 관로는 이미 76세의 고령이었다.

이 날을 그녀는 너무나 오래 기다렸다. 늙고 심신이 모두 병들 때까지.

7개월후, 관로는 회고록을 완성하고 또한 그녀의 옛 상사인 반한년(潘漢年)에 대한 기념글을 쓰고난 후, 수면제를 대량으로 먹는다....

작가 소홍(蕭紅)은 죽기 전이 절필을 남긴다:

"나는 남천벽수(藍天碧水, 푸른 하늘과 푸른 물)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그 반부 <홍루>는 다른 사람이 쓰도록 남겨놓겠다. 반생동안 온갖 백안시 냉대를 당했는데, 몸이 먼저 죽다니, 불감(不甘, 달갑지 않다), 불감(不甘)!"

관로가 영원히 두 눈을 감을 때, 일찌기 그녀의 내심을 휘감고 돌던 것은 역시 그 '불감, 불감!'이 아니었을까?

 

1

 

2007년, <인민문학>은 맥가(麥家)의 소설 <풍성(風聲)>에 이런 수상이유를 남긴다.

"<풍성>은 강력한 서사력을 지녔다. 그것은 사람의 고도를 탐색하고, 그것은 초범탈속한 영웅을 만들어냈으며, 그것은 인류의 의지에 대한 열렬한 긍정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당대소설에 독특한 정신방향을 개척했다."

이년후, 소설은 영화로 제작되고, 저우쉰(周迅)이 연기한 구샤오멍(顧曉夢)은 더더욱 홍색경전이미지를 완성했다.

영화의 끝부분에, 구샤오멍은 독백을 통해 '지하공작자'의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털어놓는다: "나는 연옥(煉獄)에서 이 기록을 남긴다. 가족들과 옥저(玉姐)가 나의 이 결정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다만 나는 너희도 결국 나의 마음을 알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무정한 것은 민족이 이미 존망의 위기에 처했고, 우리는 그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만일을 구해낼 수밖에 없다. 나의 육체는 곧 소멸될 것이나, 영혼은 너희와 함꼐할 것이다. 적은 모를 것이다. 노귀(老鬼), 노창(老槍)은 사람이 아니고, 일종의 정신이고 일종의 신앙이라는 것을."

나중에 맥가는 CCTV 프로그램 <중방(重訪)>에서 이렇게 털어놓은 바 있다. 구샤오멍의 원형은 1930년대 상하이의 좌련여시인이고 나중에 적의 특무기관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홍색간첩' 관로라고. 

구샤오멍의 그 진한 녹색의 치파오에 남겨놓은 모르스부호는 관로의 숙명이 되는 참어(讖語)이다: "나는 죽는게 겁나지 않는다. 겁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왜 죽는지 모르는 것이다."

만일 '간첩'이 되지 않았더라면, 관로는 아마도 상해탄에서 장애령(張愛玲)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여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전환점이 있고, 그녀를 기구험준한 길로 데려가고, 그녀가 필생 추구하는 신앙이 된다.

1907년, 관로는 산서(山西) 우옥현(右玉縣)의 몰락한 사대부가정에서 태어난다. 부친은 시서를 많이 읽었고, 그녀에게 호수미(胡壽楣)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9살이 되던 해, 부친이 죽고 모친은 섬약한 어깨로 집안을 이끄는 부담을 짊어졌다.

당시는 군벌혼전으로 사회가 동탕불안했다. 모친은 두 딸을 위해 조용한 작은 집에 글을 읽을 곳을 마련해주고, 그녀들과 함께 사서오경등 중국전통경전을 가르친다. 두 아이는 견실한 문화기초를 쌓을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모친은 딸을 가르치는 것을 입신처세의 길로 삼았다. 여성은 반드시 경제적으로 사상적으로 독립해야 한다. 그래야 시대의 풍랑 속에서 자신의 운명의 배를 지탱할 수 있다.

그러나, 피로가 겹쳐 병이 되어, 모친은 1923년 세상을 떠난다.

그해에 관로는 16살이고, 여동생은 14살이었다.

모친이 죽은 후, 관로는 여동생을 데리고 둘째이모집으로 간다. 둘째이모는 여자아이는 결혼을 해야 하고, 남편을 보살피고 자식을 잘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얼마 후, 둘째이모는 관로에게 한 은행직원을 소개시켜준다.

관로는 이런 결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새벽, 그녀는 여동생을 데리고 이모집을 나온다.

이모집을 나온 후, 관로와 여동생은 상하이로 간다. 잠시 고향사람 염패방(閻佩芳)의 집에 머물면서 다시 학업을 계속한다.

1928년, 관로는 당시 중국의 최고대학인 국립중앙대학 문학과(지금의 난징대학 문학원)에 입학한다.

공부하는 동안 그녀는 정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접한다.

관로에 있어서, 그것은 사상과 영혼의 세례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붓을 창으로 삼아, 날카로운 말로 시정폐해를 공격한다. 그녀는 하층인민의 목소리를 글 한마디 한마디에 실었다.

관로의 최초 단편소설 <그녀의 고향>이 발표된 후, 연이어 일련의 작품을 창작한다. 반응이 아주 좋았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그녀와 장애령, 반류대(潘柳黛), 소청(蘇靑)을 묶어 '민국사대재녀(民國四大才女)'로 부르기도 했다.

관로의 작품중에서 그녀는 민족이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한 우려를 나타냈고, 여성의 자아해방을 부르짖는데 노력했다.

시대의 흐름과 비바람속에서 그녀는 점점 애국청년으로 성장한다.

얼마 후, 관로는 상해부녀항일반제대동맹에 참가한다. 1932년, 나이 겨우 25세의 관로는 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리고 중국좌익작가연맹의 중견분자가 된다. 그녀는 날카로운 붓으로 중국공산당을 위하여 계속하여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홍색 목소리를 냈다.

그녀가 창작에 참여한 영화가곡 <춘천리(春天裏)>는 무수한 애국청년들의 구국의 투지를 불러 일으켰다.

일제의 침략을 맞이하여, 그녀는 크기 소리친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더라도, 민족의 미망인은 되지 않겠다!"

시인은 친절하게 그녀를 '민족의 처'라고 불러주었다.

1.28사건이 발발한 후, 관로는 정령(丁玲)과 함께 전선으로 가서 항일전사들을 위문한다.

당시 19로군은 용감하게 자신의 뼈와 살로 외적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19로군의 비분강개한 영웅적인 사적을 산문시 <비극의 밤>에 실었다.

나중에 그녀는 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가 야간학교, 독서반등을 열어 여성노동자들에 다가가고 잠들어있는 사상을 일깨웠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청춘은 고난의 노동자들 속에 살아 있다."

 

2

 

1937년 7월, 노구교사변이 벌어진 후, 전면적인 항전이 막을 연다. 얼마 후 3개월간 지속되던 송호항전이 끝나고, 국민당군은 서쪽으로 철수하며, 상해조계의 외곽지역은 모조리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상하이는 '고도(孤島)'가 되었다.

2년후의 어느 날 밤, 관로는 장편소설 <신구시대>의 마지막 수정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 사람은 중공 남방국의 팔로군주상해판사처 비서장 유소문(劉少文)이었다. 그는 섭검영(葉劍英)의 밀전(密電)을 가져왔다: 속히 홍콩으로 가서 요승지(廖承志)를 찾아가라!

관로는 조직이 그녀를 홍콩으로 보내어 문학공작을 하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가 요승지를 만난 후 진정한 임무는 "왕정위의 특무조직 76호의 책임자 이사군(李士群)을 만나서 그에 대해 책반(策反, 반란을 책동)활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사군에 대하여 관로는 일찌감치 놀라운 소문을 들은 바 있다.

이사군은 일찌기 중국공산당원이었고, 상하이에서 지하활동을 했다. 그때 적에 체포되었고, 국민당이 각종 수단으로 구워삶아 결국 변절한다. 항전시기, 그는 다시 변절하여 친일매국노가 된다.

상부는 원래 이런 위험한 인물을 관로의 여동생 호수풍(胡綉楓)으로 하여금 책반하게 하려 했다. 왜냐하면 호수풍 부부는 일찌기 이사군이 위험에 빠졌을 때, 이사군의 처자식을 거두어 주었고, 이사군은 시종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너희 부부가 이렇게 나의 처자식을 돌봐주었으니, 나중에 만일 나 이사군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나는 반드시 두 분을 위해 부탕도화(赴湯蹈火)하겠다." 

다만 당시 호수풍은 이미 국민당 상층부에 깊이 들어가 있어, 일시적으로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니 관로를 추천한 것이다.

관로는 이전에는 '문인'의 신분으로 싸웠지 한번도 '간첩'업무는 해본 적이 없다. 다만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생각하자,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응한다.

이번에 그녀가 가는 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위험이 가득한 '마굴'일 뿐아니라, 그녀의 명절(名節)이 망가질 위험도 있었다.

관로의 상사인 반한년은 침중하게 그녀에게 말한다: "관로동지, 희생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자신의 명예를 망치는 것이다."

동시에 반한년은 그녀에게 당부한다: "이후 누군가 너를 매국노라고 하더라도, 너는 변명할 수 없다. 변명하게 되면 끝장이다!"

관로는 말한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홍콩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후, 관로는 스스로 이사군의 처 섭길경(葉吉卿)에게 연락한다. 자신이 호수풍의 언니라고 말한 후,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하면서 이사군이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이전에 이사군은 관로에게 "76호" 문건에 대한 문학선전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의 관로는 그의 행위를 멸시했기 때문에 거절한 바 있다.

이번에 돌연 '도움을 구해오니', 심기가 깊은 이사군은 관로가 "취옹지의부재주(醉翁之意不在酒)"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관로의 진정한 목적을 알 수 없어서 완곡하게 거절한다: "우리 이곳에는 네가 할 만한 일이 없다. 그러나 이후 이곳에 와서 놀 수는 있다. 너에게 참관시켜주겠다."

그후, 관로는 그를 따라 어두운 감옥방으로 간다. 거기에는 온몸에 핏자국과 상처가 가득한 죄수들이 갇혀 있었다.

처음 '인간지옥'의 모습을 본 관로는 모골이 송연했다.

그후, 이사군은 자주 관로를 '76호'로 초청한다. 그러나 그녀와 만나지는 않았다. 관로를 접대한 사람은 그의 처인 섭길경이었다. 두 사람은 점점 친밀해진다. 같이 쇼핑하고, 노래부르고, 춤을 추고...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즐기면서 사는 것같았다. 그러나 관로의 심리적 부담은 가중된다.

한 애국여시인이 이렇게 악명이 자자하고 악행은 모두 저지르는 '76호'와 함께 하다니.

이전의 동료와 친구들은 모두 멸시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대했다. 관로도 현재의 신분이 옛친구들을 연루시킬까봐 스스로 친구들을 멀리한다.

이사군은 관로가 처와 접촉하는 과정을 보면서, 점점 그녀의 동기를 눈치채게 된다. 한번은 관로가 '76호'로 온 후, 이사군이 나타났다.

관로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이사군에게 말한다: "옛친구가 당신을 보고 싶어한다."

이사군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깐 멍하게 있다가 곧이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기실 그도 내심으로 공산당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도 사적으로 당조직과 연락해서, 합작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눈썹을 펴면서, 담배불을 꾹 눌러 끄면서 말한다: "옛친구가 만일 나를 원한다면, 나도 도와줄 생각이 있다."

1942년, 관로가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이사군은 '옛친구' 반한년과 만난다.

이사군의 정보로, 많은 향촌은 일본의 '청향(淸鄕)'계획을 벗어날 수 있었고, 신사군이 봉쇄선을 넘을 때면 이사군이 왕정위정부의 군대를 보내어 엄호해주었다; 동시에 그는 일부 왕정위정부의 특무가 체포해서 '76호'로 들어온 공산당원과 진보인사를 보호해주었다.

이사군의 책반에 관로의 공로가 컸다. 그녀는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며 뛰어난 '홍색간첩'이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어떤 사람은 그녀가 위장을 잘한다고 조롱했고, 어떤 사람은 걸기러에서 그녀에게 '매국노'라고 욕했다. 좌련의 책임자는 심지어 공개적으로 관로는 여하한 좌련의 회의나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관로에게 엄청난 정신적 압력이었다. 그녀는 여동생에게 편지를 써서, 모친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편지의 '모친'은 당시의 홍색성지 연안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요청은 허락받지 못한다. '모친'은 그녀에게 돌아오지 말고 거기에서 '남동생'과 '여동생'을 잘 보살피고 있으라고 말한다.

공산당원으로서 관로는 아주 강한 사명감이 있었다. 설사 '수시로 죽을 수 있더라도' 그녀는 상부의 지령을 받은 후, 계속하여 '인욕부중(忍辱負重)'하며 비밀리에 '간첩'활동을 했다.

 

 

1942년봄 반한년은 관로에게 <여성(女聲)>잡지사에 들어가라는 임무를 준다.

<여성>은 일본주상해총영사관과 일본해군육전대 보도부(즉 정보부)가 공동창간한 중문잡지이고, 독자는 주로 중국여성이며 목적은 문화침략을 진행하는것이었다.

조직에서는 관로가 자신의 저명한 여시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이 잡지사의 내부에 들어가, 일본공산당과 연락하고, 암중으로 반전 애국주의를 선전하라는 것이었다.

관로는 다시 한번 임위수명(臨危受命)하여 자신을 정치는 신경쓰지 않고 그저 풍화설월에 심취한 문예여청년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일하면서, 잡지사의 책임자인 사토 토시코(佐藤俊子)와 친구가 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신분과 목적을 감출 수 있었다.

잡지사에 잠복한 기간동안, 관로는 편집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일본의 관련정보를 수집하고, 직무의 편의를 이용하여 잡지사에 많은 선진사조의 글을 싣고, 많은 진보적인 문학청년을 배양하고 발굴한다.

그러나, 그녀의 애국주의적인 일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상해민중들이 보기에 관로는 일본인들이 기르는 '매국노'이다. 당연히 인민의 공적이다.

특히 1943년 7월에 발생한 한 가지 사건은 더더욱 관로를 만겁불복의 심연으로 몰아넣는다. 이 해에 일본은 '대동아문학자"대회를 개최한다. 많은 문인들을 도쿄로 불러 회의에 참가하게 하면서, 그 기회에 그들로 하여금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성명을 내고, 모든 사람의 사진을 신문에 실어 표창했다. 

사토토시코는 이 '영예'를 관로에게 주었다.

관로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참가하면, '매국노'의 이름은 철저히 사실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일말의 존엄을 남겨두고 싶었지만, 반한년은 그녀에게 이 기회에 서신을 동경제국대학의 아키타(秋田) 교수에게 전달해달라고 한다. 당시 중국에 있던 일본공산당의 지도자 노사카 산조(野坂參三, 중국에서 쓰던 가명은 岡野進, 林哲등)가 다시 일본공산당과 연결하도록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관로는 반한년의 지시를 받은 후,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가기로 결정한다.

일본에 가는 기간동안, 그녀는 정보를 수집한 일기장을 편집부 사무실 화장실 세면대의 아래에 숨겨두었다. 이와 동시에 관로는 성공적으로 서신을 아키타교수에게 전해주어, 반한년이 그녀에게 맡긴 임무를 완성한다.

곧 관로가 일본 동경에서 한 발언과 사진이 국내로 전해진다.

당시의 <시사신보>는 이렇게 관로의 '일본행'을 기록했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의 허장성세를 도모할 때, 관로는 다시 대표로 나서서 염치도 없이 적의 수도로 가서 대표대회에 참가한다. 그녀는 완전히 기형적으로 성장한 후안무치한 여작가이다."

동포들의 비분강개한 공격에 관로는 만전천심(萬箭穿心)의 고통을 느낀다.

동시에, 그녀는 또 다른 소식을 듣는다. 이사군이 집에서 신비스럽게 폭사했다는 것이다.

이사군의 급사에 관로는 전율한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침략자보다 중국인들은 매국노를 더욱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당초 '홍색간첩'의 길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생사를 도외시했지만, 그녀가 두려운 것은 '매국노'의 죄명을 안고 아무도 모르게 암살당하는 것이다.

예전에 그녀는 붓을 들어 글을 썼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애국시를 올렸으며, 무수한 지사인인들이 전선으로 나가도록 하는 용기와 희망을 북돋웠다.

사람들은 일찌기 그녀를 존경했지만, 이제는 그녀를 미워한다.

관로는 할 말이 없었다. 묵묵히 배산도해의 분노를 받아내면서, 항일승리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되면 그녀는 광명정대하게 태양아래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타나는 날이 왔을 때 그녀에게는 재난이 시작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한다. 항일전쟁의 승리로 국민당정부는 '숙간(肅奸, 매국노숙청)'을 시작한다.

관로는 당연히 그 대상이다.

그녀는 국민당에 의해 '한간문인(漢奸文人)'으로 규정되어 '체포령'이 떨어진다.

다행히 상부의 특별한 안배로 관로는 소북(蘇北)해방구로 갈 수 있었다.

관로는 조직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제 고진감래라고 여겼다. 그녀는 다시 붓을 들어, 그동안 억눌려 있던 심정을 글로 쓰고자 했다.

그녀가 일부 시를 <신화일보>에 발표하려 하자, 신문사의 사장은 그녀에게 이렇게 건의한다: "당신이 글을 발표할 수는 있는데, 관로라는 필명은 사용할 수 없다. 외부에서는 당신의 신분을 모른다. 만일 이 필명으로 글을 발표하게 되면, 아마도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때 관로는 깨달을 수 있었다. 항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녀의 역사문제는 아직 진정으로 깨끗해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관로는 영웅이 아니고, '매국노'였다.

'오명화'된 처지와 비교해서, 그녀에게 더욱 큰 타격이 된 것은 바로 얼마후 그녀가 받게 되는 연인 왕병남(王炳南)의 절교신이었다.

왕병남

왕병남은 관로와 항전이전부터 알고 지냈다. 관로가 위장자의 신분으로 적의 진영에서 싸우고 있을 때, 왕병남은 그녀의 생명에서 한줄기 빛이었다.

항전이 끝난 후, 왕병남은 이미 중앙고위층지도자의 비서가 되어 있었다. 그가 상부에 자신의 애정과 관로와 결혼하겠다는 계획을 보고하자, 거부당한 것이다. 이유는 만일 그들 둘이 결합하면, 당의 이미지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더더구나 그의 당조직에서의 공작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왕병남은 관로에게 사실대로 얘기한다.

그리하여, 그 절교신은 마치 초하한계(楚河漢界, 장기판의 중간부분)처럼 철저히 그와 관로의 사이에 선을 것는 것이다.

그녀는 특히 기억한다. 그녀가 왕정위정부의 '76호'에 잠입하기 위해 왕병남과 작별했을 때, 왕병남은 그에게 사진을 하나 준다. 그리고 사진의 뒤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네가 나를 일시 관심주면, 나는 너를 평생 관심주겠다"

그녀도 자신의 시집 <태평양상의 가성>을 그에게 준다.

그 사진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소장하고 있었지만, 그 시집을 그가 여전히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왕병남은 총리겸외교부장 주은래의 영도하에 적극적으로 세계각국과 외교관계를 촉진했다. 1955년, 왕병남은 중국주폴란드대사로 나가고, 미중간의 대사급회담의 초대수석대표로 나가며, 9년에 걸친 미중회담에 참가한다. 명을 받아 귀국한 후에는 외교부 부부장을 지낸다.

왕병남은 요직에 있으면서 처리할 일이 많았다. 그때의 관로는 과거문제로 격리조사를 받고 있었다.

일찌기 구사일생할 때는 그를 보면서 위로를 받았는데, 이제 그녀가 그 풍우를 지나고 나니 해가 없는 암흑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세의 조화는 길이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 그는 이미 국가의 동량이 되었지만, 그녀는 인민의 '죄인'으로 전락했다.

그녀는 더 이상 그와 함께 지낼 수가 없었고, 그저 고독하게 혼자서 지내야 했다.

그후 관로는 거의 외부와의 연락을 끊는다.

관로는 이렇게 여생을 마치려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긴다. 이어지는 겁난은 그녀를 향해 거대한 그물을 펼치기 시작한다.

 

5

 

1955년, 한한년이 '내간(內奸)'으로 의심받아 체포되고 감옥에 들어간다. 관로는 그의 부하로 함께 연루되어 감옥에 2년간 갇힌다.

그러나 수감의 재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67년, 관로가 60세가 되었을 때, 반한년사건이 다시 불거지고 관로는 다시 감옥에 갇힌다.

이번에 그녀는 감옥에서 8년을 지낸다.

전후로 두번이나 감옥에 들어가면서, 그녀는 계속하여 진술서를 써야 했다. 그녀가 예전에 썼던 문학창작작품이 지금은 그녀에게 '막수유'의 죄명을 날조하는 자료가 되어 있었다.

감옥에 갇힌 관로는 적의 손에 죽지 않았지만, 자신이 죽어라 보호했던 동포에게 모욕을 당했다.

이전에, 어떤 위기에 처하든, 관로는 생활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깔끔한 것을 좋아하고, 글읽기를 좋아하며, 여러 해동안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그녀는 생활과 이상에 대한 신앙을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번 감옥에 갇히면서, 관로는 철저히 무너진다. 그녀는 정신분열증을 얻어, 어떤 때는 정신이 멀쩡하지만, 어떤 때는 미쳤다.

관로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다. 석방된 후 계속 10여평방미터의 좁은 방에서 살았다.

1980년 관로는 뇌혈전을 앓는다. 전신마비가 되었을 뿐아니라, 과거의 많은 일들도 잊어버렸다.

그녀는 다시는 예전처럼 글로 자신의 생각을 써낼 수 없었다. 

가끔 그녀는 10여평방미터의 작은 집의 창문으로 멍하게 바깥세상을 주시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1982년 3월이 되어 중공중앙조직부는 마침내 <관로동지에 관한 평반(平反, 명예회복)결정>을 내려, 그녀의 '죄명'을 철저히 씻겨준다.

같은 해 8월, 중공중앙은 <반한년동지의 평반소설(平反昭雪), 명예회복에 관한 통지>를 내놓는다. 그때는 반한년이 죽은지 이미 5년여가 지난 때였다.

반한년의 동상 2001년 상해에 건립되었다.

관로는 영화 <십가가두>의 주제곡인 <춘천리>에 희망에 충만한 시를 쓴 바 있다.

"봄날에 온갖 꽃의 향기가 온다. 랑리거 랑리거 랑리거랑. 따스한 햇볕이 하늘에 떠서 우리의 낡은 옷을 비춘다...."

관로가 바라는 봄날은 43년이나 늦게 왔다.

반평생을 관로는 정신에 족쇄가 채워진채로 지내야 했다.

그녀가 수면제를 먹었을 때, 그녀의 곁에 남은 것은 인형 하나와 왕병남의 사진 한장 뿐이었다.

사진의 뒤에는 관로가 써넣은 시가 적혀 있었다

일장유몽동수근(一場幽夢同誰近)

천고정인아독치(千古情人我獨痴)

문화부에서 개최한 관로의 추도회현장에 백발이 성성한 왕병남은 사람들의 뒤에 묵묵히 서 있었고, 그 모습은 우울하고 슬퍼보였다.

그 절교신을 보낸 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생사의 거리가 놓여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펜을 꺼낸다.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선물한 묵록색의 파크만년필이다. 그것으로 그는 방명록에 서명한다.

만일 '홍색간첩'이 되지 않았더라면, 관로는 아마도 왕병남과 함께 탁월한 외교가가 되었거나, 계속 글을 써서 작가로서의 아름다운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다만 잔혹한 인생은 가정을 거절한다.

관로의 추도회 좌담회에서 작가 하연(夏衍)은 이런 말을 남긴다: "해방후 30년 관로의 내심은 아주 처연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죽음은 반드시 원인이 있다."

아마도 역사의 비극은 시간으로 공정한 답안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큰 바다에 빠지거나, 사막에 묻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가 그들을 위해 공정한 답안을 얻어내줄 수 있겠는가.

러시아의 작가 빅토르 아스타피예프는 <가을이 온다>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대지와 함께 잠깐 숙정(肅靜)해지길 바란다. 나는 자신을 연민하고, 왜 그런지 몰라도 대지도 연민한다."

자연의 흥쇠, 인류의 영욕, 끊이지 않는 우환은 이 대지에서 반복되고 있다. 대지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담는다.

베이징 서산의 무명영웅기념광장의 기념비에는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

"너의 이름은 아무도 모르지만, 너의 공적은 영원무궁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혁명전쟁시대에 무수한 숨은 전선에서 싸워온 '지하공작자'들의 진실한 모습일 것이다.

관로는 일찌기 옥중에서 쓴 <추야(秋夜)>에서 이런 심정을 토로한 바 있다:

환득강산춘색호(換得江山春色好)

단심불겁단두대(丹心不怯斷頭臺)

흐르는 강물은 끊임이 없다. 다만 먼지로 사라질 수 없는 모든 것은 불후의 풍비(豊碑)를 이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