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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113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죽음 글: 서민(徐敏) 1959년 12월 특사를 받은 마지막 황제 부의는 보통사람의 생활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먼저 다섯째 여동생의 집에 반달간 머물다가 숭문문(崇文門) 안의 정부가 안배해준 한 여관(旅館)에서 지냈다. 다음 해 봄에 민정국은 그에게 소개장을 한장 써주고 그를 식물원(植物園)에서 근무하게 해준다. 식물원에서 1년간 일을 한 후, 다시 전국정협 문사자료연구위원회에서 근무한다. 월급여는 100위안이었다. 생활이 안정된 후, 부의는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고 싶어한다. 사람의 소개를 받아 간호사인 이숙현(李淑賢)과 부부가 되어 몇년간 편안하게 지낸다. 나중에 소변에 피가 묻어나왔는데, 의사의 오진으로 요독증(尿毒症)이 된다. 1967년 10월 4일 오전, 이숙현은 부의와 함께 협화의원으로 검사를 받.. 2023. 3. 3.
오함(吳晗): 평생 중공에 충성하였으나, 중공의 감옥에서 죽은 어용학자 글: 진뢰(秦雷) 오함(吳晗)은 청빈한 집안 출신으로 자신의 근면함과 노력으로 호적(胡適)에게 인정을 받아, 1931년 청화대학 사학과에 합격하고, 1934년 청화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재능이 출중하여 1937년에는 겨우 28살의 나이로 운남대학 교수로 채용된다. 1940년 오함은 서남연대(西南聯大)로 옮겨 교수가 되고 그때부터 공산당과 접촉하게 된다. 오함의 부인 원진(袁震)은 중공원로 동필무(董必武)의 제자이고, 두 사람은 함께 중경으로 가서 동필무를 만난 적도 있다. 1943년 7월, 오함은 곤명(昆明)에서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에 가입하고, 공산당이 조직한 "서남문화연구회"등에서 활동하면서, 완전히 호적의 "독서구국(讀書救國)"론을 포기하며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며, .. 2023. 2. 25.
"중공특과(中共特科)": 비밀조직의 진실한 이야기 글: 원천(源泉) 오늘 이야기나눌 것은 역사상의 "중공특과"이다. 이 조직은 중국공산당사에도 애매모호하게 기록한 신비스러운 조직이다. 공산당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소련이 아직 설립되기 전에, 볼세비키당은 건립초기 심각한 생존위기를 맞이한다. 내부의견이 분열되고, 반대당은 강력했으며, 여러 방면에서 짜르체제를 옹호하는 전통역량이 있었다. 이때 레닌의 주도하에 볼셰비키당에는 "체카"라는 특무조직을 두어, 암살과 테러활동을 벌이는데, 극히 잔혹하고 극단적인 수단으로 반대파와 경쟁상대를 제거한다. 최종적으로 공산세력이 집권당이 된다. 그리고 소련공산당을 그대로 복제한 중국공산당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대륙의 저명한 다큐멘터리작가 왕판(王凡)이 최근 출판한 에서 여러 당사자들이 직접 겪.. 2023. 2. 14.
남창폭동(南昌暴動): 참가한 지도자들의 서열은? 글: 고벌림(高伐林) 중국의 정치와 문화전통은 역대이래로 존비유서(尊卑有序), 즉 위계질서를 중시하며 강상(綱常)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한다. 봉건등급에 반대하고, 사람은 평등하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중국공산당도 권력을 잡은 후에는 역시 존비유서를 따졌다. 여기에서 필자는 유방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천하를 차지한 후 논공행상을 벌이는데, 문신과 무신들이 서로 취한 상태에서 공을 다퉜다. 서로 소리치고, 검을 뽑아 탁자를 베고, 기둥을 쳤다. 유방은 그런 것이 꼴보기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숙손통(叔孫通)이 유방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등급제도, 예악규장을 제정하여 신하들을 교욱하고 백성들을 따르게 한다. 다시 조회를 개최하자 신하들은 황공해 하면서 법도를 따랐다. 유방은 그제서야 .. 2023. 2. 9.
장국도(張國燾)의 홍콩세월 글: 조대부화실(趙大夫話室) 장국도의 중국역사상 지위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그는 여전히 많은 밀리터리덕후와 역사애호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인물이다. 그의 시비공과에 대하여는 후인들의 평가가 아마 더욱 적합할 것이다. 몇가지 점은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1. 장국도는 북경대학 학생으로서, 북경학생연합회 강연부장과 북경학생연합회 총간사를 맡았다. 그는 "5.4"운동의 가장 중요한 학생지도자중 한명이다. 2. 장국도는 중국공산당의 주요창시자중 한명이다. 100년전 가흥남호(嘉興南湖)의 작은 배 위에서 강서(江西) 평향(萍鄕) 상률(上栗) 방언을 하는 그는 "제1차대표대회의 폐막선언"을 했다. 3. 장국도는 "8.1" 남창의거의 주요발기인중 한명이고 홍군(紅軍)의.. 2023. 1. 25.
중국의 대외군사원조 규모는...? 글: 임휘(林輝) 외국신문보도에 따르면, 중국의 신임 외교부장 친강(秦剛)이 얼마전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방문하는 나라마다 채무를 하나씩 탕감해주었다고 한다. 현재 중국은 신종코로나로 고통을 겪고 있고, 많은 국민들이 의약품부족에 시달리는 상황하에서 중국당국은 중국인의 피와 땀으로 번 돈을 뿌리면서 외국의 정계요인을 매수하고, '우방'과 우호적으로 교류하고 있다는 겉모습을 만드는데 치중하고 있다. 이는 다시 한번 중국당국의 "생명지상, 인민지상"이 철두철미한 거짓말, 헛소리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사실상 중국당국이 대외적으로 돈을 뿌리는 것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중국 외교부의 비밀해제문건과 중국외교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1949년부터 1976년까지 모택동,주은래가 집권하고 있을 때, 특히 문혁기간.. 2023. 1. 25.
백지혁명(白紙革命)의 배후는...? 글: 대종사(大宗師) 시진핑이 등극한지 1달도 되지 않아서, 시진핑을 타도하자는 백지혁명이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시작되었다. 그 기세는 맹렬하고, 광범위하여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백지혁명이 이처럼 단기간내에 성숙되고, 체계를 갖추며, 현대의 방식으로, 통일된 보조, 강령을 내놓으며, 동시에 전국 각지, 각 대학에서 신속히 전개된 것을 보면 그 배후에 강력한 정치적세력이 계획하고, 조율하고, 조종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세력은 공산당과 정부의 내부에 있다. 시진핑이 일거에 조사해서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조사하도록 시키는 사람이 아마도 그 세력의 앞잡이이거나 혹은 동정하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실 공산당의 건국후에 일어난 모든 민변(民變)의 배후.. 2022. 11. 30.
임표(林彪)는 왜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했을까? 글: 봉황역사(鳳凰歷史) 중공 고위층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할 때, 모택동(毛澤東)과 임표(林彪)는 견해가 달랐다. 당시, 모택동은 확실히 임표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한국전쟁체 참가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임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참전하지 않았고, 나중에 팽덕회(彭德懷)가 총사령관을 맡아서 참전한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특히 "9.13"사건이후, 대다수의 견해는 이러했다: "임표는 한국전쟁문제에서 소극적이었고,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진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모택동은 동북지방이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고, 또한 동북지구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고려하여 당중앙에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을 설립할 것을 건의했다. 모택동의 .. 2022. 10. 26.
"고요반당연맹(高饒反黨聯盟)"중 고강(高崗) 자살의 수수께끼 글: 왕우군(王友群) 1954년 8월 17일, 당시 중공정치국상위, 중앙정부부주석, 중앙군사위부주석, 국가계획위원회주석 고강(高崗)이 대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다. 향년 49세이다. 고강은 중공건정후 부국급(副國級) 고관으로 자살한 최초의 인물이 된다. 고강은 왜 자살했는가? 왜냐하면 그는 억울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중공에 큰 공을 세웠다: 드는 중공 섬북(陝北)근거지의 창업자중 한명이고, 모택동등이 강서에서 '장정'을 시작하고, 최종적으로 섬북에서 근거지를 마련하게 된다; 국공내전기간동안 그는 동북으로 파견되어 동북을 전국에서 가장 먼저 '해방'되고, 가장 '선진'된 지역으로 만들었다' 1950년, 모택동이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그가 이끄는 동북은 가장 중요한 군수기지가 된다; 1952년.. 2022. 9. 6.
관로(關露): 43년간의 매국노 오명을 벗은 후 자살한 여시인 글: 제맥청청(薺麥靑靑) 1982년 3월 23일 베이징 차오네이대가(朝內大街) 203호 10평방미터가량의 한 작은 집에서, 중공중앙조직부는 정식으로 병상의 노인에게 결정문을 읽어주었다: "관로(關露)의 역사문제는 이미 조사확인되었다. 매국노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관로 동지에게 억지로 붙여진 일체의 모멸적이고 사실이 아닌 말들을 취소한다." 마침내 오명을 씻은 노인의 혼탁한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역사의 잘못된 평가로 그녀는 일찌기 공인된 '매국노'였다. 43년간 죄인으로 살아가면서 공정한 판결을 기다렸다. 명예가 회복되는 날, 관로는 이미 76세의 고령이었다. 이 날을 그녀는 너무나 오래 기다렸다. 늙고 심신이 모두 병들 때까지. 7개월후, 관로는 회고록을 완성하고 또한 그녀의 옛 상사인 .. 2022.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