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래113 향충발(向忠發)과 그의 체포전후 (2) 글: 오기민(吳基民) 3. 향충발 체포전후 1931년 4월 24일, 중공정치국후보위원이며 정치보위공작을 책임지던 고순장(顧順章)이 무한에서 체포되고, 바로 변절한다. 주은래는 즉시 상해의 중공중앙기관의 대이전조치를 취한다. 향충발은 프랑스조계 선종로(善鐘路)의 거처에서 이사를 나와 소사도로(少沙渡路)의 주은래의 거처로 옮겨간다. 그와 동거하던 여인 양수정은 임필시(任弼時)의 부인 진종영(陳琮英)과 함께 정안사(靜安寺) 주변의 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모든 것을 천의무봉하게 처리하고 소리소문없이 처리했다. 그러나 암류는 지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고순장은 남경에서 그가 원래 홍대(紅隊)에 있을 때의 조수인 진련생(陳蓮生)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주은래와 향충발을 체포하지 못했다고. 그는 바로 진련생에게 .. 2023. 4. 21. 향충발(向忠發)과 그의 체포전후 (1) 글: 오기민(吳基民) 향충발은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2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중공6대때 중앙정치국 주석 겸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주석에 당선된다. 사람들은 그를 습관적으로 '총서기'로 불렀다. 사건이 많았던 1931년 6월 22일 체포되었고, 변절한다. 그리고 24일 사망한다. 최근에 출판된 중공중앙당사연구실이 쓴 에서는 그의 체포에 대하여 단지 두 마디만 적혀 있다: "6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주석을 맡았던 향충발이 상해에서 체포된 후 변절한다. 이 두 사람(향충발과 같은 해 4월에 체포되어 변절한 고순장(顧順章)을 가리킴)의 변절은 중공중앙기관과 중앙지도자의 안전에 극히 큰 위협을 조성했다" 오랫동안 향충발에 대한 평가는 아주 각박했다. 노동자출신이기 때문에 '.. 2023. 4. 21. 손유세(孫維世): 주은래(周恩來) 양녀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 글: 왕우군(王友群) 1968년 10월의 어느 날, 당시 중국국무원총리로 있던 주은래는 사무실에서 공안부가 보내온 "손유세사망보고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구금된 범죄인 손유세는 10월 12일 저녁 11시 공안부병원으로 보내어졌고, 지주막하출혈로 진답받았는데, 치료를 하였지만 살려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14일 오후 3시 30분 사망했다. 이에 보고드린다. 왕명소수(王明蘇修, '소수'는 소련수정주의'를 가리킴)특무전안조." 얼마 후 비서가 돌아와 주은래에게 보고한다. 손유세의 시신은 이미 '현행반혁명'으로 화장되었고, 유골조차 남기지 못했다고. 주은래의 양녀 손유세는 중국의 저명한 희극예술가(戱劇藝術家)로 1921년에 태어났다. 부친 손병문(孫炳文)은 주은래의 가까운 친구였는데, 19.. 2023. 4. 18. 강청의 전남편 당납(唐納): 신비한 신분의 수수께끼 (1) 글: 하월명(賀越明) 2012년 8월 23일은 당납 선생의 기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꼬박 2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납"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인방"이 타도되면서, 나라를 떠난지 오래되고 이름없이 살아가던 그가 다시 중국인들의 시야에 들어왔고, 보통민중들이 화제로 올리는 인물이 되었다. 일찌기 "사랑때문에 목숨을 버리려 했다" 1970년대말부터 현재까지, 신문잡지에는 당납을 소개하는 글이 적지 않았다. 수가 많아서 일일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총괄해서 말하자면, 이들 글 중에서 이전에 당납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몇몇 언론종사자들의 회고한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 글들은 대부분 포풍착영(捕風捉影)하거나 다른 사람의 글을 베낀 수준이었고, 적지 않은 글들은 .. 2023. 3. 4.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죽음 글: 서민(徐敏) 1959년 12월 특사를 받은 마지막 황제 부의는 보통사람의 생활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먼저 다섯째 여동생의 집에 반달간 머물다가 숭문문(崇文門) 안의 정부가 안배해준 한 여관(旅館)에서 지냈다. 다음 해 봄에 민정국은 그에게 소개장을 한장 써주고 그를 식물원(植物園)에서 근무하게 해준다. 식물원에서 1년간 일을 한 후, 다시 전국정협 문사자료연구위원회에서 근무한다. 월급여는 100위안이었다. 생활이 안정된 후, 부의는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고 싶어한다. 사람의 소개를 받아 간호사인 이숙현(李淑賢)과 부부가 되어 몇년간 편안하게 지낸다. 나중에 소변에 피가 묻어나왔는데, 의사의 오진으로 요독증(尿毒症)이 된다. 1967년 10월 4일 오전, 이숙현은 부의와 함께 협화의원으로 검사를 받.. 2023. 3. 3. 오함(吳晗): 평생 중공에 충성하였으나, 중공의 감옥에서 죽은 어용학자 글: 진뢰(秦雷) 오함(吳晗)은 청빈한 집안 출신으로 자신의 근면함과 노력으로 호적(胡適)에게 인정을 받아, 1931년 청화대학 사학과에 합격하고, 1934년 청화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재능이 출중하여 1937년에는 겨우 28살의 나이로 운남대학 교수로 채용된다. 1940년 오함은 서남연대(西南聯大)로 옮겨 교수가 되고 그때부터 공산당과 접촉하게 된다. 오함의 부인 원진(袁震)은 중공원로 동필무(董必武)의 제자이고, 두 사람은 함께 중경으로 가서 동필무를 만난 적도 있다. 1943년 7월, 오함은 곤명(昆明)에서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에 가입하고, 공산당이 조직한 "서남문화연구회"등에서 활동하면서, 완전히 호적의 "독서구국(讀書救國)"론을 포기하며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며, .. 2023. 2. 25. 이전 1 2 3 4 5 ··· 1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