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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궤(劉仁軌): 당나라때 출장입상(出將入相)의 항왜민족영웅

글: 최애역사(最愛歷史)​당고종(唐高宗)때 낙양(洛陽)에 순우씨(淳于氏)라는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죽인 죄로 대리시(大理寺)에 압송되어 수감되었다. 그녀의 죄명은 마땅히 사형감이다. 그런데 재상(宰相) 이의부(李義府)가 마침 대리시를 시찰왔다가 순우씨를 보고 그녀의 미모에 반해버린다.​그리하여, 이의부는 대리시승(大理寺丞) 필정의(畢正義)에게 자신이 순우씨를 첩으로 삼고 싶으니, 방법을 찾아서 그녀를 풀어주라고 말한다.​필정의는 그저 담량이 적은 관리였다. 재상의 분부를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몰래 희생양을 찾아서 순우씨와 바꾸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이 나중에 대리시경(大理寺卿) 단보현(段寶玄)에게 발각되고, 그가 고발하여 경성을 뒤흔들게 된다.​사안이 중대하다보니 당고종이 직접..

"헌충사건(獻忠事件)"이 왜 빈발하는가?

글: 사기(思琪)​"헌충사건"이라는 명칭은 역사인물 장헌충(張獻忠)에서 따온 것이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장헌충은 황제를 칭한 후, 사천(四川)에서 여러차례의 대도살을 자행했다. 그리하여 인구가 격감하게 된다. 중국의 인터넷에서 헌충사건은 핫이슈이다. 최근 몇년간의 악성묻지마살인상해사건들을 가리킨다.​관련보도에 따르면, 금년들어 중국에서는 여러 건의 악성 묻지마사건이 벌어진다. 지난달 28일 한 50세가량의 남자가 칼을 들고 베이징 하이덴구 중관촌제3소학에 들어가 무차별적으로 수업이 끝난 아이와 가장들을 찔러 3명의 아이와 2명의 어른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중국헌충사건의 특징​​​먼저, 헌충사건은 통상적으로 사회에 대한 보복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소위 사회에 대한 보복이라 함은 일종의 무지항성적(묻지..

양각애(羊角哀)와 좌백도(左伯桃): 결의형제(結義兄弟)이야기의 원조

글: 자귤(紫橘)​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를 배울지언정, 와강일주향(瓦崗一炷香)은 배우지 말라. 유비, 관우, 장비가 결의형제를 맺은 후,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하는 형제가 된다. 그들이 결의를 맺은 이야기는 후대에까지 칭송받고 있다. 이후 형제결배(結拜)이건 아니면 흑방결배이건 모두 도원결의의 여파라 할 수 있다. 다만 실제로, 유관장의 도원결의 이야기는 명(明)나라때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명나라이전에 형제간의 결의를 맺을 때는 양각애와 좌백도를 따랐다. 이 두 사람 간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별로 유명하지 않은 형제정의​양각애, 좌백도의 이야기는 정사(正史)에 실려 있지 않다. 두 사람의 이야기의 출처는 서한시대 유향(劉向)의 이다. 아쉽게도 원문은 송나라때 이미 유실되었고, 오늘날 볼..

원세개(袁世凱) 칭제(稱帝) 막후의 몇몇 추동자들...

글: 소전유(蘇全有)​1915년 12월 12일, 원세개는 소위 민중권진서(民衆勸進書)를 받아들여, 등극을 선포한다. 역사에서 홍헌황제(洪憲皇帝)라고 불리게 된다. 1916년 3월 22일, 원세개는 어쩔 수 없이 하야한다. 이렇게 83일간의 황제생활은 끝이 난다. 그리고 6월 6일 요독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원세개는 모략이 비범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왜 그가 천하의 금기를 어기고 역사의 조류를 거슬러 황제에 올랐을까? 여기에는 원세개 본인의 원인외에 나머지 몇 사람이 막후에서 부추긴 것도 있었다. 그 요소를 분석해보지 않을 수 없다. ​원세개는 임종전에 힘들여 네 글자를 내뱉는다: "그가 나를 해쳤다(他害了我)". 그렇다면 여기의 "그(他)"는 도대체 누구일까?​원씨가족들은 원세개가 죽기 전에 말한 "그가 ..

당덕종(唐德宗): 큰 일을 하려다, 큰 일을 당하다

글: 최애역사(最愛歷史)​안사의 난(安史之亂)이후, 당나라는 이미 "부고모갈(府庫耗竭, 국고를 소모하여 고갈되다)", "금군미약(禁軍微弱)"의 곤경에 빠진다. 그러나, 제오기(第五琦), 유안(劉晏), 양염(楊炎)등 이재(理財)대가들의 노력을 거쳐, 당덕종 즉위초기인 건중원년(780년)의 국고세수는 이미 1305만관곡(貫斛)에 이른다. 정상적인 세입외에 매년 700만관곡에 이르는 염리(鹽利)세수도 있었다. ​그의 부친 당대종(唐代宗)의 즉위초기와 비교하면 국고수입은 몇배로 늘었다.​이런 자금은 당덕종의 허리를 튼튼하게 만들었고,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삭번(削藩)"전쟁을 시작한다.​그는 큰 일을 하고자 했다(大幹一場). 그러나 역사는 오히려 이를 피동문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1​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

중국 최신 스텔스전투기 J-35A의 어두운 그림자

글: 두정(杜政)​제15회 국제항공전이 11월 12일부터 17일까지 주하이(珠海)에서 거행된다. 당국의 선전에 따르면, 이번 항공전에는 처음으로 3가지 스텔스전투기가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J-35A를 제외하고, 처음 중국에 온 러시아의 Su-57, 그리고, 중국의 J-20이 그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중국의 공식매체가 대거 선전속에 이번 항공전은 사실상 조소, 표절의혹과 부패냄새로 얼룩지고 있다.​Su-57은 샤오펀홍들의 조롱을 받다.​러시아의 최신형 Su-57전투기는 11월 3일 중국 주하이 진완(金灣)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11월 7일 적응비행을 진행했다. Su-57의 NATO 명치은 "FELON"이다. 이 모델은 크레믈린에서 "전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제5세대 스텔스전투기"라..

잊혀진 전쟁: 청일전쟁의 육상전투(2)

글: 팽배신문(澎湃新聞)​1894년 봄, 조선에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조선왕조는 이를 진압할 힘이 없어, 중국주조선특사 원세개(袁世凱)의 적극적인 주장에 힘입어 조선왕조는 6월 3일 청정부에 구원병을 청한다. 6월 4일 광서제는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육군을 조선에 보내어 난을 평정하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청일전쟁의 육상전투의 역사는 여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조선파병명령을 받은 후, 이홍장은 휘하의 야전부대에서 선발한다. 그가 선발한 부대를 보면, 주로 근대화정도가 높고, 군기가 상대적으로 좋았던 직예연군부대의 인원들이다. 그리고 직예제독 섭지초와 태원진총독 섭사성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한다. 그리고 윤선초상국에서 상선을 보내어 이들을 조선수도 한성의 남쪽에 있는 아산에 상륙시킨다. ​선두부대로..

잊혀진 전쟁: 청일전쟁의 육상전투(1)

글: 팽배신문(澎湃新聞)​130년전에 발발한 청일전쟁은 근대중국의 운명에 중요하고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전쟁패배의 결말은 직접적으로 1840년이후 중국이 군사자강으로 국가자강을 추진한 양무모델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며, 새로운 자강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이는 이 오래된 전쟁이 군사자체를 뛰어넘는 역사적인 귀감의 의미를 지니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일전쟁에 대한 반성은 시간을 초월하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끊임없는 과정에 맞추어 청일전쟁도 자주 새롭게 조명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에서 폭넓은 주목을 받고, 토론하고 기념하고 있다. 자주 현실의 이슈에 대하여 청일전쟁을 꺼내어 귀감으로 삼곤 한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점이라면 역사상의 청일전쟁은 실제로..

19세기 첫 10년: 중국해적의 황금십년(黃金十年)

글: 최애역사(最愛歷史)​건륭제는 자칭 중국의 태평성세를 창조하고 이어갔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자신의 아들, 태청제국의 황위계승자 애신각라 옹염(顒琰)(즉 가경제)를 화약통 위에 올려놓았다.​화약통에 앉아 있게 된 가경제는 사고가 빈발하는 제국에 대하여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심신이 지쳐갔다.​힘겹게 3년을 참고나서 마침내 거탐 화신(和珅)을 무너뜨린다;누가 알았겠는가, 사천,호북의 백련교(白蓮敎)의 난은 일촉즉발이 되어 청나라중기 최대의 내부전란이 된다.그동안, 자금성안에서는 기이한 암살사건이 발생하여,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나중에 또 한 무리의 천리교도(天理敎徒)가 태감의 내부호응하에 황궁으로 쳐들어와, '한당,송명에도 없었던 일'이 일어난다.​이뿐아니라, 제국의 변방 - 화남..

남창기의(南昌起義)의 총지휘관을 비당원인 하룡(賀龍)이 맡은 이유는?

글: 옥미수(玉米穗)​1927년 8월 1일 발발한 남창기의는 중공당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그 의미가 크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무력으로 대항한 첫번쨰 사건이며, 그후 20여년간 지속된 국공전쟁의 서막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남창기의 당시에는 국민당좌파의 기치를 내걸었고, 기의후에 건립된 혁명위원회의 명단에는 송경령(宋慶齡), 등연달(鄧演達), 장발규(張發奎), 하향응(何香凝)등 국민당원들의 이름이 들어 있었지만, 그건 그저 내건 것에 불과했고, 진정 기의를 기획, 조직, 발동한 사람은 모조리 공산당원이다. 국민당좌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혁명위원회 위원중 한명인 장발규는 기의발발후 위대를 이끌고 기차를 타고 현장으로 가서 기의를 막으려고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