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팽배신문(澎湃新聞)
1894년 봄, 조선에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조선왕조는 이를 진압할 힘이 없어, 중국주조선특사 원세개(袁世凱)의 적극적인 주장에 힘입어 조선왕조는 6월 3일 청정부에 구원병을 청한다. 6월 4일 광서제는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육군을 조선에 보내어 난을 평정하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청일전쟁의 육상전투의 역사는 여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조선파병명령을 받은 후, 이홍장은 휘하의 야전부대에서 선발한다. 그가 선발한 부대를 보면, 주로 근대화정도가 높고, 군기가 상대적으로 좋았던 직예연군부대의 인원들이다. 그리고 직예제독 섭지초와 태원진총독 섭사성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한다. 그리고 윤선초상국에서 상선을 보내어 이들을 조선수도 한성의 남쪽에 있는 아산에 상륙시킨다.
선두부대로서, 1894년 6월 6일, 섭사성은 고북구연군의 우영(右營), 무의군 부중영(副中營), 무의군 노전영포대(老前營砲隊)등 3무리의 부대(합계 900명), 및 임시로 부대에 배치된 천진무비학당 학생 10명을 지휘하여 천진 대고에서 "도남(圖南)"이라는 상선을 탄다. 이들이 가져간 무기는 4문의 60밀리 금릉기기국이 만든 산포와 탄약차 그리고 800개의 포탄, 21만발의 소총탄, 90필의 군마, 98개의 영방텐트, 40개의 식사용구리솥도 동시에 배에 싣는다. 그후 섭지초는 6월 8일 주력부대를 이끌고 "해안(海晏)", "해정(海定)"의 두 배를 타고 출발한다. 정정연군(正定練軍)의 중영, 우영, 전영, 좌영이 포함되고, 섭지초의 직할 기병소대, 막료관원이 있었다. 동시에 25명의 산해관무비학당의 학생을 추가했다(합계 1555명), 이들은 대포, 텐트등 물자외에 회군에 배치되는 특별한 화기인 금릉기기국이 만든 콩그리브로켓(Congreve Rocket) 200발과 발사대 2개를 가져갔다.
섭사성
재미있는 일이라면, 선두부대 지휘관 섭사성은 출발부터 문자기록 <동정일기(東征日記)>를 써서 조선에 병력을 이끌고 들어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군이 조선에 도착한 후에는 완전히 상국(上國)의 천병(天兵)이 내려온 것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농민반란군을 소탕하는 것은 서두르지 않았고, 오히려 도처에 포고를 붙여 백성들은 안심시키고, 심지어 전쟁이재민들에게 백성 한집단 2은원의 구휼금까지 지급했다. 이런 천조부대에 대하여, 조선의 백성들이 두 손들고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조선의 지방관리들도 그들을 잘 대접한다. 농민반란군은 한편으로 상국군대의 대포에 겁을 먹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을로 넘어가면서 농사일에 바쁜 계절이 다가와서 거의 즉시 사라지게 된다. 그후 조선파병군대는 조선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을 자축하는 분위기에 빠진다. <동정일기>에는 "한(韓)의 관리가 악기(樂妓)를 데리고 마중나왔다." "악기에게 술을 따르게 했다"는 류의 기록이 있다. 한번은 연회에서 섭사성이 요청을 받고 시를 짓기도 한다:
만송창취옹층성(萬松蒼翠擁層城), 위정낭연차주병(爲靖狼煙駐此兵)
관검우등강상각(冠劍偶登江上閣), 준뢰다감사군정(樽罍多感使君情)
좌중가무연홍분(座中假貿憐紅粉), 함외운산접옥경(檻外雲山接玉京)
극목해천증기상(極目海天增氣象), 정기족족한가영(旌旗簇簇漢家營)
그러나, 바로 이때, 조선의 국면이 급변했다. 청왕조가 조선반도에 병력을 출동시킨 것은 실제로 일본 메이지정부의 계산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를 기화로 사건을 만들 생각이었다. 6월 5일 성립된 천황을 중심으로 하녀 전시대본영(戰時大本營)은 조선에 병력을 출동시켜 중국과 조선을 침략하는 전쟁을 도발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일본에서 출동시킨 선두부대는 제5사단 산하의 히로시마(廣島) 우품항(宇品港)의 제9여단이다. 이 부대는 6월 5일 오후에 동원되어, 임시로 배치된 야전병원, 병참, 치중대, 위생대등으로 혼성제9여단을 구성한다. 총병력은 7,120명으로 승용마 297필(기병용), 운송용말448필(포병용과 치중병용), 2차에 걸쳐 우품항에서 출발하여 조선 인천항에 상륙한다. 제1차는 9척의 운송선으로 6월 15일 상륙하며, 제2차는 8척의 운송선으로 6월 27일 상륙한다.
일본육군이 도착한 후, 즉시 인천에서 조선의 수도 한성간의 요충지를 점령한다. 일본정부의 외교와 협력하여 계속 압박한다. 조선에 있던 섭지초, 섭사성부대의 중국육군은 병력면에서 열세에 처한다. 그리하여 한성이남의 아산(牙山)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동시에 중국내에서 해상운송으로 병력을 지원한다.
7월 23일, 일본군 혼성여단부대는 조선왕궁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국왕을 압박하여 괴뢰정부를 설립하고, 정식으로 전쟁을 개시한다. 7월 25일에 이르러, 일본해군군함은 조선의 아산만밖에서 북양해군전함을 공격하고, 중국이 빌린 영국상선 '고승(高昇)'호를 격침시킨다. 역사상 풍도해전(豊島海戰)이라 불리는 전투이다. "고승"호는 당시 직예회군, 인자군과 연군의승전영의 아산증원군을 운송하고 있었다. 일본순양함 "나니와(浪速)"가 위협하며 일본으로 갈 것을 요구하였으니, 육군관병이 이를 거절하자, 최종적으로 '고승'호는 '나니와'에 의해 격침당한다. 1,119명의 관병중 겨우 252명만이 목숨을 부지한다.
일본군이 조선왕궁을 점령한 후, 일본군혼성여단의 주력 4천여명이 남진을 시작한다. 아산일대의 청군육군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이 움직임은 청군이 파견한 정찰기병에 발견되었고, 섭지초와 섭사성은 협의를 한 후, 각각 병력을 나누어 방어하기로 한다. 7월 26일 새벽2시, 섭사성이 이끄는 부대인 고북구연군 우영, 무의군 부중영, 무의군 노전영포대등 3개 지대의 육군은 아산에서 북상하여, 한성과 아산 사이의 성환역(成歡驛)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27일, 천진에서 해운으로 아산에 증원온 강자강(江自康)이 이끄는 직예회군, 인자군2영이 성환에 도착해 방어를 도운다. 28일 새벽, 섭지초는 성환으로 도착해 섭사성과 협의한다. 그리고 스스로 아무런 험준한 장애물이 없는 아산을 포기하기로 한다. 섭지초는 1영을 이글고 전체군의 주요 물자보급기지를 성환 남쪽에 있는 공주에 둔다. 나머지 부대는 모두 성환에 배속시켜 섭사성의 지휘를 받게 하며, 남하하는 일본군을 막고자 했다.
작은 도시 성환은 북쪽의 한성에 남쪽의 전주로 향하는 요충지에 있고, 역참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반도는 구릉, 산맥이 많은데, 성환은 마침 산 속에 위치하고 있다. 남북을 관통하는 역도(驛道)가 성환에 도착했을 때, 아주 좁은 협곡으로 들어가게 된다. 성환의 동서 양쪽은 많은 산이 둘러싸고 있다. 서쪽의 산지는 우헐리(牛歇里)일대이고, 동쪽은 해발92미터의 월봉산(月峰山)을 주봉으로 하는 산들이 있다. 형세는 아주 험준하고 중요하다. 성환진의 북방 산골짜기 밖에는 안성천(安城川)이라는 강이 흐른다. 강의 양쪽은 모두 진흙탕인 논이다. 강위에는 안성도(安城渡)라고 부르는 교량이 있어, 남북역도에서 반드시 지나가야할 인후이다.
섭사성은 주력부대를 성환의 동서양쪽의 산지에 배치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요도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외에 안성도 일대의 독특한 지리상태도 고려하여, 섭사성은 천진무비학당학생 우광흔(于光炘)등 전술수양이 비교적 좋은 수십명의 관병을 안성도 동남의 가룡리(佳龍里) 마을안에 매복시킨다. 이 전투의 대체적인 구상은 일본군이 안성교를 건너와 논으로 들어올 때,가룡리촌에 매복해 있던 저격수가 저격을 통해 행군을 지연시킨다. 이때 성환 고지의 포병이 포격을 진행한다. 일단 성공하면, 성환의 동서 양측의 주력보병이 일본군을 포위섬멸한다. 만일 일본군이 대군을 이끌고 강을 넘지 않으면, 산골짜기의 역도를 따라 남으로 내려오는 일본군이 성환에 가까워지면 산골짜기 양측의 고지대에 있던 청군의 협공을 받게 될 것이다.
1894년 7월 29일 새벽, 일본군은 좌우 양로로 나누어 출발한다. 좌익대가 주공부대이고, 몰래 청군방어선의 동쪽을 우회한다. 거짓공격을 담당하는 일본군 우익대는 요란하게 역도를 따라 전진한다. 선봉부대가 안성천의 교량을 건넌 후 진흙탕인 논에 바진다. 가룡리촌에서 약 30미터가량 접근했을 때, 마을에 매복해 있던 청군이 저격을 시작한다. 일본군내에서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선봉부대가 가룡리밖에서 저지당하는 것을 보고, 일본 우익대의 주력은 즉시 가룡리촌의 측면으로 돌아가서 포위한다. 논을 지나갈 때, 생각지도 못하게 이곳의 논에는 이미 청군이 물을 넣어놓았다. 그리하여 위험한 습지가 되어 있었다. 보병중위 시산공조(時山龔造)등 23명이 익사한다. 새벽 3시 30분, 일본군 우익대의 주력이 마침내 논을 지나 마을의 청군에 대해 협공태세를 취한다. 전투는 새벽4시까지 계속된다. 가룡리촌에 매복해 있던 20여명의 청군은 절반이상이 희생되고, 결국 버티지 못하고 퇴각한다. 무비학당의 학생 우광흔도 전투중에 희생당한다.
청군의 주의력이 가룡리촌부근에 집중되어 있을 때, 일본군 좌익대의 선봉부대가 우회하여 청군 월봉산 주진지 부근으로 다가선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청군 무위군 노전영의 초소선과 교전이 벌어진다. 5시 30분경 일본군 포병부대는 청군월봉산부근에 진지를 구축하고, 포격을 시작하며 보병작전을 지원한다. 청군진지는 일본군의 포화 속에 연이어 붕괴된다. 일본군 포병부대는 계속하여 진지를 옮겨가면서 보병과 같이 전진한다. 월봉산부근의 청군진지는 하나하나 격파당한다. 원래 역도서쪽의 우갈리 고지의 포병진지에서 독전하던 섭사성은 역도 동쪽이 버티지 못하는 것을 보고, 즉시 수백의 병사를 이끌고 동쪽 진지로 가서 지원, 독전한다. 월봉산 부근의 청군의 패색은 약간 만회된다. 그러나 오전 7시 월봉산 고지를 일본군에 함락당하고, 역도 동쪽의 청군부대는 스스로 궤멸하여 퇴각한다. 섭사성은 어쩔 수 없이 부대를 이끌고 전주 방향으로 퇴각한다.
성환전투는 오전 8시까지 진행되었고, 승부는 이미 결정났다. 일본군은 청군이 서남쪽의 아산으로 퇴각할 것이라 판단하고 아산방향으로 추격한다. 그러나 사실상 섭사성이 이끄는 성환의 패잔병은 성환역도를 따라 남하하여, 공주로 가서 섭지초와 회합하고자 했다. 공주에 도착할 때쯤 섭지초의 부대가 강을 넘어 북상하는 것을 발견한다. 섭사성과 섭지초는 만나서 협의를 하고, "공주는 지켜낼 수 없다. 차라리 길을 우회하여 평양으로 가서 대군을 모아 다시 공격하자"고 결정한다. 섭지초, 섭사성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조선동해안의 산간지역을 우회하여 평양방향으로 힘들게 행군한다.
일본군의 전리품
섭지초의 관명이 적힌 깃발과 조선국왕깃발
성환전투는 청일전쟁에서 발생한 제1차육상전투이다. 중국,일본 쌍방의 육군작전특징이 이 전투에 그대로 드러난다. 일본육군의 전술은 우회타법이다. 거짓공격으로 적군을 유인하고, 견제하면서, 나머지 1로 혹은 다로로 우회하여 적군을 포위공격한다. 그리고 일본군의 포병은 극히 기민하게 운용한다. 전투중에 진지를 이동할 수 있고, 보병과 함께 다니면서 행동한다. 청군을 보면, 비록 지형지물을 이용할 줄 알았지만, 전투의지가 굳건하지 못했고, 일단 측익 혹은 후익이 포위되는 위험한 지경이 되면 왕왕 전체 전선이 무너져버린다. 일본군의 전법은 그후 마법처럼 청일전쟁내내 계속하여 시도되고 계속하여 성공을 거둔다.
1894년 8월 1일, 청왕조와 일본메이지정부가 상호 선전포고를 하고, 청일전쟁이 정식으로 개시된다.
청왕조는 전쟁의 전략배치를 완전히 중국고대전통적인 사고방식대로 진행한다. 즉, 각지방에서 전투가 발생하면, 먼저 먼저 해당지역의 수비책임이 있는 지방군정장관이 현지의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상대한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은, 북양지구의 국제사무이다. 이는 북양대신의 책임이다. 그리하여 북양지구에서 대외군사행동이 발생한 것이므로, 자연히 이 지구의 군대가 가장 먼저 차출된다. 순서에 따라, 청왕조는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북양지구의 해군과 육군을 동원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한다. 다른 연해의 성에서는 그저 일본전함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뿐이다.
성환전투에서 패배하고, 아산을 포기한 심각한 국면에 대하여, 이홍장은 조선반도의 남부를 포기하고, 병력을 조선북부의 중요도시 평양에 집결시키기로 결정한다. 대동강의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면, 일본군이 계속하여 북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1894년 7월하순에서 8월상순까지, 이홍장은 연속하여 북양연선의 육군을 평양으로 보내어 보강한다. 그중 직예지구의 최대야전군병단인 성군(盛軍, 성경 즉 지금의 심양의 주요야전군부대)이 있다. 봉군(奉軍), 정변군(靖邊軍), 성자연군(盛字聯軍)도 모두 평양으로 간다. 원래 여순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의군(毅軍)도 일부를 내어 아산에서 북상하는 섭지초, 섭사성의 부대와 합쳐 근 2만명의 대부대를 끌어모으게 된다. 직예제독 섭지초가 총통(총사령관)을 맡는다.
이 군대는 이홍장 내지 당시 중국의 모든 야전육군의 정예이므로,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된다. 다만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여러가지 패배의 조짐이 나타난다. 당시의 평양성안에서 상연되는 것은 신과 구의 모순과 갈등이었다. 오래된 평양성벽에 청나라군대의 신식 케이틀린기관총이 놓여지고, 각 부대간에는 전화선이 연결된다. 평양과 천진간에도 유선전보를 통해 빠르게 통신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청군의 보급은 우마차를 통하여 압록강변의 의주에서 천천히 평양으로 운송되어 왔다. 더욱 심한 점이라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근대화된 육군이 운집했지만, 이들 청군의 배후에는 구식의 군수체계가 있었다. 주둔지가 천진인 성군의 군량, 무기장비는 모두 천진에서 평양으로 운송했다. 의군의 군수물자보장은 여순구에서 했다. 봉군등 부대는 봉천에서 오는 공급을 기다려야 했다. 성안에 주둔한 청군육군은 파벌과 계파에 따라 나누어서 지켰고, 장령들간에는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일본군 방면을 보면, 8월부터 계속하여 조선반도로 육군을 수송한다. 제5사단과 제3사단으로 대병단을 구성한다. 제1군(第一軍). 이 부대는 조선반도 침략작전을 책임졌다. 9월 15일, 일본육군이 평양공격전투를 시작한다. 그들이 취한 방식은 역시 1로는 거짓공격을 담당하고, 다른 여러 로가 우회포위하는 전법이다. 청군의 주력은 일본군이 남에서 북으로 오는 거짓공격방향에 미혹되어, 성군과 의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를 벌였다. 성군총통 위여귀는 심지어 직접 전선으로 나가서 적을 맞이했고, 기병마대를 데려와서 대동강 남쪽으로 돌진하며, 일본군의 3단계 장어진지를 연이어 빼앗기도 했다. 청군은 평양성남쪽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거의 완전히 제압하는 동시에, 우회포위에 나선 일본군이 돌연 평양성의 동, 서, 북의 세개 방향에 출현한다. 최종적으로 봉군이 수비하던 평양북성의 외성이 일본군에 돌파당한다. 고지인 모란대(牡丹臺, 지금의 모란봉)를 일본군에 점령당한다. 전투직전 돌연 중풍을 맞았던 봉군통령 좌보귀는 위급한 순간에 정대화령과 황마괘를 바꿔입고 친히 성벽위로 올라가 기관포를 조작하며 지휘하면서 사기를 고무시켰으나, 불행히도 전사하고 만다. 그는 청군육군에서 청일전쟁때 희생당한 최고위장령이 된다.
고지를 잃고, 평양성이 일본군에 포위당한 모습이 나타나자, 평양성내의 탄약보급에도 즉시 문제가 생긴다. 청군총통 섭지초는 여러 장수와 상의한 후, 일본군에게 성을 내주고 병력을 안전하게 북으로 물리자고 하게 된다. 1894년 9월 15일 오후 4시 40분경, 평양성의 각 성벽위에는 백기가 올라온다. 조선의 평안도관찰사, 평양감사 민병석(閔丙奭)이 청군을 대표하여, 현무문방향에서 일본군 원산(元山)지대의 초소를 찾아 청군의 휴전서신을 전달한다. 일본군측은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아 즉시 회신하지 못하고, 청군이 성을 넘겨주겠다는 의사가 바로 일본군사령부에 전달되지 못한다. 청군은 성을 포기하겠다는 서신을 보냈으므로 평안무사할 것이라고 여기고, 회신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날 밤 9시에 북측의 정해문, 칠성문을 열고 전군이 비를 맞으면서 나가 의주로 가는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철수한다. 그러나 일본군 원산지대의 경계선이 근접했을 때,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고, 청군은 아무런 방비없이 대오가 혼란에 빠진다. 사람과 말이 서로를 짓밟으며 사상자가 난무하게 된다.
평양성에서 도망친 청군은 9월 17일 조선 안주(安州)에 도착한다. 이날 오전, 북양해군의 호위하에 대련만에서 대동구(大東溝)(지금의 요녕 동항시)으로 간 평양에 지원가던 청군 유성휴의 명군(銘軍)은 상륙을 마친다. 정오, 대동구밖의 해상경계를 서던 북양해군주력과 일본해군주력이 마주친다. 여기에서 황해대해전이 벌어진다. 막 상륙한 유성휴의 명군은 원래 대련만포대의 수비군이다. 임시로 야전군으로 차출되어 조선반도로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상륙후에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 평양을 이미 빼앗겼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하여 그저 압록강변에서 대기해야 했다. 9월 21일, 평양의 패잔병들이 의주(義州)에 도착한다. 섭지초, 위여귀등은 도중에 흩어졌던 부대를 끌어모은다. 23일 압록강을 건너 안동(安東, 단동)에 도착하여, 명군과 함께 압록강변에 국경방어선을 배치한다. 조선반도는 모두 일본군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평양전투에서, 청군육군이 패배하면서 조선전장의 국면이 궤멸되었을 뿐아니라, 이번 전투에 청군은 거의 모든 주력부대를 투입하였으므로, 전투패배와 더불어, 여러 해동안 훈련시킨 군대의 절반을 잃게 된다. 이제 경궁지조(驚弓之鳥)가 되어, 청일전쟁의 전장에서 청군은 더 이상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육군을 갖지 못하게 된다.
해상의 황해해전과 육상의 평양전투는 청일전쟁의 분수령과 같다. 그후 전장의 국면악화는 날이갈수록 심해진다.
청일전쟁발발전에 일본대본영에서 미리 계획했던 전략은 이번 전투의 결정적인 전투는 당연히 중국발해만내의 북대하일대에서 상륙을 실시하고, 천진을 탈취하고, 직접 병력을 하북평원으로 진입시키며, 소위 직예평원결전을 일으켜, 일거에 중국육군주력을 섬멸시키고, 직접 북경성까지 병력을 밀고 들어가, 청왕조와 조약을 체결하게 압박하거나, 혹은 아예 북경을 점령해 버리는 것이었다. 9월 17일, 황해해전이 끝나고, 일본해군은 해상에서 우세를 얻어낸다. 이때는 이미 늦가을이어서, 당시 서방육군의 습관에 따르면 겨울에는 전투를 하지 않고, 동영(冬營)에 들어가는 것이 상식이다. 일본대본영은 봄이 되면 다시 직예평원에서 결전을 벌이기고 결정하고, 가을겨울환절기에 먼저 직예평원에서 결전을 하는데 중대한 위협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즉, 실력이 이미 약화된 여러 북양해군을 철저히 제거함으로써 향후 발해만의 병력운송에서의 안전을 도모하려 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황해해전이후 북양해군의 군함이 집중적으로 정박되어 있던 유지보수기지인 여순이 일본대본영의 중요목표가 된다. 9월 21일 일본대본영은 병단을 편성하여, 제1사단 및 제6사단 관할하의 제12여단의 기초위에 편성된 제12혼성여단을 공동으로 구성한다.
청군측을 보면, 청나라정부는 압록강국경을 죽기로 사수하는 전략을 취한다. 즉 여순에 방어하는 송경(宋慶)의 의군(毅軍)주력을 압록강변으로 이동시킨다. 동시에 흑룡강장군 이극당아(伊克唐阿)의 동북연군을 압록강방어선에 합류하게 한다. 송경을 북양군무방판으로 임명하여, 압록강전선의 육군을 총지휘하게 한다.
그러나, 청군의 예상밖으로, 1894년 10월 24일, 일본육군은 2개방향으로 돌연 공격을 개시한다. 그날, 일본제1군은 청군의 압록강방어선을 돌파하고, 제2군은 해군의 호위하에 요동(遼東)의 화원구(花園口)에 상륙한다. 동시에 양쪽방향에서 적을 맞지하게 되자, 이홍장과 송경은 일본군의 의도를 판단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화원구에 상륙한 일본군은 북상하여 압록강방면의 일본군과 협력하려는 것으로 오인했다.
청일전쟁의 전화는 여기에서 돌연 중국경내로 번진다. 그후 육상전투는 2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개전된다. 일본 제2군은 화원구에 상륙한 후, 요동해안을 따라 무인지경으로 진군한다. 11월 6일 요동의 중요도시 금주(金州)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여전히 1로는 거짓공격, 여러 로는 우회하는 전법이다. 금주성은 그날로 점령당한다. 금주 부근의 대련만포대는 수비군 명군이 이미 야전군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에, 포대방어를 임시로 모집한 신병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전투를 앞두고, 급히 오은 회자군(懷字軍)은 대포를 조작할 줄도 몰랐다. 이어 금주를 잃고, 포대도 포기한다. 11월 21일, 일본의 제2군은 북양해군의 중요군항 여순구를 함락시키고, 참혹한 도살을 전개한다. 여순의 수비군과 백성 2만여명이 피살당한다.
일본제1군은 압록강 방어선을 돌파한 후, 봉천(심양)방면으로 진격했다. 도중에 구련성(九連城), 봉황성(鳳凰城), 해성(海城), 수암(岫巖)등 동북의 중요도시를 점령한다. 오늘날의 요녕 본계에서 안산에 이르는 일선까지 밀고 들어오면서, 봉천의 문호 요양(遼陽)이 위기에 처한다. 청정부는 북양지구의 육군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것을 보자, 상군(湘軍)으로 회군(淮軍)을 대체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상군의 장수이며, 양강총독인 유곤일(劉坤一)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관내외군대를 지휘하게 하고, 동북전장의 전투를 책임지게 한다. 호남순무 오대징(吳大瀓)은 직접 병력을 이끌고 강소, 호북, 호남등지에서 데려온 용영 상군부대를 속속 북상시킨다. 총수는 근 100영에 달한다. 그러나 이들 부대는 훈련이건 장비이건 모두 북양지구의 육군보다 못했다. 많은 부대는 급히 구성되다보니 무기가 부족했고, 훈련도 되지 않아, 오합지중이었다. 형세가 계속 악화하는 동북전장에서 날씨가 추워지면서, 일본제1군은 전선을 안정시키고 동계숙영에 들어간다. 다음 해 봄을 기다려 다시 전투를 재개하겠다는 것이다. 상군, 송경의 북양육군, 이극당아의 동북연군으로 구성된 청군육군은 이를 기회로 보았다. 1895년초 해성에 대한 반격전을 전개한다. 의도는 일본이 점령한 해성을 되찾는 것이었다.
청군은 전후로 5차의 전투를 일으킨다. 그중 제1차는 이극당아가 이끄는 동북연군등 1만여명이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끝난다. 청군은 모두 수백명이 사망하고, 일본군은 3명이 사망한다; 제2차는 동북연군과 송경의 북양육군 2만여명이 공격한 것으로, 청군의 사망자는 근 천명에 이르렀으나, 일본군은 5명이 사망한다. 제3차는 상군이 전투에 가담하여 총병력은 3만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여전히 실패로 끝난다. 청군은 수백명이 사망하고, 일본군은 3명이 사망한다. 제4차로 청군이 다시 공격을 감행하나 여전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사망자는 청군이 수백명, 일본군이 2명이었다. 1895년 2월 27일에 이르러, 동북전장의 청군이 병력을 집중하여 제5차 해성공성전을 진행을 진행할 때, 일본군제3사단이 대거 반격을 기새한다. 각로의 청군은 버티지 못하고 퇴각한다. 일본군은 계속하여 안산(鞍山), 우장(牛莊), 전장대(田莊臺), 영구(營口)를 점령한다. 그중 상군은 우장에서 수천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고 더 이상 힘을 내지 못하게 된다. 동북전장의 북양육군은 전장대에서 큰 피해를 입는다. 이렇게 하여 관외 동북전장의 청나라육군은 전면적인 패배에 직면한다.
요동전투에서 일본대본영은 제2군이 여순에서 북양해군을 섬멸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군단을 조직한다. 즉 산동작전군(山東作戰軍)이다. 제2사단, 제6사단으로 구성했고, 그 의도는 북양해군의 최후군항인 위해위(威海衛)를 점령함으로써, 1895년 봄이 도래하기 전에 북양해군을 섬멸시키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1895년 1월 20일, 일본 산동작전군이 산동반도의 동쪽끝 영성만(榮成灣)해안으로 상륙한다. 곧이어 영성현성을 점령하고, 위해위로 진군한다. 1월 30일, 병력이 열세인 위해수비군의 수군, 공군은 위해남안포대군을 잃고, 2월 2일 일본군이 위해위성을 점령한다. 얼마 후 위해북안포대군도 점령하여, 해상의 일본함대가 북양해군이 소재한 유공도(劉公島)와 위해만에 대해 육해협공을 형성한다. 결국 북양해군은 2월 14일 패전하고, 2월 17일 일본해군이 유공도로 진입하며, 북양해군은 전멸하게 된다.
북양해군이 전멸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청일전쟁의 육상전투도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었다. 청왕조는 계속하여 귀주, 광서, 운남, 산서등 변방지역에서 군대를 북경으로 데려와 북경을 수비하고자 한다. 오합지중인 상군, 동북연군에 비하여 이들 내륙과 변방지구에서 급히 모집한 군대는 더더욱 질이 떨어졌다. 군복도 부족하고, 훈련도 되어 있지 않으며, 무기도 없었다. 당시 심지어 어떤 언관은 고대의 연의이야기를 인용하며 천진기기국등에서 등갑(藤甲, 등나무갑옷)을 만들어 등갑군을 만들어 일본군을 막아내자고 제안하기까지 한다. 이런 류의 형편없는 군대를 북경으로 오도록 재촉하면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를 당당한 조정에서 논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청왕조의 군사력은 이미 바닥이 났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 기이한 점은 어떻게 각지방에서 병력자원을 긁어모아 일본군에 대항할지 논의하면서도, 거의 모든 사람이 청왕조의 정규군인 팔기와 녹영을 내보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895년 3월 5일, 북양대신 이홍장이 명을 받고 일본으로 가서 담판을 개시한다. 청일전쟁의 역사는 극히 잔혹한 시모노세키조약의 한페이지로 들어간다. 사상유례없이 굴욕적인 외교활동의 배후에는 사실상 청일전쟁 육상전투의 전면적인 패배가 그 배경이다. 그때까지 청왕조가 가용할 수 있는 육군은 이미 거의 남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의 7개 야전사단중에서 겨우 5개 사단만 사용했을 뿐이다(일본은 국내에서 여덟전째 야전사단 즉 제7사단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근위사단등 최후의 직예평원결전에 투입하려던 부대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모노세키조약의 체결로 이는 실행되지 않는다. 나중에 대만섬에서, 침략에 반항하는 대만군민들이 다시 비장한 보대(保臺)투쟁을 전개했고, 타이페이에서 타이난까지 계속 밀려났다. 이는 청일전쟁의 마지막 마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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