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1351

정사(正史)로 본 여포(呂布) 글: 역사춘추망(歷史春秋網) '삼성가노(三姓家奴)'는 여포에게 덧씌워진 최대의 오점이다. 여기에 반복무상(反復無常, 이랬다 저랬다 변덕스럽다), 배신기의(背信棄義,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 유리시시(唯利是視, 이익만 쳐다본다), 용이무모(勇而無謀, 용맹하나 지모가 없다), 애제장부(愛諸將婦, 다른 장수의 처를 좋아했다)등등. 거의 모든 나쁜 말들은 모두 그에게 붙여졌다. 그러나, 정사를 분석해보면, 이 모든 것은 '낙정하석(落井下石,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의 혐의가 짙다. 여포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그는 계속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 이용당하다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짓밟혀 죽었는데, 죽고 난 후에도 천년간 여러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그는 삼국시대 장수들 중에서 가장 비운의 장수라 할 .. 2021. 10. 25.
시진핑의 3대 실패사례: 6중전회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글: 장천량(章天亮) 최근에 연속으로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마윈의 출국이다. 이건 아마도 겉으로 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배후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혹시 중공의 함정은 아닐까? 둘은 베이징이 최근에 교육시장을 외자에 개방한 것이다. 셋은 건물세를 징수하려는 계획이 반대로 저지된 것이다. 이것들은 시진핑의 뜻을 거스러는 것들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시진핑이 중대한 좌절을 맞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시진핑의 연약함, 패배인정 혹은 거래하겠다는 의사표시일까? 은 의 보도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마윈이 월초에 홍콩에 몸을 드러냈다. 우리는 알고 있다. 마윈은 작년 연말에 사건이 벌어진 후, 중간에 잠깐 한두번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기는 하지만, 대.. 2021. 10. 21.
조조(曹操)의 후계자다툼(III): 조비 vs 조식 글: 의사리(衣賜履) 조식의 곁에는 주로 3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의 정의(丁儀), 한명은 정이(丁廙)로 둘은 형제간이다; 그리고 또 한명은 총명하기 그지없는 양수(楊修)이다. 정씨형제의 부친은 정충(丁冲)으로, 패군(沛郡, 안휘성 회북시) 사람이다. 일찌감치 조조와의 관계가 아주 좋았다. 정충은 조조가 한헌제 유협을 맞이하여 '천자를 끼고 제후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계획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아주 적극적인 역할을 한 바 있다. 조조는 정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정의가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다는 것은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딸을 그에게 시집보낼 생각을 하고, 조비에게 의견을 묻는다. 그때 조비는 이렇게 대답한다: "부친! 제 생각에 비록 남재여모(男才女貌), 즉 남자는 재주가 뛰어나야 하고, 여자.. 2021. 10. 20.
조조(曹操)의 후계자다툼(II): 조비 vs 조식 글: 의사리(衣賜履) ​ 211년 정월, 한헌제 유협이 조서를 내려, 조조의 세자 조비를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에 임명하고, 관속(官屬)을 둘 수 있게 해서, 승상 조조의 부수(副手)로서의 역할을 하게 한다. 부승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 (이 일을 통하여, 필자는 이전에 판단한 바 있다. 조조는 이미 조비를 자신의 후계자로 확정한 것이다) ​ 부승상으로서, 개부(開府)도 할 수 있으니, 이론적으로는 태자의 지위는 조비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조식이 급속히 부상하여, 조비에게 큰 위협이 된다. 사서에 따르면 조조는 성격이 기민하고, 능력이 뛰어나며, 재능이 특출났고, 민첩하며 지혜가 많아, 조조가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 우리는 여기서 조식의 재능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 당시.. 2021. 10. 19.
<시중쉰(習仲勳)의 가풍>: 내부투쟁의 신호탄인가? 글: 종원(鍾原) 중공당매체 신화사는 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당연히 또 다른 각도에서 시진핑을 치켜세우기 위한 것이다. '근홍묘정(根紅苗正)'할 뿐아니라, '영수'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말하기 위함이아. 19기 6중전회직전에 이는 정식으로 시진핑이 연임을 원한다는 신호로 봐야 할 것이고, 시진핑진영이 정적들에게 패를 꺼내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라고 봐야 할 것이다. 10월 15일은 왜 특수한가? 신화사가 10월 15일이라는 날을 택해서 시중쉰에 관한 문장을 내보낸 것은 시중쉰이 1913년 10월 15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시중쉰 탄생 108주년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시중쉰을 칭송하는 것은 시진핑을 칭송하기 위함이다. 문장의 시작부분에서 "2001년 10월 15일,.. 2021. 10. 17.
광서제의 죽음(3): 광서제와 서태후의 은원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대청의 첫손가락 꼽히는 권력자로서 국가관리층면이나, 개인은원이나 살인동기나 실행능력을 볼 때, 서태후가 최종집행자일 것이다. 그녀로서는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광서제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실패할 위험도 없다. 첫째, 국가관리층면을 보자. 광서제가 이끄는 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그는 일찌감치 폐인이 되었다. 심지어 상징적인 대우마저도 크게 줄어든다. 백일유신시기에 그는 조조를 핍박하는 한헌제와 같았다. 힘이 없는 황제는 되지 않겠다고 물러나겠다고까지 밀어부쳤다. 서태후는 그러나 네가 황제로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열강이 막지만 않았다면 일찌감치 황위를 바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죽을 때 부의를 황제로 결정했다. 국가관리층면에서 광서제가 할 일은 없었다. 살아남겨두어도.. 2021. 9. 16.
광서제의 죽음(2): 광서제는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까?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 각종 광서제의 사망에 대한 전설중에서, 주류는 3가지이다. 이연영살해설, 원세개살해설, 서태후살해설. 어쨌든 그의 죽음은 너무나 기이하고 수수께끼였었다. ​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전설중 신뢰도가 가장 낮은 이연영살해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 전문적으로 소개할 필요도 없이, 청나라궁중드라마를 보았던 사람이라면, 모두 이연영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청나라의 스타태감이다. 그는 서태후 곁에서 잘나갔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오른팔 왼팔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서태후를 미워했던 광서제는 죽기 전에 그를 블랙리스트에 올린 것이다. 어쨌든 곁에서 행세하는 주구나 방흉이 더욱 미운 법이다. 그래서 자신의 흉험한 처지를 알게 된 이연영이 그 정보를 서태후에게 알리고, .. 2021. 9. 16.
광서제의 죽음(1): 서태후에 유폐당한 광서제는 어떻게 죽었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담사동(譚嗣同), 강유위(康有爲)와 무술변법의 '삼위일체'의 주장으로서, 그들은 성공과 실패를 함께 할 운명이 되었다. 과연 '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담사동은 죽임을 당하고, 강유위는 망명했으며, 홀로 남아서 죽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게된 운나쁜 광서제는 변법실패의 책임을 혼자서 지게 돈다. 사갈처럼 악독한 친이모(서태후)에게 영대(瀛臺)에 유폐되어 힘들게 10년을 살았다. 원래는 서태후가 죽으면서 그는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데, 결국 미스테리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천고의 수수께끼가 된다. 가경제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두 외인들은 알 수 없는 사인불명이었다. 활실에 태어나면 자유란 없는 것이다. 원래 청나라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던 그는 대청을 회생시킬.. 2021. 9. 16.
누가 서태후로 하여금 서방열강에 선전포고하게 하였는가? 글: 후유(煦濡) 1900년 6월 21일, 서태후는 광서제의 명의로 각국에 선전포고하는 조서를 내린다. 서태후는 서방열강의 여러가지 죄행을 나열했다. "삼십년동안, 우리나라가 인자하고 후덕하게 다독거리는 것을 빌미로 그들은 갈수록 발호하며 우리나라를 핍박하며, 우리의 토지를 침범하고, 우리의 인민을 유린하고, 우리의 재물을 강탈해갔다." "그들은 스스로 교화지국이라고 하면서 예의없이 횡행하고 병력과 무기의 날카로움을 믿고 이렇게까지 했다." 서태후는 이렇게 분노를 표시한 후, 마지막에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선전구호를 내놓는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만고에 수치를 남기기보다 들고 일어나 자웅을 겨뤄보아야 한다!" 이 선전포고를 전환점으로 하여, 청정부는 정식으로 서방열강과 갈라지고, 중국과 서방열강의 전.. 2021. 6. 22.
왕후닝이 교체될 것이라는 6가지 신호 글: 왕우군(王友群) 현임 중공 정치국상위, 이데올로기 총책임자 왕후닝은 최근 몇년간 중공의 급격한 좌경화, 문혁회귀의 핵심인물이다. 여러가지 흔적을 보면, 왕후닝의 여러 조치는 인심을 얻지 못했고, 중공20대의 인사배치때 그의 지위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것이다. 왕후닝은 1995년 장쩌민, 쩡칭홍에 의해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베이징 중남해로 발탁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쩌민이 중공당수이고, 쩡칭홍은 중앙판공청 주임이다. 1995년부터 2021년까지 26년동안, 왕후닝은 3대의 중공당수(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을 모셨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후진타오는 중공당수를 10년간 맡았는데, 그는 단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고,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장쩌민, 쩡칭홍이 결정했다. 그러므로, 199.. 2021.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