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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시진핑)

<시중쉰(習仲勳)의 가풍>: 내부투쟁의 신호탄인가?

by 중은우시 2021. 10. 17.

글: 종원(鍾原)

 

중공당매체 신화사는 <시중귄의 가풍>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당연히 또 다른 각도에서 시진핑을 치켜세우기 위한 것이다. '근홍묘정(根紅苗正)'할 뿐아니라, '영수'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말하기 위함이아. 19기 6중전회직전에 이는 정식으로 시진핑이 연임을 원한다는 신호로 봐야 할 것이고, 시진핑진영이 정적들에게 패를 꺼내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라고 봐야 할 것이다.

 

10월 15일은 왜 특수한가?

 

신화사가 10월 15일이라는 날을 택해서 시중쉰에 관한 문장을 내보낸 것은 시중쉰이 1913년 10월 15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시중쉰 탄생 108주년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시중쉰을 칭송하는 것은 시진핑을 칭송하기 위함이다. 문장의 시작부분에서 "2001년 10월 15일, 당시 푸젠성 성장이던 시진핑은 88세의 미수(米壽)를 맞은 부친 시중쉰에게 깊은 정과 대의를 담은 '배수신(拜壽信)'을 썼다"라고 적었다.

 

이 서신에서 시진핑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이런 교육 하에서,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길렀다. 이는 모범이 되는 볼세비키와 공산당인의 가풍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런 좋은 가풍은 대대로 전해져야 한다."

 

이런 축수사는 아마도 중공 홍색가문내부의 특유한 언어일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아주 붉고, 아주 마르크스레닌스럽지만 이때 이런 글을 쓴 의도는 아들이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계속하여 강산을 차지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사는 또한 이런 말도 했다. 시진핑이 말한 "이런 좋은 가풍", "그것은 중국의 우수한 전통문화가 스며들어 있을 뿐아니라, '볼세비키와 공산당인' 특유의 당성원칙과 정치낙인도 찍혀 있다" "이런 좋은 가풍은 계속하여 시진핑의 인생태도, 가치지향과 일처리스타일을 훈도, 육성하고 영향을 미쳤다."

 

공산당의 당매체는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볼세비키'는 외부에서 온 주의이고, 중국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전통의 집안서신에 이런 말이 들어가는 것은 불륜불류(不倫不類)할 뿐아니라, 숭양미외(崇洋媚外)하는 측면도 있다. 그리하여 신화사는 먼저 시진핑의 가서를 '중국의 우수한 문화'라고 먼저 쓰고 그 후에 비로소 볼세비키와 공산당인의 특유한 당성원칙과 정치낙인이라고 적은 것이다.

 

아버지가 강산을 차지하면, 아들이 계속하여 강산을 물려받는다. 이는 중국고대에 당연하게 여겨지던 일이고, 중국공산당이 '봉건제도'라고 부르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시진핑의 집안에서는 이것이 '중국의 우수한 전통문화'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시진핑의 연임을 위하여, 무신론을 신앙하고, '봉건미신'을 반복하여 비판하던 중공의 선전기관이 부득이 '군권신수'를 얘기하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신화사는 또한 "시진핑의 가풍을 정리하고 탐구하는 것이" "시진핑총서기의 사상풍격, 정신풍모와 집정이념, 영도풍격, 처세원칙의 중요한 시각을 학습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당원간부 특히 각급 영도간부를 교육인도할 수 있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신화사는 직접적으로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다. 시진핑이 계속하여 "평천하"할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신화사가 모를 리가 없다. 유사한 배경을 가진 홍얼다이는 시진핑 한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을. 시중쉰은 한번도 중공조직의 최고위직에 오른 바가 없고, 중공의 정권탈취에 목숨을 걸고 노력한 사람은 시중쉰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홍색가족은 당연히 대권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홍색가족 내부에서는 "황제는 돌아가며 하는 것이고, 내일은 우리집안의 차지이다"라고 바라고 있는 것이다. 등소평이 정한 잠규칙에 따르면, 이미 근 10년간 정상에 앉아 있던 시진핑은 마땅히 권력을 다른 홍색가족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더이상 시진핑집안이 독점해서는 안된다. 이제, 다른 홍색가족들은 그런 바램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시중쉰의 '구대가풍'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관계가 거의 없다.

 

신화사의 8천여자에 이르는 글은 시중쉰의 '구대가풍'으로 정리했다. 거기에는 "충성위민(忠誠爲民)", "엄격자율(嚴格自律)", "근검절약(勤儉節約)", "저조겸양(低調謙讓)", "견인불발(堅靭不拔)", "진성탄탕(眞誠坦蕩)", "단결향상(團結向上)", "인애숭선(仁愛崇善)", "부자자효(父慈子孝)"

 

이들 단어는 대부분 중공이 계속하여 강조하는 '당성'과 거리가 멀다. 절반이상은 대체로 중국에서 수천년동안 전해내려온 사람됨, 관료로서의 기본준칙이다. 이들 내용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볼세비키에서 온 것이 아니다. 신화사의 말대로라면, 이들 가풍은 중국전통가정의 방식으로 전승되는 것이지, 소위 '당조직'에 의해 전승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중국의 홍색가정내부에는 이런 구별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 구분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중공권력귀족과 일반백성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즉 중공권력귀족은 특권을 누리겠다는 심리상태가 강하다. 만일 볼세비키의 허위의 가면을 벗겨버리게 되면 홍색가족은 아무런 특수한 점이 없다. 다른 모든 사람과 기실 똑같고, 귀천의 구분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화사에서 가풍을 논할 때 부득이 '중국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가장 앞자리에 놓으면서도 절대로 볼세비키라는 홍색레테르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설사 아무도 마르크스레닌주의나 공산주의를 정말 믿지는 않지만. 이는 왜 중국의 고위층이 중공은 곧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당을 지키려고 하는 근본원인이 되는 것이다. 홍색가족들은 최대한 특권을 향유하는 기간을 연장하고 싶은 것이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중공내부에서 일찌기 권력을 장악하거나, 현재 권력을 장악했거나, 미래에 권력을 장악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리 격렬하게 서로 싸우고, 죽이더라도 극력 중공독재통치의 구조는 지켜내려고 하고 있다. 어찌 되었던 모두가 무너지는 것은 막고 있는 것이다. 홍색가족이 최대한 백성들은 권력투쟁의 실상을 알지 못하게 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거짓 기치를 내걸고 있으며 계속하여 말을 바꾸고, 여론을 조종하고, 백성을 기만하고 있다.

 

중공최고권력자의 한계

 

등소평은 공산주의가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주의초급단계'라는 말을 만들어 낸다. 실제로는 부득이하게 자본주의로 향하는 것이다. 다만 또한 '화평연변'은 겁을 내고, 권력을 잃는 것을 겁이 나서 동시에 극력 '전반적인 서방화'는 막은 것이다. 서방의 민주제도와 자유가치관을 받아들이길 거부한 것이다.

 

1978년 시중쉰이 권력에 복귀한 후, 광둥에서 외국과 '아시아 네마리 용'의 성공경험을 참고하고, 수출특구를 만들도록 허용할 것을 제기한다. 이는 즉시 등소평의 재가를 받는다. 1989년 64천안문사태때 시중쉰은 민주요구에 동감하고, 학생을 진압하는데 강하게 반대하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다수 홍색가족은 모두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겁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개혁개방'은 중공권력귀족들을 모두 중국사회 최대의 자본가들로 만들어 주었다. 중공은 '일부분의 사람을 먼저 부유하게 만들고'라는 놀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까발려지고, 소위 '개혁개방'이 더 이상 나갈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개혁개방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면 중공은 반드시 권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꾸 고개를 돌려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중공권력귀족들이 권력을 계속 잡고 싶어하는 무의식적인 동작이다. 과거의 72년은 증명한다. 중공정권의 존재는 실제로 중화민족이 세계로 나아가는데 근본적인 장애물이었다. 또한 중국사회가 진보하는 것을 막는 근본적인 장애물이었다.

 

중공은 최근에 이런 말을 한다. 소위 '공동부유', '민족부흥'등 헛된 구호를 내놓았지만 거의 아무도 믿지 않는다. 누가 계속 권력을 잡든 중공정권은 상황이 악화되고, 악순황에 빠져서 결국은 해체되는 결말을 막지 못할 것이다. 시진핑이 연임해야 한다는 것은 더욱 큰 권력을 획득하겠다는 것이고, 홍색권력귀족의 후손들이 권력을 쟁탈하고자하는 것과는 서로 용납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 점에서 보자면, 중공권력의 무질서한 교체는 평화로운 인수인계가 불가능할 뿐아니라, 가장 우수한 인물이 승계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실제로는 중국에서 수천년간 내려온 황제제도보다 못한 것이다. 중국의 황제제도때 태자 혹은 저군(儲君)에 대한 요건은 아주 엄격했다. 받은 교육과 훈련은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역대왕조에서 수백년간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히 후계자의 배양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단명왕조는 기본적으로 후계자들의 무능무덕때문이었다.

 

지금의 중공고위층은 역대왕조의 마지막황제처럼,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왕조교체의 역사철칙을 저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최종결말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

 

시중쉰은 계속 중공파벌투쟁에서 장기판의 졸이었다.

 

중공의 파벌투쟁은 중공건당의 100년전부터 시작되었다. 시중쉰은 주요 목격자중 한명이다. 전 소련이 조종한 중공중앙은 여러번 폭동을 일으켰지만, 도시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다. 할 수 없이 궁벽진 시골 강서로 가서 산을 장악했다. 당시의 시중쉰은 류지단(劉志丹)을 따라다녔고 마찬가지로 지리조건이 열악한 섬감지구(陝甘, 섬서성과 감숙성)에서 무장할거했다. 다만 명의상으로는 당중앙의 명을 들었다.

 

1935년, 중공중앙의 강서기지가 포위소탕을 당하면서 '장정'때 길을 헤메다가 결국 섬북으로까지 도망쳐 온다. 중앙의 군대는 병력을 많이 잃었고, 원기가 크게 상했다. 그래서 섬북 현지의 역량보다도 못하게 되었다. 중앙은 현지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유지단, 시중쉰을 '반혁명'으로 몰아간다. 나중에는 비록 둘을 다 석방했지만, 권력중추에서는 밀어내 버린다.

 

그후 중공이 세력을 산서로 확장하려고 시도할 때, 유지단은 전선으로 보내어지는데, 공성중에 전사한다. 중공은 실패후 철수한다. 시중쉰도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다. 1941년, 항일전쟁때 전선으로 보내어지고, 국군을 도발한다. 다행히 그는 목숨을 보전했다. 당시의 시중쉰은 나이가 얿었고, 당내투쟁의 무서움을 온몸으로 느낀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는 아마도 '저조겸양', '견인불발'의 정신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일분의 중국침략으로 중공은 운명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중공은 그 기회를 틈타 내전을 일으키고, 시중쉰도 중공권력탈취의 공신중 하나가 된다.

 

1963년, 시중쉰은 소설 <유지단>으로 처벌을 받아, 시골로 하방된다. 시진핑도 연루되었다. 이는 기실 파벌투쟁의 연장이다. 모택동의 사후, 등소평은 시중쉰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실제로 등소평이 자신의 반모택동파에 끌어들인 것이다. 공동으로 모택동이 지정한 후계자 화국봉에 대항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는 해도 시중쉰의 가장 높은 직위는 겨우 1982년 중공정치국위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였고, 1988년, 그는 전인대부위원장으로 물러나며, 1993년 정식 은퇴한다.

 

시중쉰보다 훨씬 더 "근홍묘정"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의 자손들은 자신이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시진핑연임에 대한 반대역량이다. 장쩌민, 쩡칭홍집단은 오랫동안 중국의 관료사회를 장악해왔었다. 세력범위가 계속 침식되는 것이 달갑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이 범한 혈채, 죄책으로 청산당할까 두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반격할 수밖에 없다.

 

시진핑이 연임하는 길은 여전히 중공파벌투쟁의 결투가 벌어지게 될 것이다. 당매체가 이러한 때 <시중쉰의 가풍>이라는 글을 실은 것은 그저 시진핑진영이 여론의 우세를 점거하려는 거동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중공권력투쟁의 신호탄이다. 그러나, 누가 가장 윗자리에 앉게 되든간에 중공정권은 중국역대왕조의 몰락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굳이 이를 거슬려, 역사의 철칙을 어기려고 발버둥친다면 결말은 아마도 더욱 비참하게 될 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