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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여포)

정사(正史)로 본 여포(呂布)

by 중은우시 2021. 10. 25.

글: 역사춘추망(歷史春秋網)

 

'삼성가노(三姓家奴)'는 여포에게 덧씌워진 최대의 오점이다. 여기에 반복무상(反復無常, 이랬다 저랬다 변덕스럽다), 배신기의(背信棄義,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 유리시시(唯利是視, 이익만 쳐다본다), 용이무모(勇而無謀, 용맹하나 지모가 없다), 애제장부(愛諸將婦, 다른 장수의 처를 좋아했다)등등. 거의 모든 나쁜 말들은 모두 그에게 붙여졌다.

 

그러나, 정사를 분석해보면, 이 모든 것은 '낙정하석(落井下石,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의 혐의가 짙다. 여포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그는 계속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 이용당하다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짓밟혀 죽었는데, 죽고 난 후에도 천년간 여러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그는 삼국시대 장수들 중에서 가장 비운의 장수라 할 수 있다.

 

여포가 정원(丁原)을 죽인 것은 맞지만, 의부(義父)를 죽인 것은 아니다.

비록 인생최대의 오점이기는 하지만 정리에 부합한다. 그런데 왜 세상사람들은 항상 이 일을 가지고 그를 비난한 것일까?

 

<삼국지.여포전>의 기록에 따르면, "자사(刺史) 정원(丁原)은 기도위(騎都尉)이다. 하내(河內)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여포가 그의 주부(主簿)였고, 친근하게 대했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여포의 자는 봉선(奉先)이고, 오원군(五原郡) 구원(九原) 사람이다. 정원이 병주로 오기 전에 요포는 "효무(驍武)"의 직위로 병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비록 당시에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맡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군벌 장양(張楊)의 그에 대한 태도를 보면,여포의 당시 직무는 확실히 군직(軍職)이었다.

 

그렇다면, 여포가 이전에 어떤 지위였기에 정원이 여포를 주부로 삼은 것이 그를 친근하게 대한 것이라 말하는 걸까.

 

<후한기>의 기록에 따르면, 동한 한영제시기에 병주자사 장의(張懿)는 침입해온 호인(胡人)에게 살해당했고, 정원은 대장군 하진(何進)의 추천으로 병주자사가 된다. 그전에 장양(張楊, 張陽)은 장의의 휘하에서 무맹(武猛)으로 종사했다(자사의 수하로 병사를 지휘한다). 건안원년(196년) 장양은 한헌제를 낙양으로 호송한 공로로 대사마(大司馬)에 봉해진다.

 

192년 5월 22일, 여포가 동탁을 죽인 두 달 후, 장안은 동탁의 옛부하장수인 이각, 곽사에 의해 함락된다. 비록 여포는 수백명을 이끌고 도망쳐나왔지만, 조정은 현상금을 걸고 지명수배를 내린다.

 

여포가 처음에 의탁하려 한 사람은 원술(袁術)이다. 다만 원술은 그가 '반복무상'하다고 여겨 받아주지 않는다. 여포는 할 수 없이 하내의 장양에게 의탁한다. 그는 장양에게 길지 않은 시간동안 머물다가, 다시 원소에게 투신한다. 원소는 시기심이 많아 그를 죽이려 하자, 그는 다시 도망쳐나와 하내의 장양에게 간다. 특히 건안3년(198년), 조조가 서주의 여포를 직접 정벌하러 나섰을 때, 장양의 군대는 도와주러 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출병을 하여 여포에 호응하여 조조의 군사를 견제했다. 장양은 이로 인하여 부하 양축(楊丑)에게 피살당하고, 그의 부하들은 조조에게 거두어진다.

 

장양의 이런 거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당초 병주에서 병사를 지휘하던 장양의 신분은 분명 여포만큼 높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여포가 전쟁터에서 장양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양은 여포를 그렇게 존중한 것이다. 확실히 그는 여포를 따른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당시의 병주세력은 아마도 여포와 장양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원이 죽은 후, 여포는 겨우 '주부'의 신분으로 어찌 병주의 군대를 장악할 수 있었단 말인가. 예를 들어, 고순(高順), 장료(張遼)같은 충의인사들이 그를 따랐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새로 부임한 병주자사 정원은 뿌리를 내리기 위해 반드시 현지의 세력을 회유해야 했다. 그래서 '여포를 주부로 삼은 것'은 병주세력을 회유하려는 일종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정원은 여포를 심복으로 여겼지만, 실제로는 무슨 실질적인 이익을 준 것은 아니다. 여포도 정원에 대하여 그다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둘 다 그것은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정원은 여포의 힘을 빌려 병주자사로서 자리를 잡고자 했고, 정원은 그 목표를 이룬다. 다만 여포는 '관직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어, 정원과 대장군 하진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병주의 군사를 총지휘하는 직위를 조정으로부터 얻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여포는 겨우 다른 사람의 비서격인 직위만을 얻었을 뿐이다. 여포가 그다지 기뻐했을 것같지는 않다.

 

일찌기 조조의 승상부에서 주부로 일하던 양수(楊修), 대장군 하진의 주부인 진림(陳琳),익주목 유장(劉璋)의 주부인 황권(黃權)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실권이 없다. 오히려 감시하기 위하여 곁에 불러다놓은 직위같아 보인다.

 

표면적으로 보면, 진수(陳壽, 삼국지의 작자)가 말하는 정원이 여포에게 친근하게 대했다는 것은 확실히 맞을 것이다. 자신의 곁에 두고 비서역할을 맡겼으니까. 다만, 여포의 장점은 '싸움을 잘하는데 있다' '팔 힘이 남달라서 비장(飛將)이라 불렀다' 그런데 정원은 그에게 문관의 직위를 준 것이다. 아마 그 누구도 그런 직위를 감사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원은 단지 여포를 이용한 것이고, 여포에게 실질적인 '심복대우'를 해주지는 않았다. 그러니 무슨 '친근하게 대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동시에 중평원년(189년) 동탁(董卓)은 조정에서 병주목(幷州牧)으로 임명된다. 다만 그는 현지로 부임하지는 않았고, 조정도 그의 병주목의 직위를 면직시키지도 않았다. 다만, 한영제가 붕어한 후, 정원은 대장군 하진의 명을 받아 병력을 이끌고 낙양으로 진입하여 환관들을 주살하고자 한다. 정원도 조정에 의해 집금오(執金吾, 금군 북군을 지휘하는 직위)에 임명된다. 광무제 유수가 일찌기 꿈꾸었던 것중에서 '관직에 오르려면 집금오를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를 보면 집금오가 얼마나 중요하고 높은 직위인지 알 수 있다. 다만 여포의 관직은 여전히 자잘한 주부였다. 정원은 여전히 여포의 병주군을 통제하고 싶어했다. 이건 여포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바로 이때 병주의 명목상의 최고통치자인 병주목인 동탁은 우울해 있는 여포에게 손을 내민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정원을 죽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동탁은 적토마를 가지고 여포를 유혹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여포가 타던 말은 적토마였기 때문이다.

 

이때는 이치대로라면 이미 집금오가 된 정원은 여포의 직접 상사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동탁은 여전히 그의 최종 상사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상관의 명을 받들어 정원을 죽인 것이라고.

 

다만, 여포는 어찌되었건 세상에서 공인된 악인인 동탁의 휘하로 들어가지도 말았어야 했고, 더더구나 동탁의 휘하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전 상사인 정원을 죽이지도 말았어야 했다. 다만, 이런 일은 여포가 어려서부터 자랐던 호인지역에서는 별다른 일도 아니었다. 난세에는 그런 일이 아주 많았다. 다만 통치자의 눈에는 그의 그런 행위는 '십악중 하나'인 '불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자연히 사람들은 그의 그런 약점을 잡아 비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정원과 여포가 부자관계라고 날조하는 것등이다. 이것은 여포에게 근거없는 오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첫걸음을 잘못 떼면 그후의 걸음도 모두 문제이다" 이때부터 여포는 되돌아올 수 없는 어두운 길을 걷게 된다.

 

여포가 동탁을 죽인 것은 의부를 죽인 것이 아니다. 원래 '국적을 죽인 공으로 인정받아야 하는데, 왜 '삼성가노' '반복무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을까?

 

<삼국지.여포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여포는 정원의 수급을 베어 동탁에게 간다. 동탁은 그를 기도위로 삼고, 크게 아끼며 믿었으며, 부자로 맹세한다."

 

여포는 정원을 죽인 후, 동탁에 의해 기도위에 임명된다. 이천석의 자리로, 종오품에 해당하는 조정관리이다. 비록 신분의 상승은 이루었지만, 그는 잘못된 사람을 따랐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들어서게 되었다.

 

동탁은 여포를 회유하기 위하여, 혹은 병주집단의 군사역량을 더욱 확실히 장악하기 위하여, 이렇게 맹세한다: "영원히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는 것처럼 여포를 대하겠다" 다만 진정 여포를 의자로 삼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두 사람간에는 아마도 부자의 정은 존재할 지언정, 부자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잇에 동탁은 여포를 곁에 두어서 자신의 호위로 삼는다. 이런 방식은 당초 정원에 여포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이것이 아마도 여포와 동탁간에 틈이 생긴 시작일 것이다. 일단 동탁, 여포간의 밀월기가 지나면, 약간의 도화선만 있어서 반드시 폭발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동탁은 정말 여포를 아들처럼 대했을까?

 

<위전략>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동탁은 비록 여포를 가깝게 아꼈지만, 술에 취하면 그를 욕했고, 도검으로 찔러갔다. 물론 맞추지는 못했다. 여포는 살해당할까봐 겁을 먹었고, 결사대를 모아서 동탁을 죽인다."

 

<삼국지.여포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동탁은 성격이 억세면서 급했다. 화가 나면 뒤를 생각지 않았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극(手戟)을 집어 여포에게 던졌다. 여포는 민첩하여 그것을 피할 수 있었다..."

 

<삼국지.여포전>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동탁은 항상 여포로 하여금 중합을 지키게 하였고, 여포는 동탁의 시비와 사통한다. 그 일이 발각될 것이 겁나서, 마음이 불안했다."

 

동탁이 여포에게 한 짓을 보자. 술에 취하면 여포에게 욕을 했고, 도검으로 여포를 찌르려 했다. 자잘한 일 때문에 수극을 여포에게 던진 적도 있다. 여포는 수시로 욕먹고 모욕을 당했다.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나중에 그는 동탁의 시비와 관계를 갖게 되는데, 자잘한 일을 가지고도 그를 죽이려했던 동탁이나 만일 시비와의 사통이 발각되면 어찌될 것인지에 대하여 더욱 우려하게 된다.

 

동탁이 여포에게 한 짓은 도저히 부친이 아들에게 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확실히 동탁은 일찌감치 예전의 맹세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같다. 여포가 장안을 도망쳐 나올 때, '수백의 사졸들'이 따라나온 것을 보면, 병주세력은 이미 양주세력에게 많이 침식당한 것같다. 즉, 여포의 이용가치가 갈수록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동탁은 그를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 병주고향사람인 왕윤이 여포를 찾아왔고, 둘이 논의한 결과는 여포에게 죽음을 당할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뿐아니라, 병주세력을 크게 키우고 또한 나라를 구한 공신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포는 왕윤과 공모하여 동탁을 죽이게 된 것이다.

 

사후에, 왕윤은 여포를 분무장군(奮武將軍)에 임명하고 온후(溫侯)에 봉하고, 가절(假節), 의동삼사(儀同三司)로 삼아, 두 사람은 조정의 사무를 함께 처라하게 된다. 만일 왕윤이 조정을 장악하고 한나라황실을 중흥시킬 수 있었다면, 여포는 ㅎ한황실을 중흥시킨 대공신이 되었을 것이다. 누가 그에게 '삼성가노'니 하는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역사에 가정은 없다. 여포는 겨우 두 달간 무상의 영광을 누렸고, 장안은 동탁의 옛부하인 이각,곽사등에 의해 함락된다. 여포 자신은 겨우 수백명을 이끌고 도망쳐나와야 했다. 그리고 조정의 지명수배범이 된다.

 

비록, 정원, 동탁, 왕윤은 모두 여포를 도구로 사용했지만, 다행히 여포는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죽일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여포를 도구로 사용하였고, 사용후에는 짓밟으려 한다. 왜 여포는 이런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을까?

 

세상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이용당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어쨌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다만 이용당한 후, 짓밟힌다면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것이다.

 

진궁(陳宮)은 '유랑한' 여포를 제후의 자리에 올려놓지만, 실패한 오명을 여포에게 뒤집어 씌운다.

 

여포는 장안에서 도망쳐 나온 후, 가장 먼저 원술에게 의탁하려 한다. 그러나 원술은 그를 전혀 좋게 보지 않았다. 여포는 할 수 없이 하내태수 장양에게 간다. 며칠 후, 그는 장양을 떠나 원소에게 간다. 원소는 그를 이용하여 흑산 장연(張燕)의 정예부대를 격패시킨다. 다만 원소는 여포가 병력을 끌어모아 실력이 커지는 것을 보자 여포를 죽이려 한다. 여포는 그 소식을 듣고 다시 요행히 도망쳐서 하내태수 장양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만, 여포는 시종일관 장양의 하내를 자신의 기반으로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어디를 가든 거기를 빼앗을 생각만 하는 유비와 비교하자면 여포는 훨씬 광명정대하다.

 

흥평원년(194년) 진궁은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러 떠난 틈을 타서, 허사, 왕해, 및 장막, 장초형제들과 함께 조조에 반란을 일으킨다. 당시 진궁은 여포가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는데 사방을 떠돌아다닌다는 말을 듣고, 여포의 용맹함을 빌려 비어있는 연주(兗州)를 차지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진궁은 여포를 연주로 모셔가서, 그와 장막이 공동으로 연주를 관리하도록 추대한다. 만일 진궁등이 연주를 확실히 빼앗았다면, 여포는 그저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괴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조의 군대가 회군하여 여포, 진궁, 장막등을 대파한다. 장막의 일가족은 조조에게 피살당한다. 어쩔 수 없이, 진궁은 여포를 따라 서주로 도망친다. 다행히 유비가 그들을 거두어 주고, 군대를 소패(小沛)에 주둔시키게 한다. 기실 유비도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해서, 여포를 이용하여 조조를 막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천천히 병합하려고 생각했다.

 

나중에 하비(下邳)를 조조가 점령한 후, 진궁은 생포된다. 죽기 직전에, 자신이 여포를 이용했었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여포가 나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지경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여포를 원망한다.

 

그렇다면, 여포는 왜 '진궁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혹시 여포가 멍청해서 그랬을까? 당연히 아니다. 진궁이 여포에게 몹쓸짓을 했기 때문이다.

 

<삼국지. 위지. 여포전>은 <영웅기>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는데, 건안원년(196년) 육월, 여포의 휘하장수 학맹(郝萌)이 반란을 일으켜, 여포의 하비로 쳐들어간다. 당시 당황한 여포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부인을 데리고 화장실에서 담장을 넘어 고순의 군영으로 기어든다. 그후 고순이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평정한다. 학맹의 부하장수인 조성(曹性, 화살을 쏘아 하후돈의 눈 하나를 멀게 한 인물임)은 고순에게 말한다: "학맹은 원술의 지시를 받았다." "진궁도 공모했다." 당시 곁에 앉아 있던 진궁은 얼굴과 귀가 벌개진다. 여포는 원술과 결맹을 맺으려는 생각이 있었고, 진궁이 중간에서 주선해주어야할 필요가 있어서, 이 일을 깊이 따지지 않는다. 그후 고순과 진궁의 사이는 갈라지게 된다.

 

그리하여, '여포의 밑에서 먹고 지내면서, 원술에게 붙으려한' 진궁이 낸 계책을 어찌 여포가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하비성이 함락된 후, 여포가 투항하려 하자, 조조는 확실히 마음이 움직인다. 여포같은 맹장을 이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조조가 망설일 때, 유비가 돌연 끼어들어 조조에게 한 마디 한다: "명공은 여포가 정건양(정원)과 동태사(동탁)에게 한 짓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의 이 말은 여포를 직접 지옥으로 떨어뜨리게 만든다. '반복소인'이라는 오명을 여포는 뒤집어 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유비는 왜 이때 시비를 따지는 소인이 되기로 한 것일까? 그리고 왜 여포에게 '낙정하석'했을까? 유비는 서주쟁탈전에서 여포에게 패배하여 기반을 잡을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이렇게 복수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포는 왜 이런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일까?

 

삼국시대의 '반복소인'을 얘기하자면, 맹달(孟達)을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한다. 유장이 그를 중용했는데, 그는 오히려 유비가 사천으로 들어오도록 맞이한다. 유비가 그를 중용했는데, 그는 오히려 조비에게 투항한다. 조예시기에는 다시 촉한으로 투항하려 한다.

 

'배신기의' '반복무상' '유리시시'를 얘기하자면 유비를 따를 자가 없다. 공손찬은 유비를 형제로 대했고, 그를 평원상에 추천하기도 했는데, 그는 서주를 차지할 수 있게 되자 즉시 공손찬을 버리고, 서주의 도겸에게 간다; 공손찬과 원소가 전투를 벌일 때 병졸 하나도 보내어 도와주지 않는다. 더더구나 말로도 지원해주지 않았다; 조조에게 의탁한 후, 조조는 그를 예주목으로 추천한다. 그리고 그에게 돈과 양식 그리고 군대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조조를 배신한다; 유장은 그를 동족의 형제로 대우하고, 신뢰했다. 그러나 그는 암중으로 유장의 익주를 도모한다.

 

'호색', '애제장부', '성격이 의심이 많다'를 따지자면, 조조만한 사람이 없다. 완성의 장수를 토벌한 후, 하마터면 그로 인하여 목숨을 잃을 뻔한다. 그리고 장남, 조앙, 아끼는 조카 조안민, 대장 전위가 피살당한다. 하비를 함락시킨 후, 진의록의 처인 두씨도 조조가 자기 여자로 삼는다.

 

다만, 왜 이렇게 많은 오명이 굳이 여포의 머리 위에 뒤집어씌워지게 된 것일까?

 

첫째, 패배자의 최후는 대체로 그러하다. 원소, 원술, 유장, 공손찬등. 후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둘째, 신분문제이다. 한 측면에서 국적 동탁과 어울렸던 오점이 있다. 동탁의 심복이었던 여포는 자연히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동탁을 죽인 후 '의동삼사'의 신분을 지녔었다. 누구에게 의탁하더라도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기 쉽지 않게 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제후신분이다. 다른 제후가 패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오명을 뒤집어 씌우고 없애야 했던 것이다. 유비를 보면, 어디를 가든 '중산정왕'의 후손이라는 '황실친척'이라는 신분을 선전하고 다녔으며 이런 신분을 지녔으니 누구든지 그와 사귀고 싶어했다.

 

셋째, 정치적으로 오락가락했다. 이런 말이 있다: '방향이 틀리면 노력해도 헛된다' 여포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그저 어느 제후에게 의탁하여 명장으로 남으려 한 것인지, 아니면 일방의 제후가 되어 천하를 쟁패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충신이 되려 한 것인지, 역신이 되려 한 것인지 그의 정치적 방향이 어떤지를 알 수가 없다. 만일 일대명장이 되고 싶었다면, 당연히 한 사람에 의탁하여 그의 충실한 동생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정원에 의탁했다가 정원을 죽이고, 동탁에 투신했다가 동탁을 죽이고, 원소에 투신했다가 자신의 병마를 모집하여 키웠다. 충신이 되려면 당연히 왕윤같이 충신에 걸맞는 행동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도망같다. 만일 역신이 되려고 했으면, 동탁, 이각, 곽사처럼 나쁜 짓을 하고 다녀야 하는데, 그들과 비교하면 여포는 '군자'같다. 만일 제후가 되려고 했으면, 마땅히 한 지방을 차지하고 할거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진등(陳登)이 그에게 서주목의 직위를 주지 않는데 대노하였고, 더더구나 하내의 장양의 땅을 자기가 빼앗을 야심도 없었다. 이렇게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라면 난세는 물론이고 치세라 하더라도, 그저 남에게 이용당하지 절대로 중용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여포의 비참한 운명은 결정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