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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1351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는 왜 태자 이영(李瑛)을 죽였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자고이래로 황제의 후궁은 투쟁지수가 아주 높은 곳이다. 역사의 안개를 걷어내면 당현종 이융기가 하루에 친아들 3명을 죽여버린 심층적인 원인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이익이 관련되어 있다. 내 고기를 건드리면 가까운 자라도 죽여버린다!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간단한 것이고,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 재수없는 세 아들이 돌연 멸정지재(滅頂之災)를 당한 것을 자세히 파악하려면, 역시 그들 부모의 사적인 관계가 좋은지 아닌지 그리고 조정의 각종 이익집단의 힘겨루기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독립적인 사건은 아니다. 감정과 정치투쟁이 가열된 결과이다. 이 세계에는 확실히 아무런 이유없는 사랑은 없다. 또한 아무런 이유없는 원한도 없다. 위인의 명언.. 2022. 1. 4.
관우의 후손이 있을까? 글: 선한(宣漢) 중국인에게 "의용(義勇)" 두 글자의 화신인 관우는 성공을 다 이루지 못하고 동맹군에게 성을 빼앗기고 도망치다가 죽는다. 그의 최후는 역대의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일이다. 관우의 장남 관평은 부친을 따라 전투에 나섰다가 맥성에서 포위망을 돌파하다가 붙잡혀 부친과 함께 죽는다. 차남 관흥은 제갈량이 중시했으나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띨 관씨는 여몽의 손에 붙잡한 후 행방이 묘연하다. 관우의 혈맥은 그리하여 더욱 희박해지게 된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 수백년 천여년이 지나는 동안 관우는 역대군왕, 무인,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신으로까지 모셔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일부 관우의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정부의 녹봉과 관직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관우의 후손은 이어져.. 2021. 12. 25.
관우의 후손이 남아 있을까? 글: 고산(高山)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심심하면 항상 고대의 명인들의 후손에 대하여 얘기하다가, 일단 관우의 이름이 나오면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이 없어진다. 관우의 후손은 그다지 큰 공헌이 없으므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어떤 사람은 관우에게는 후손이 없다고 얘기한다. 도대체 관우는후손을 두었을까? 관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동한 삼국시대의 대장이다. 또한 유비와 도원결의한 형제이기도 하다. 관방사서의 기재이건 아니면 역사연의소설의 묘사이건, 관우는 모두 충성과 의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온조참화웅과 천리주단기로 삼척동자도 아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영웅도 죽는 법이다. 건안24년(219년), 관우는 형주를 지키다가, 조조와 손권이 .. 2021. 12. 24.
임두두(林豆豆)는 부친 임표(林彪)의 9.13사건 진상을 말하지 못하도록 강요받았다. 글: 왕우군(王友群) 1971년 9월 13일, 중공당장에 "모택동의 친밀한 전우이며 후계자"라고 명시되었던 임표가 그의 처 섭군(葉群), 아들 임입과(林立果)와 트라이던트비행기를 타고 하북 산해관공항(山海關機場)에서 이륙하여 몽골의 원두르칸(溫都爾汗)에서 추락했고, 비행기에 타고 있던 9명은 모두 사망한다. 이것이 바로 당시 세계를 뒤흔들었던 "9.13사건"이다. 임표는 중국의 십대원수중 한 명이다. 1949년 중공이 권력을 장악한 후, 임표는 국무원 부총리, 중공중앙부주석, 국방부장, 중앙군위제1부주석등의 직위를 맡았다. 문혁때, 중공독재자 모택동(毛澤東)에 바로 다음가는 2인자에 올랐다. 임표의 사후 중공은 그를 "반당반국(叛黨叛國)"의 야심가, 음모가, 매국노, 모택동의 암살을 기도한 원흉으로 규정.. 2021. 12. 22.
누가 10년문혁의 역사죄인인가? 글: 왕위범(王偉凡) 나는 비록 문혁때 출생하고, 문혁때 동년을 보냈지만, 문혁에 대하여 윗세대처럼 직접 겪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문혁에 대한 이해는 문혁당사자들이 쓴 회고록에서 어느 정도 얻은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금은 문혁을 얘기하는 사람이 적다. 최근 CCTV에서 인기리에 방송된 을 보고 다시 10년문혁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문혁은 이미 38년이 지났다. 다만 중국의 집권자들은 오랫동안 선택적망각을 했고, 나도 대다수의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찌기 문혁의 주요 죄괴화수(罪魁禍首)는 임표집단과 왕장강요(王張江姚) 사인방의 두 '반혁명집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중 임표와 그의 가족은 전용기추락으로 사망했고, 강생(康生)은 일찌기 병사했다. 그리하여 문혁이 끝난 후에 법정에 서지 않았다.. 2021. 12. 17.
손중산(孫中山)의 일본인 처와 후손.... 글: 옥미수(玉米穗) 듣기로 일본수상을 지낸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는 손중산에게 가장 좋아하는 세 가지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손중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는 혁명, 둘째는 여자, 셋째는 독서. 손중산은 과연 불세출의 위인이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고싶은 말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여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중 하나라고. 손중산은 여자들과 연분이 많았다. 그는 일생동안 혁명사업에 바빴지만 주변에는 항상 여인이 있었다. 본부인 노모정(盧慕貞)은 그와의 사이에 아들딸을 낳아서 길렀다. 그녀는 전통적인 구식여인이었으므로, 그를 따라 동분서주하며 '천하위공(天下爲公)'의 혁명사업을 할 수는 없었다. 노모정은 비록 집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대의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손중산에게.. 2021. 12. 4.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은 자손을 남겼을까? 글: 원재예(袁載譽) 1398년, 주윤문이 황제에 등극하여, 주씨 명왕조의 두번쨰 황제가 되었다. 다만, 황제의 자리가 안정되기도 전에 그의 숙부인 주체(朱棣)가 1399년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지금의 북경을 기점으로 당시의 수도인 남경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주체의 군대는 파죽지세였고, 주윤문의 군대는 계속 패퇴한다. 1402년, 남경성이 함락되고, 황궁에서는 불이 나고, 주윤문은 행방이 묘연해진다. 얼마 후, 주체는 남경 봉천전(奉天殿)에서 황제에 오른다. 역사에서 "정난지변(靖難之變)"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전체 정난지변때 대부분의 역사애호가들은 주체의 반란이 4년의 시간을 들여서 건문제를 끌어내리는데 성공한 것에 탄식하는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은 주윤문이 도대체 죽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궁금해 .. 2021. 12. 1.
임표(林彪)의 "괴병(怪病)": 임표 운전기사의 회고... 글: 초성서(楚成瑞) 조적(祖籍)은 산동 액현(掖縣)이고 일찌기 관동으로 가서 요녕성 대련에 거주한다. 1945년 영구(營口)에서 동북인민자치군에 참여하고, 입대한지 3년만에 제4야전군의 총사령관 임표의 운전기사가 된다. 임표는 그의 차를 타고, 관외에서 관내로 들어오고, 다시 북평에서 개봉으로 남하하고, 그후에 한구로 진입한다. 1950년초, 꽃을 들고 환영하는 가운데 그와 임표의 '승용차'는 북경으로 돌아온다. 매년 이어지는 전투로 임표는 피로에 지쳐 쓰러졌다. 임표를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그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었다. 기실 이 병은 일찌감치 평형관전투전에 이미 앓았다. 그때 적군은 강하고 아군은 약했다. 그래도 전투에서 이겨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적을 1만명 죽이면서 아군 8천을 잃.. 2021. 11. 25.
제갈량 처가의 집안배경 글: 문방장거(文房掌柜) 제갈량의 혼사에 관하여는 그가 명사인 황승언(黃承彦)의 "황두흑부(黃頭黑膚, 머리카락은 누렇고 피부는 검다)"의 추녀를 취한 것으로 후세에 널리 알려져 있다. 제갈량은 원래 산동(山東)사람이다. 나중에 융중(隆中)으로 이주해 온다. 융중에서 머무는 10년동안 제갈량은 보통의 청소년에서 시무를 아는 준걸로 성장한다. 외지에 와서 사는 사람으로서, 그는 어떻게 청년파의 우두머리로 떠오를 수 있었을까? 제갈량 본인의 총명과 재지를 제외하고고 그가 양양으로 온 후에 건립한 인맥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인은 현지의 호족세력 및 권력집안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표(劉表)가 통치하는 양양일대의 주요 호족세력으로는 방(龐), 채(蔡), 황(黃.. 2021. 11. 3.
시진핑이 해외를 못나가는 이유: 후르시초프의 전철을 두려워하고 있다. 글: 법광중문(法廣中文) 최근 2년간 해외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중국지도자 시진핑은 연말에 출국할 가능성도 그다지 크지 않은 것같다. 그가 30일, 31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리는 G20정상화담에 직접 참석하지 않을 것이고, 이번 일요일 영국에서 거행되는 기후변화회의에 대하여 시진핑이 아직까지 아무런 태도표명을 하지 않고 있지만, 보편적으로 시진핑 본인은 불참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시진핑은 현재 국제회의에 '원격' '영상'으로 참석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이전에 국제적인 대행사에 항상 참석해왔던 시진핑이 최근 2년간은 한발짝도 국외로 나가지 않고 있어,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곧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개최될 기후변화회의에서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시진핑이 탄소배출감소분야에서 새로운 약속을 .. 2021. 10.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