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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누가 서태후로 하여금 서방열강에 선전포고하게 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21. 6. 22.

글: 후유(煦濡)

 

1900년 6월 21일, 서태후는 광서제의 명의로 각국에 선전포고하는 조서를 내린다.

 

서태후는 서방열강의 여러가지 죄행을 나열했다. "삼십년동안, 우리나라가 인자하고 후덕하게 다독거리는 것을 빌미로 그들은 갈수록 발호하며 우리나라를 핍박하며, 우리의 토지를 침범하고, 우리의 인민을 유린하고, 우리의 재물을 강탈해갔다." "그들은 스스로 교화지국이라고 하면서 예의없이 횡행하고 병력과 무기의 날카로움을 믿고 이렇게까지 했다."

 

서태후는 이렇게 분노를 표시한 후, 마지막에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선전구호를 내놓는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만고에 수치를 남기기보다 들고 일어나 자웅을 겨뤄보아야 한다!"

 

이 선전포고를 전환점으로 하여, 청정부는 정식으로 서방열강과 갈라지고, 중국과 서방열강의 전투를 개시한다. 오늘날의 각도에서 보자면, 서태후의 이번 선전포고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대청이 강건성세때라고 하더라도, 동시에 이렇게 많은 나라들에게 선전포고를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빈약한 만청이 감히 혼자서 세계각국에 선전포고를 하다니, 설마 서태후의 머리가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히틀러같은 전쟁미치광이라 하더라도 감히 동시에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지는 못했다.

 

서태후가 이렇게 중대한 국가의사결정을 혼자서 분개하여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전포고는 기실 당시 중앙권력의 국면, 황위쟁탈, 파벌투쟁 및 서태후의 치정방식등 여러 방면의 요소와 관련이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선전포고에 이르게된 도화선은 위조된 한통의 외교조회(外交照會)였다.

 

위조된 외교조회

 

1900년 5,6월 의화단의 무리가 대거 북경으로 진입한다. 교화를 불태우고, 신도를 도살하여, 각국 공사관은 실탄을 장전하고 이들을 막았다. 대고구(大沽口)의 밖에는 각국의 군함이 운집해 있었다. 팔국연합군은 천진에서 북경으로 진군할 생각이었다. 이때, 경성의 국면은 급속히 악화되어, 수습불가능한 지경에 처했다. 의화단에 대하여 토벌한 것인지 거둘 거인지, 열강에 대하여 싸울 것인지 화해할 것인지, 청나라정부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6월 16일에서 19일까지, 서태후는 4일동안 4번의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여러 신하들과 대응방안을 논의한다. 이를 통해 싸울지 말지를 결정하고자 했다. 16일의 첫날 어전회의때 주전파 주화파의 양측 관리들은 날카롭게 대립했고 격렬하게 설전을 벌인다. 서태후는 주전파를 지지하는 듯 보였으나, 최종적으로 결정하지는 못했다.

 

6월 17일, 제2차 어전회의에서 서태후는 돌연 신하들에게 외교조회 1통을 내놓는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3가지이다: "1. 장소를 한 곳 정해서 중국황제가 거주하게 한다. 2. 각성의 전량을 대신 수령한다. 3. 천하의 병권을 대신 장악한다." 이 조회에는 원래 4조가 있었다. 그것은 '태후가 권력을 내놓는다"이다. 서태후는 여러가지를 고려하여 이 내용은 신하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여러 대신들은 조회의 내용을 보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찌해야할 지를 몰랐고, 그저 놀라서 머리를 조아리며, "신등은 사력을 다 하겠습니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서태후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의 일은 대신들도 모두 들었다. 나는 강산사직을 위하여 부득이 선전포고해야 한다. 만일 전쟁을 해서도 강산사직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나의 고심을 알아달라. 모두 내 잘못으로 돌리지는 말라."

 

제2차 어전회의는 기본적으로 서태후의 주전의 입장을 결정한다. 조회에서 요구한 것은 확실히 서태후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이는 직접적으로 서태후의 집권기반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녀를 정치적으로 소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태후에 있어서 이는 받아들일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후의 두번에 걸친 회의에서 영록(榮祿)을 대표로 하는 주화파는 이미 더 이상 막을 수가 없었다. 영록이 말한 바와 같이, "만일 다시 반대한다면 그것은 반역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를 보면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 수 있다.

 

청나라조정이 선전포고를 내리는 과정에서 이 외교조회는 지극히 중요한 작용을 했다. 그러나 이 조회에 대하여 후세인들은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대다수는 이를 단왕(端王) 재의(載漪)가 위조했다고 본다. 다른 설로는 이는 순전히 소문일 뿐이고, 그런 조회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당시 어전회의에 참가했던 한림원 시독학사 운육정(惲毓鼎)이 쓴 <숭릉전언록(崇陵傳言錄)>에는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조회는 6월 16일 저녁 강소양도(江蘇糧道) 나가걸(羅嘉傑)이 아들을 보내 영록에게 건넨다. 다시 영록이 서태후에게 올렸다. 그러나 사후에 이 조회에 대하여 총리아문과 직예총독에게 물어보았지만, 출처를 알아내지 못한다. 그리하여 운육정은 "기실 어느 관리가 누군가의 말을 가볍게 믿은 것이고, 각국이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학자 마충문(馬忠文)은 당시 각 관련관리들의 서신과 일기에 쓰인 기재를 종합하여, 고증한 후, 이렇게 판단한다. 나가걸은 확실히 영록에게 이런 정보성 소식을 전달했다. 영록이 서태후에게 바친 후, 서태후가 대노한다.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인정된다.

 

재의집단이 기회를 잡아 굴기한다.

 

조회를 위조한 것에 대하여 다수의 후세인들은 단왕 재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직접적인 증거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동기, 이익등 여러 방면을 생각하면, 재의가 확실히 최대의 혐의자이다. 재의는 조회를 위조함으로써 서태후를 분노하게 만들어 각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하려 했다. 이를 통해 국외세력의 국내정치에 대한 간여를 막고자 했고 나아가 광서제를 축출하고, 자신의 아들인 부준(溥儁)을 황제로 등극시키고자 했다. 이 모든 것은 무술정변후의 중앙권력국면 및 서태후의 대외적태도부터 얘기해 보아야 한다.

 

무술정변후, 영국, 일본등이 강유위, 양계초의 해외망명을 돕는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서양인들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된다. 강유위, 양계초가 망명한 후, 보황당을 성립하여, 외국에서 책을 쓰고 글을 써서, 서태후를 공격하고 욕했다. 이로 인하여 서태후는 서양각국에 분노를 갖게 되고, 원한을 품게 된다.

 

1898년 9월 21일, 서태후는 상유(上諭)를 내려, 사시 수렴청정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중앙권력국면에 변화가 발생하면서, 광서제는 무술정변후 실권을 상실하고 더 이상 서태후의 신임을 받지 못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날로 악화된다. 아마도 정변으로 인한 타격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서태후가 약물을 써서인지 광서제의 몸은 신속히 나빠진다. 1899년 내내 몸이 좋았다 나빴다 한다. 연말이 되어서는 병석에 드러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지경에 처한다. 서태후와 후당(后黨)의 관료들은 급히 광서제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1900년 1월 24일, 청나라조정은 상유를 내려, 단왕 재의의 아들 부준을 대아거(大阿哥)로 세운다. 그리고 목종의황제 동치제의 아들로 입적시킨다. 실제로 광서제의 후임황제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 해는 음력으로 기해년이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기해건저(己亥建儲)"라 부른다.

 

기해건저의 배후에 숨은 것은 매우 복잡한 투쟁관계이다. 제당(帝黨), 후당 양당의 다툼, 신구세력의 다툼, 만한관계의 다툼 그리고 영록과 강의(剛毅)간의 정치투쟁등이 있다. 국내투쟁은 놔두고라도, 광서제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면서 새로운 후계자의 문제는 즉시 서방각국의 강력한 반응을 불러온다. 이렇게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나타난다.

 

서태후가 광서제의 병세를 중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사절들에게 알렸을 대, 영국의 주화공사 클로드 맥스웰 맥도날드는 즉시 총리아문에 이렇게 의견을 보낸다: "나는 굳게 믿습니다. 만일 광서제가 이 정국의 변화과정에서 사망한다면, 서양각국과의 사이에 중국에 아주 불리한 결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맥도날드는 심지어 직접 청나라조정에 서양의사를 입궁시켜 광서제의 병을 치료하겠다고 건의한다.

 

이번 입저사건에서 서양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노골적으로 간섭했다. 이는 서태후의 서양각국에 적대감을 더욱 키우게 된다. 그러나, 서태후가 이들 서양인들에게 이를 갈고 있기는 했지만, 이때는 아직 서양인과 싸울 담량과 실력이 되지 않았다.

 

입저사건의 영향으로, 단왕 재의의 지위는 급격히 올라간다. 병부상서 강의, 대학사 서동(徐桐), 승은공 숭기(崇綺), 예부상서 계수(啓秀)등의 세력이 적극적으로 그와 손을 잡는다. 그리하여 극히 영향력이 큰 정치단체가 형성된다. 경사의 관료사회는 졸지에 수구적인 분위기로 되돌아간다. 재의를 우두머리로 하는 완고파의 세력이 커진 후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서태후에 비교적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의화단 운동기간동안, 그들은 극력 의화단이 충용(忠勇)과 서양인의 악행을 극력 보고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서태후가 당시 시국에 대한 판단과 전쟁이냐 화해냐를 결정할 때 영향을 미치고, 결국 조회를 위조하여 선전포고를 하게 만든다. 

 

주목할 점은 비록 이 조회가 위조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외국인의 마음 속에 서태후에게 권력을 내놓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은 보편적이었다. 예를 들어, 1900년 6월 19일, 영국인이 상해에서 발간하는 <자림서보(字林西報)>에 사론을 발표하여, 서태와 심복들을 북경에서 쫓아내고 정권을 광서제에게 돌려주라고 쓴다. 서양인들은 서태후의 수렴청정을 방해하고, 강유위, 양계초의 보황당을 보호하여 서태후는 서방열강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고, 배외정서가 날로 심해진다.

 

파벌쟁탈과 서태후의 치정(治政)

 

새로 흥성하는 의화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하여 서태후는 시종일관 수서양단(首鼠兩端), 유리부정(遊離不定)한 방황과 우유부단을 나타낸다. 서방열강에 대한 두려움과 원한은 서태후로 하여금 서양인들에게 감히 덤비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들의 핍박을 받기도 싫었다. 경성과 천진에 만연하고, 날로 커지는 의화단은 서태후로 하여금 이들을 쓸 수 있겠다고 여긴다. 그러나 날로 급진적으로 변해가는 의화단의 행동은 서태후로 하여금 그들을 통제하지 못해서 큰 화를 불러올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하였다.

 

서태후의 우유부단한 태도는 직접적으로 왕공대신을 '주화파'와 '주전파'로 나뉘게 만들었다. 의화단에 대한 태도도 토벌과 초무(招撫)로 나뉘게 된다.

 

전자는 권신 영록, 혁광(奕劻), 왕문소(王文韶), 이부시랑 허경징(許景澄), 병부상서 서용의(徐用儀), 태상시경 원창(袁昶), 총리아문대신 연원(聯元) 및 지방실력자 이홍장(李鴻章), 유곤일(劉坤一), 장지동(張之洞), 원세개(袁世凱)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의화단에 대한 진압, 토벌을 통해 서방열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그들의 양해를 받아냐 한다고 주장했다. 후자는 단왕 재의, 이부상서 강의, 대학사 서동, 형부상서 조서교(趙舒翹), 예부상서 계수, 호부상서 숭기등을 대표로 하며, 의화단을 초무해야 한다고 극력 주장했다.

 

주전파의 사람들은 대부분 광서제의 폐립, 부준의 승계에 이익이 관련된 인물들이다. 본질적으로 정치이익으로 모연 소정치집단이다. 그리하여 주전파의 목적은 의화단의 역량을 이용하여 열강이 계속 광서제를 지지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것이고, 나아가 광서제를 내쫓고, 부준을 하루빨리 즉위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들 관리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의화단을 지지하였다. 국가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순수한 애국심도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오직 사리와 집단이익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주전파는 도덕적으로 고지를 선점한 상태였다. 열강을 반대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천연적인 정의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쉽게 호응을 얻었고, 일시에 세력이 흥성한다.

 

서태후는 투쟁경험이 풍부하고 정치수완이 강력한 통치자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정치파벌과 권력집단을 상호견제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균형을 이루어 왔다. 결국 각 세력을 통제해서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이전의 공친왕 혁흔(奕訢), 이홍장과 옹동화(翁同龢) 그리고 그 후의 원세개와 구홍기(瞿鴻機), 잠춘훤(岑春煊)에게서도 나타난다. 모두 서태후의 숙달되고 노련한 수단을 맛본 바 있다. 이번 의화단사건에서 마찬가지로 서태후의 정치수완을 엿볼 수 있다.

 

처음에 얘기했던 선전포고로 되돌아가보면, 어전회의에서 선전포고를 하기로 결정했지만, 어느 나라를 상대로 선전포고할 것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외국정부에도 전달하지 않았다. 그 내용을 보면, 명목은 선전포고이지만, 국내에 선포하는 내부동원령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선전조서를 내린 며칠 후, 성경장군(盛京將軍) 증기(增祺)는 청나라조정에 물어본다: "이번에 외국과의 전쟁은 도대체 어느 나라와 싸우는 것입니까. 상세히 듣지 못했으니 명확히 알려주셔서 제대로 대응하게 해주십시오."

 

이를 보면, 비록 서태후가 극단적으로 분노하여 서방열강에 약간의 행동을 취했지만, 화가나서 각국에 선전포고를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는 제 정신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관망했고, 시종 자신이 물러날 길을 마련해 놓았다. 

 

그리하여, 비록 선전포고가 발표되었지만, 어느 나라에 대한 것인지는 명확히 표시하지 않는 기괴한 행동, 그리고 그후 표면적으로 가국 공사관을 공격한다고 하지만, 포위만 했지 공격은 하지 않고 암중으로 보호한 것등 황당하고 가소로우며 스스로 모순되는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의화단의 발전과 통제불능은 서태후와 주전파관료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했다. 서방열강도 바보는 아니다. 서태후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서태후는 이 두 세력의 사이에서 균형을 얻어내려 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는 칼날위에서 춤추는 것이나, 불을 가지고 놀다가 스스로 불에 타는 것과 다름이 없다. 결국 팔국연합군이 진격해 들어오면서, 경성은 다시 함락된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서수(西狩)를 떠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조약을 맺는 참담한 국면이 이루어진다. 그 교훈은 침통하면서도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중앙은 엉망진창이고, 상층통치자가 황당무계했지만, 일부 국제적인 시야를 지닌 지방관리들이 그래도 깨끗한 두뇌를 유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호광총독 장지동, 양강총독 유곤일, 양광총독 이홍장, 산동순무 원세개등이 그들이다. 청나라조정이 선전포고를 내린 후, 이들은 신속이 힘을 합쳐서 "조서가 위조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조서를 받들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서방열강과 '동남호보(東南互保)'를 달성한다. 그리하여 동남의 반벽강산은 전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멍청하고 무능한 상층통치자들을 보면서 이홍장이 "정부가 이렇게 황당무계하다니, 구하기가 어렵겠구나" "온 나라가 미친 것같다. 구할 방법이 없다"고 탄식한 것이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