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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1349

황팔자(皇八子) 윤사(胤禩)가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에게 패배한 주요 원인은...? 글: 양각풍(杨角风) ​ 를 본 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강희제(康熙帝)가 임종때 황위를 황사자 윤진에게 넘겨주었으며, 이로 인하여 황팔자 윤사는 수십년간 쏟아부었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을. ​ 비록 그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였고, 사전에 상세한 준비와 배치를 해놓았다. 그러나 상대방의 수준이 너무 뛰어났고, 자신쪽은 백밀일소(百密一疏)가 있었다. 그리하여 황팔자당의 핵심인원들은 장정옥(张廷玉)이 창춘원(畅春园)을 통제하면서 소식이 바깥으로 전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황상을 대표하는 금패영전(金牌令箭)이 소리소문없이 황십삼자(皇十三子) 윤상(​胤祥)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강희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달되기 전의 시간차를 이용하여 풍대대영(丰台大营)을 장악했다. ​ 이제, 상황은 정리되었.. 2024. 4. 22.
주은래(周恩来)의 세 명의 양녀 작자: 미상 ​ 주은래의 큰조카딸이자 전국정협위원을 역임한 주병덕(周秉德)이 쓴 의 157페이지를 보면 등영초(邓颖超)가 문혁기간 손유세(孙维世)가 박해받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주병덕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병덕아, 너는 알고 있느냐? 우리의 양녀가 되면 모두 팔자가 사납구나. 사람들은 나와 백부가 양자가 몇명이고 양녀가 몇명이고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런 일은 없다. 사실 우리가 진정 받아들인 것은 3명의 양녀뿐이다. 한명은 섭정(叶挺)장군의 큰딸 섭양미(叶扬眉)인데, 어린 나이에 부친과 비행기사고로 죽어버렸다. 하나는 연안에 있을 때 큰 비가 내려서 요동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서 깔려 죽어버렸다. 오직 손유세만이 우리와 오랜 시간을 같이 하면서 서로 감정이 깊었는데, 지금 다시 참혹하게 .. 2024. 4. 18.
유비(刘备)의 부인은 10명이 넘었을 것이다. 글: 역사대작회 ​ 유비에게는 감부인(甘夫人), 미부인(糜夫人), 손부인(孙夫人)과 오황후(吴皇后) 네명의 부인이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료의 기재를 보면, 유비의 부인은 이 네명만이 아니다. 칭제이후에 몇명의 비빈을 들였는지에 대하여는 정사에서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아 통계를 내기 어렵지만, 여기에서는 유비가 칭제이전에 몇명의 부인을 거느렸는지를 알아보자. 네 명은 훨씬 넘고,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열명은 넘을 것같다. 아래에서 차례로 살펴보겠다. ​ : "선주(先主, 유비를 가리킴)의 감황후. 패(沛)의 사람이다. 선주가 예주(豫州)에 있을 때, 소패(小沛)에 살았는데, 그때 첩으로 거두었다. 선주는 적실(嫡室)이 여러번 죽어서, 그녀가 항상 집안일을 관장했다(常摄内事)" ​ : "여포.. 2024. 4. 12.
시진핑의 "주체곤경(朱棣困局)" 글: 규양(葵阳) ​ 여러해전에 나진우(罗振宇)가 '독수독과'의 이슈를 얘기한 바 있다. 그가 인용한 것은 조카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주체(영락제)는 일생동안 집권합법성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그후 폭력적이고 냉혈광포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 나진우가 얻어낸 결론은 이러하다. 나쁜 짓을 한 이후의 보응은 하늘의 천벌이나 다른 사람의 보복일 필요는 없고,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심리적으로 뒤틀어질 가능성이 많다. 이런 뒤틀어짐은 당사자로 하여금 더욱 많은 나쁜 짓을 하게 하고, 더더구나 계속하여 해결될 수 없는 싸움을 벌이면서, 스스로의 두려움과 괴로움을 감추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 명나라때 주체가 권력을 잡은 과정에 대하여는 이미 정설이 나와 있다. 그가 아무리 황실의 순수한 혈통이라 하더라.. 2024. 4. 9.
누가 원숭환을 죽였는가 -- 김용의 <원숭환평전>을 읽고.... 글: 고천활해(高天阔海) ​ 은 무협소설가 김용 선생의 글로, 1975년에 썼다. 내가 이전에 이 글을 읽게 된 것은 최근 을 보았기 때문이다. ​ 은 김용선생이 1956년에 발표한 무협소설이다(후기에서 그 자신이 자신의 두번째 소설이라고 밝혔다). 또한 내가 김용무협소설을 가장 먼저 접촉한 것이기도 하다. ​ 내가 당시 읽었던 김용의 무협소설은 을 제외하고,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 , , , , , , .등등. 비록 그의 15부 무협소설을 을 일망타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절반은 읽었다. ​ 당시 또한 고룡, 양우생등의 무협소설도 읽었다. 그러나 가장 좋아한 것은 역시 김용의 작품이다. ​ 무협지외에 나는 언정소설등 통속문학도 읽었다. 개략 젊은이들은 통속문학에 비교.. 2024. 4. 8.
역사상 관우(關羽)가 사용한 병기는 무엇이었을까? 글: 영주해객(瀛州海客) 호북 형주 관우사의 관공상 소설 는 제77회에 관우가 옥천산에 나타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이렇게 적고 있다: "공중에 한 사람이 보였다. 적토마(赤兔馬)를 타고, 청룡도(靑龍刀)를 들고, 왼쪽에는 백면장군이 있고, 오른쪽에는 흑면규염의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함께 구름 끝에서 내려와 옥천산 정상에 내려왔다." 많은 말이 필요없다. 아마도 '적토마' '청룡도'라고 들으면 바로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세상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적토마와 청룡도는 모두 관우의 상징이다. 그리고 적토마와 비교하자면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는 관우에 전속적인 신병으로 더욱 대표성이 있다. 관우와 함께 "온주참화웅(溫酒斬華雄)",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 "필마참안량(匹馬斬顔良)".. 2024. 3. 8.
시진핑(習近平)의 4대가신(四大家臣) 글: 두정(杜政) ​ 2022년 12월의 중공20대때, 1953년 6월에 태어난 당시 나이 69세의 중공당수 시진핑은 관례를 깨고 3연임에 성공했다. 그리고 동시에 유임된 고위관료들 중에서, 4명은 시진핑과 같은 나이이거나 더 나이가 많았다. 거기에는 중앙군사위 부주석 장여우샤(張又俠, 1950년 7월),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왕이(王毅, 1953년 10월), 중앙당교 교장 천시(陳希, 1953년 9월), 홍콩마카오판공실 주임 샤바오룽(夏寶龍, 1952년 10월). 이런 방식은 관례를 깬 것이고, 이들은 아직까지도 물러나지 않았다. '체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이 몇 사람은 시진핑과의 친밀도를 볼 때, 시진핑의 "가신(家臣)"이라 할 만핟다. 그들의 당시에 유임된 것은 아마도 시진핑의 '실질적인.. 2024. 3. 4.
권력과 권위 글: 왕혁(王赫) ​ 2월 26일, 신화망에 따르면, "중앙정치국위원, 서기처서기, 전국인대상위회, 국무원, 전국정협당조성원,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당조서기는 당중앙과 시진핑 총서기에게 업무보고를 했다" ​ 이건 기실 당수에게 충성을 표시하는 연례행사이다. 2017년 "19대"에서 연임된 후, 시진핑은 당장(黨章), 헌법을 수정하여 당수는 1회 연임만 하던 잠규칙(潛規則)을 깨버리고, 국가주석의 연임제한을 취소시켰다. 이에 대한 반발이 일자, 시진핑은 중공취고위층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데 착수한다. 그 조치중 하나가 바로 인데, 거기에는 중앙정치국위원이 매년 시진핑에게 1회씩 업무보고를 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 2018년 3월 21일, 2019년 2월 28일, 신화사는 각각 "중앙정치국동지가 당중.. 2024. 2. 28.
장헌충살인고(张献忠杀人考) (2) 글: 장굉걸(张宏杰) ​ 9 ​ 장헌충은 처음에는 질서정연하게 시작했지만, 그후 이리저리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다가, 마침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어 절망하게 된다. ​ 최초의 신선함도 지나가고, 이제는 조정의 사무를 보는 것고 게을러졌다. 그리고 성깔만 부리게 되었다. 어느날 조회를 진행하는데 자신의 머리에 쓰고 있던 보석을 가득 심은 관이 바닥에 떨어지게 되자, 발로 짓밟아서 엉망진창에 되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 다 짓밟아버리고 나서, 곁에 서 있던 시위의 대첨포모를 빼앗아 머리에 썼다. 그리고 큰소리로 우스면서 말했다: "XXX, 어르신은 역시 이걸 쓰는게 편하군!" ​ 그는 갈수록 자신이 병력을 이끌고 사천에 들어온 것이 잘못이라고 후.. 2024. 1. 15.
장헌충살인고(张献忠杀人考) (1) 글: 장굉걸(张宏杰) ​ 1 ​ 숭정17년(1644년) 육월 이십일일, 중경 통원문 바깥의 광장에 3만7천명의 명군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110개의 긴 줄로 늘어서서 차례로 앞으로 나아갔고, 그들은 앞에 놓인 나무탁자 위로 오른손을 내밀어 탁자 위에 놓았다. 나무탁자 앞에 서 있는 사병은 칼을 내리쳤고, 손은 잘려나갔다. ​ 이는 명나라말기 농민군 장헌충의 부대가 포로로 잡은 명군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육월 이십일, 장헌충은 중경성을 함락시킨다. 이는 그가 사천에 들어간 후 거둔 최초의 대승전이었고, 전군은 위에서 아래까지 기뻐 날뛰었다. 장헌충은 특별지시를 내린다. 비록 명군이 완강하게 저항하였지만, '팔대왕(八大王, 장헌충 자신을 가리킴)'은 이번에 관대함을 베풀어 포로들은 한명도 죽이지 않고, .. 2024.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