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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

광서제의 죽음(3): 광서제와 서태후의 은원

by 중은우시 2021. 9. 16.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대청의 첫손가락 꼽히는 권력자로서 국가관리층면이나, 개인은원이나 살인동기나 실행능력을 볼 때, 서태후가 최종집행자일 것이다. 그녀로서는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광서제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실패할 위험도 없다.

 

첫째, 국가관리층면을 보자. 광서제가 이끄는 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그는 일찌감치 폐인이 되었다. 심지어 상징적인 대우마저도 크게 줄어든다. 백일유신시기에 그는 조조를 핍박하는 한헌제와 같았다. 힘이 없는 황제는 되지 않겠다고 물러나겠다고까지 밀어부쳤다. 서태후는 그러나 네가 황제로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열강이 막지만 않았다면 일찌감치 황위를 바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죽을 때 부의를 황제로 결정했다. 국가관리층면에서 광서제가 할 일은 없었다. 살아남겨두어도 쓸 데가 없다. 그저 거치장스럽기만 한 그는 독주로 죽여버리는 것이 낫다.

 

둘째, 광서제와 서태후는 개인적인 은원이 있다. 마치 쥐가 고양이를 만난 것같다고 해야할까. 이모와 조카관계를 모자관계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하물며 하나는 다른 사람의 정치도구로, 부르면 달려가고 손짓을 하면 물러나기를 원하고, 다른 하나는 남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려 했고, 개성과 생각이 있었다. 이렇게 서로 날카롭게 부딛치니 그 결과는 결국 누구 한명이 죽어야 끝나는 청나라의 궁중투쟁이 된다.

 

셋째, 서태후의 살인동기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광서제가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노력해서 서태후보다 오래 살려고 한 것은 바로 그가 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태후는 그가 자신에게 죽은 후에라도 보복하는 것을 놔둘 수 없었던 것이다.

 

넷째, 대권을 장악한 청나라의 최고권력자로서 살인집행에 있어서 서태후는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광서제를 죽여버릴 수 있다. 비상이 든 독주를 하사하면 가볍게 해결된다.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 그건 서태후의 특유한 권리이다.

 

당연히, 서태후가 광서제를 독살했다는 것은 소문의 성격이다. 설사 모든 논리와 추리가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정사에 당당하게 이런 피비린내나는 기록을 올리기 어렵다. 청나라조정의 자료를 보면, 광서제는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슨 사고가 아니라. 어쨌든 광서제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다지 건강해지지 못했다. 그 본인의 말에 따르면, "유정(遺精)의 병이 이십년이 되었다. 앞의 몇년간은 매월 십여차례 있었고, 최근 수년간은 매월 2,3회에 불과하다. 그리고 꿈을 꾸지 않았는데도 유설하는 때가 있다. 겨울에 비교적 심하다." 그는 신장이 허한 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귀가 울리고 얼굴색은 검도, 오랫동안 감금되어 있으면서 운동부족이며, 게다가 정치적으로 순조롭지 못해서 마음도 울적했다. 우울증을 오래 앓다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말이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에 보인 몸의 이상현상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예를 들어, 내무부에서 데려온 의사는 광서제를 진맥하는 것을 제지당한다. 진료할 수 있었던 양의 굴계정(屈桂庭)은 광서제가 죽기 2일동안 침대에서 구르면서 배가 아프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리고 '얼굴이 검고, 혀가 노래졌다'고 한다. 그가 이전에 앓던 병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증상이라고 했다. 이전에 광서제의 병은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었다. 가장 기괴한 점은 광서제가 죽자 바로 서태후가 죽은 것이다. 함께 황천길을 가는데, 서로 시간차이가 20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어떤 사료에서는 청나라의 외무부우시랑 오정방(伍廷芳)이 일본공사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광서제는 서태후보다 먼저 죽을 것이다." 이근 방증도 있다. 오랫동안 광서제를 모신 운육정(惲毓鼎)도 그의 <숭릉전신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서태후의 병이 위중하다는 것을 알고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고 듣자 즉시 노하여 소리쳤다: '네가 너보다 먼저 죽을 수는 없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이를 근거로 서태후가 광서제를 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대의 전문가들은 광서제의 모발에서 비소농도가 아주 높다는 것을 발견한다. 정상인의 비소함량은 0.14에서 0.59인데, 광서제는 2,404마이크로그램에 이르렀다고 한다. 비상은 극독의 비소화합물이다. 그리하여 전문가는 광서제가 비소중독으로 죽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광서제가 비상을 함유한 단약을 먹어 죽었는데, 아니면 서태후가 쓴 독에 죽었는제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뱃속에 있는 비상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광서제는 서태후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여긴다. 어쨌든 이들간에는 역사상의 원한이 깊기 때문이다. 서태후는 확실히 살인동기가 가장 크다. 그녀는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을 뼛속까지 미워하는 광서제가 오자서처럼 무덤을 파서 시신을 꺼내 채찍질할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녀의 악독함으로 보아, 먼저 손을 써서 죽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하물며 이전에 그녀는 광서제를 '순국'시킬 결심까지 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사상 가장 불쌍한 황제 광서제는 광서34년 십월 이십일일(1908년 11월 14일) 저녁 6시 33분경 사망한다. 그 다음 날 서태후가 사망한다. 그녀는 화려하게 장례식을 치렀지만, 광서제는 죽어도 묻힐 곳을 찾지 못했다(어떤 사료에 따르면, 염을 한 후 5년동안 묻힐 곳을 찾지 못하여 매장되지 못했다고 한다). 처량하기 그지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