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69

제갈량의 다섯가지 엉터리계책 글: 현세보(現世報) 제갈량의 일족이 동오(東吳)에서 한때 잘 나가다가 멸족을 당하는 동안 유비는 동천(東川)을 완전히 장악하고 기세등등하게 잘 나가고 있었으며, 업적은 그의 평생에서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제1차북벌에서 대승을 거두는데, 손권의 2차에 걸친 북벌과 비교하면 유비.. 2016. 1. 7.
제갈량의 팔진도는 얼마나 대단했을까? 글: 복녕객(福寧客) 팔진도전설은 삼국시대때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하나의 진법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제갈량은 적을 맞이할 때 돌맹이로 석진을 쌓아서, 둥갑으로 생(生), 상(傷), 휴(休), 두(杜), 경(景), 사(死), 경(驚), 개(開)의 8개 문(門)을 만들어 변화가 많아서, 10만정병을 막아.. 2015. 6. 16.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진상 글: 생활문적(生活文摘) 마속의 죽음을 얘기하자면, 역대이래로 사람들은 마속이 가정(街亭)의 패배이후, 제갈량의 본영으로 돌아와 부형청죄(負荊請罪)한다. 결국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벤다. 경극 <실가정(失街亭)>이 바로 이 이야기이다. 이런 인상은 기실 나관중의 <삼.. 2015. 2. 13.
제갈량은 왜 위연을 싫어했을까? 글: 조단양(趙丹陽) 육출기산(六出祁山)하면서 영토는 조금도 얻지 못한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피로와 수치가 겹치면서, 병세가 침중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하직할 때, 장사(長史) 양의(楊儀), 장군 위연에게 여러가지로 해석가능한 정치적 유언을 남긴다. 이 유언은 양의가 보기에 자신.. 2015. 2. 12.
무후사(武侯祠)는 왜 성도(成都)가 아닌 면현(勉縣)에 두었을까? 글: 호각조(胡覺照) 여기에서 먼저 설명할 일은 현재 성도의 무후사는 원래 소열묘(昭烈廟), 즉 유비에 제사지내는 묘였다. 단지 나중에 무후사로 바꾸었을 뿐이다. 서촉청권이 공식적으로 결정한 무후사는 바로 한중(漢中)이 면현(勉縣) 무후묘(武侯墓) 원소재지에 있었고, 그후에 묘와 .. 2015. 2. 10.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글: 호각조(胡覺照) 2년을 준비한 후, 원래 이엄(李嚴)이나 다른 장수가 맡으려던 남정(南征)업무를 제갈량은 "여러 장수들의 재능이 나만 못하다"는 것을 이유로, 친히 나서기로 결정한다. 이에 대하여, 심복인 왕련(王連) 마저도 상소를 올려 제지한다: "이곳은 불모의 땅이고, 전염병이 .. 2015. 2. 10.
3건의 사례로 본 제갈량의 "법치" 글: 호각조(胡覺照) 제갈량의 치국에 대하여 자고이래로 평가가 아주 높다. 진수는 <삼국지.제갈량전>에서 이렇게 썼다: "개성심(開城心), 포공도(布公道), 충성을 다하고 이로운 일을 한 자는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내렸고; 법을 어기도 태만히 한 자는 친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2015. 2. 10.
소년 제갈량은 조조의 손에 죽을 뻔했다 글: 유려평(劉黎平) 제갈량이 띠집(茅廬)을 떠나기 전에 조조와는 거의 만난적이 없는 것같다. 그러나, 소년시대에 제갈량의 목숨은 한때 조조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는 한헌제 초평4년(193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 해, 조조의 부친 조숭(曹嵩)은 전란을 피해, 산동 낭야일대에 거.. 2015. 2. 10.
제갈량을 도와준 4명의 조언자 글: 복녕객(福寧客) 역사는 제갈량을 신기묘산(神機妙算)의 인물로 썼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최주평(崔州平), 서서(徐庶), 동화(董和), 호제(胡濟)의 4 사람은 "시종 사이좋게 지냈고, 성의있고 진심으로 잘못된 것에 대하여 직언을 했다." 그래서 이 4사람은 그로 하.. 2015. 2. 10.
한환제(漢桓帝): 미인을 좋아하고, 태감은 더 좋아한 동한황제 글: 노최(老崔) 한장제는 중국역사상 가장 대단한 황제이다. 왜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는데, 누구의 자손이든 모두 황제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아들 유경(劉慶)은 이전의 태자이고, 폐위된 후 94년에 낳은 아들 유호(劉祜)는 한안제(漢安帝).. 2015. 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