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70

제갈량이 염두에 둔 군사후계자는 누구였을까"

글: 정정(丁丁) 제갈량의 임종전에, 개인의 후사에 대한 내용은 얼마 되지 않고, 많은 것은 촉한의 인사안배였다. 정치 방면의 후계자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제갈량이 지정한 사람은 장완(蔣琓), 비위(費褘)이고, 사실상 동윤(董允)도 있다. 이들 3명은 제갈량과 더불어 "촉한사상(蜀漢..

제갈량의 팔진도는 얼마나 대단했을까?

글: 복녕객(福寧客) 팔진도전설은 삼국시대때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하나의 진법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제갈량은 적을 맞이할 때 돌맹이로 석진을 쌓아서, 둥갑으로 생(生), 상(傷), 휴(休), 두(杜), 경(景), 사(死), 경(驚), 개(開)의 8개 문(門)을 만들어 변화가 많아서, 10만정병을 막아..

무후사(武侯祠)는 왜 성도(成都)가 아닌 면현(勉縣)에 두었을까?

글: 호각조(胡覺照) 여기에서 먼저 설명할 일은 현재 성도의 무후사는 원래 소열묘(昭烈廟), 즉 유비에 제사지내는 묘였다. 단지 나중에 무후사로 바꾸었을 뿐이다. 서촉청권이 공식적으로 결정한 무후사는 바로 한중(漢中)이 면현(勉縣) 무후묘(武侯墓) 원소재지에 있었고, 그후에 묘와 ..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글: 호각조(胡覺照) 2년을 준비한 후, 원래 이엄(李嚴)이나 다른 장수가 맡으려던 남정(南征)업무를 제갈량은 "여러 장수들의 재능이 나만 못하다"는 것을 이유로, 친히 나서기로 결정한다. 이에 대하여, 심복인 왕련(王連) 마저도 상소를 올려 제지한다: "이곳은 불모의 땅이고, 전염병이 ..

소년 제갈량은 조조의 손에 죽을 뻔했다

글: 유려평(劉黎平) 제갈량이 띠집(茅廬)을 떠나기 전에 조조와는 거의 만난적이 없는 것같다. 그러나, 소년시대에 제갈량의 목숨은 한때 조조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는 한헌제 초평4년(193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 해, 조조의 부친 조숭(曹嵩)은 전란을 피해, 산동 낭야일대에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