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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무후사(武侯祠)는 왜 성도(成都)가 아닌 면현(勉縣)에 두었을까?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호각조(胡覺照)

 


여기에서 먼저 설명할 일은 현재 성도의 무후사는 원래 소열묘(昭烈廟), 즉 유비에 제사지내는 묘였다. 단지 나중에 무후사로 바꾸었을 뿐이다. 서촉청권이 공식적으로 결정한 무후사는 바로 한중(漢中)이 면현(勉縣) 무후묘(武侯墓) 원소재지에 있었고, 그후에 묘와 사를 나누어 무후사는 한강(漢江)이북으로 옮긴다. 무후사는 무후묘와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게 된다.


후세에 제갈량에 대하여, "공개이려(功蓋伊呂, 공로가 고대의 재상 이윤, 여망 즉 강태공보다 뛰어나다)", '현상표솔(賢相表率, 현명한 재상의 모범이다)", "천하일인", "천고일인"이라는 등의 평가를 보면 유선이 당연히 감격해 마지 않고, 묘를 만들어 융숭하게 제사지냈어야 한다. 그러나 유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각지의 관청에서는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서촉조정에 묘를 세워서 제사지내자는 요구를 올리게 된다. 비록 장완, 비위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형주출신방파체계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유선이 결연하게 반대하니, 조정에서 논의할 때는 '예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결시키게 된다. 예의질서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주 괴이하고 그 자체로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시에 그리고 이전에도 대신의 묘를 세우는 일은 아주 많았다. 아무런 덕이나 공로가 없는 자들을 위하여도 묘를 세웠다. 조조가 제남상에 부임할 때, 일찌기 팔백여개의 이런 묘를 철거한 바 있다.


관방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민간에서는 제사를 지냈다. 민중이 자발적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깊은 원인이 있다. 군정권력이 한 사람에게 평생권력으로 집중되어 있었고, 고압적인 통치를 하다보니 제갈량은 서촉에서 이미 심각한 개인숭배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서촉의 우매하고 무지한 민중은 제갈량을 자신들의 대표로 생각하여 융중하게 제사지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민중의 성원하에, 어떤 사람이 제갈량의 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자고 건의한다. 이를 통하여 제갈량을 정신적인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시키고, 형주출신세력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다.  유선이 반대하는 태도가 강력하자, 건의 자체를 조정하게 된다; 즉 과거 조정논의의 결정을 존중하여, 묘를 분묘에 가까운 곳에 건립하자고 건의한 것이다. 유선은 비록 마음 속으로 싫어했지만,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정권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한중 면현은 성도에서 천리나 떨어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억지로 동의한 것이다. 그러나 묘를 세우는 것은 세우는 것이고, 유선이 통치하던 때에는 서촉에서 공식적으로 제갈량에 제사지낸 적이 없다.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유선은 은원을 분명히 드러냈다. 


유선은 제갈량이 자신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연금한데 대하여 원한이  있었다. 제갈량의 묘를 세우는 일에서 그 단초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