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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의 다섯가지 엉터리계책

by 중은우시 2016. 1. 7.

글: 현세보(現世報)

 

제갈량의 일족이 동오(東吳)에서 한때 잘 나가다가 멸족을 당하는 동안 유비는 동천(東川)을 완전히 장악하고 기세등등하게 잘 나가고 있었으며, 업적은 그의 평생에서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제1차북벌에서 대승을 거두는데, 손권의 2차에 걸친 북벌과 비교하면 유비집단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손권이 조조와 싸우면서 항상 병사와 장수를 잃고 손해보는 것은 손권이었다. 그러나 유비가 조조오 싸울 때는 큰 힘을 들이지 않았고, 병사와 장수를 잃는 것은 오히려 조조였다. 잃은 하후연은 바로 조조의 고굉지신이다. 이렇게 보면, 마치 유비가 최강자인 것처럼 느껴진다. 확실히 이 때의 유비는 문으로 제갈량, 법정, 마량이 있고, 무로는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 위연, 유봉, 맹달, 엄안, 곽준이 있다. 여기에 빅성들의 지지도 있어, 전체 서남지역 운남, 귀주, 사천, 중경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여기에 한중, 형주 두 진퇴가 자유로운 식량생산기지도 확보하고 있었으며, 감숙남부, 호북서부의 일부 지방도 차지하고 있었다. 실력은 확실히 컸다. 만일 그가 제대로 다스렸다면 큰 업적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제갈량이 엉터리계책을 내놓는다:

 

제갈량이 말한다: 당신은 현재 하늘과 백성의 뜻에 따라 황제에 올라야 한다. 유비는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자 제갈량이 다시 말한다: 세상에 재주있고 덕있는 자들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윗사람을 모시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의 덕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즉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이 실망하게 될 것이고, 당신에게 불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극력 추켜세운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추켜세운다. 그리하여 원래 속으로 혼자 기뻐하던 유비의 마음을 움직이고, 결국 유비는 한중왕(漢中王)을 칭하게 된다.

 

중국에서 나무가 크면 바람을 많이 맞는다(樹大招風). 튀어나온 새가 총을 맞는다. 튀어나온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 당시 원술(袁術)이 먼저 황제를 칭하다가 먼저 죽었다. 이때 유비의 실력은 전혀 조조에 미치지 못했다. 조조의 핵심은 서부에 있지 않았다. 유비의 승리는 그저 부분적인 승리이고, 중요하지는 않았다. 원래 일처리는 요란하게 하더라도, 처신은 조용하게 하고, 은인자중해야 한다. 수백년후의 주원장처럼 모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적량(廣積糧), 완칭왕(緩稱王), 고축장(高築墻)"하여 성공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를 정반대의 길로 걷게 했다. 실패하는게 당연하다. 우연의 일치인지, 주원장도 당시에는 삼강중 하나였고, 결국 그가 성공했다. 그러나 촉국은 가장 먼저 멸망한다.

 

과연, 밖에서 위, 오가 연합하기 시작한다. 이번 연합은 실질적인 내용이 있었다. 즉 공동으로 형주를 해결하자는 합의이다. 왕을 칭한 후, 궁전을 짓고, 후궁을 들이고, 태감을 두어야 했다. 그리고 관리들에게 작위를 주고 관직을 주어야 했다 .이것은 모두 돈이 드는 일이다. 병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모으는데 불리했다. 과연 유비가 왕을 칭한 후, 궁전을 짓고, 관사를 짓고, 성도에서 백수까지 모두 4백곳에 관사 우정을 짓는다. 유비는 인생을 즐기기 시작하고, 대신들도 가만히 있지 않아서 백성들만 힘들어 졌다.

 

유비가 왕을 친한 후,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을 오호대장으로 삼고, 제갈량을 군사로 삼고, 법정을 상서령으로, 위연을 한중태수로 삼는다. 이때의 제갈량은 비록 오호상장처럼 말을 타고 군대를 이끌고, 말에서 내리면 백성을 다스리지는 않았지만, 일정한 군권이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그는 군사장군(軍師將軍)에 봉해졌다고 한다. 더 이상 단순한 모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중앙에 있었고, 왕에 가까이 있었다. 소식이 영통했다. 근수루대선득월(近水樓臺先得月, 물에 가까운 누각이 달을 먼저 얻는다)의 이점이 있었다.

 

이때, 제갈량의 마음은 제반 건설에 있었다. 근본적으로 형주, 익주가 천리나 떨어져 있고, 게다가 "촉도난(蜀道難), 난어상청천(難於上靑天)"(촉으로 가는 길을 험해라.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어렵다)인데도.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어떻게 서로 지원할 것인가. 간첩으로부터 위와 오가 연합하여 형주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받은 후, 유비는 제갈량에게 계책을 묻는다. 급히 생각한 다음 제갈량은 더욱 엉터리계책을 하나 내놓는다.

 

손권, 조조가 연합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갈량은 유비에게 이렇게 아이디어를 낸다: 먼저 관우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양양을 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적들이 겁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연합도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엉터이계책이다. 그는 손권, 조조를 너무 무시했다. 손권, 조조도 백전노장이다. 수하에 장수들이 구름처럼 많다. 그들이 일단 연합하면, 유비가 전체 병력을 이끌고 맞서도, 그들은 겁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관우는 겨우 삼군(三郡)의 땅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즉 전체 백성을 병사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관우를 신이라고 여기지만, 살아있을 때는 분명 보통사람이었다. 그와 싸워본 사람도 많고, 그를 잘 이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 그들이 1:1로 싸우는 게임규칙을 따르지 않고 장비와 함께 여포와 싸워도 약간 불리해서, 결국 유비까지 나서도 나서야 여포를 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포는 바로 조조에게 피살당한다.

 

유비가 왕을 칭한 후, 곁에는 여자, 태감이 있고, 한 무리의 아부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총기도 약간 흐려져서 제갈량이 이 건의를 받아들인다. 관우는 원래 일개 무부이고 제갈량이 추켜세워주니까 스스로 대단한 줄 알고 오만해 있었다. 그래서 고군(孤軍)으로 전투를 시작한다. 그는 여러해동안 경영했던 형주를 떠나 북으로 진격한다. 서천(성도)에서 더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도 형주를 기습당할 것은 우려하여, 옛 사람의 본받아 가는 길에 봉화대를 만들어 일단 무슨 조짐만 있으면 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밤에는 불을 올리돌고 해놓았다. 그러면 바로 근거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확실히 믿을만한 것이 아니다. 첫째는 위와 오가 돌연 기습한다면 봉화를 올리지 못할 수 있다. 둘째 전쟁은 일단 발동되면 그렇게 쉽게 통제되고 장악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는 모두 알고 있는 것과 같다. 즉 유명한 '대의실형주(大意失荊州)' 조심하지 않아서 형주를 잃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여 형주를 잃은 것이다(自大失荊州). 관우는 맥성으로 가고 손권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기실, 이때는 성을 지키면서 지원군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면서 바깥에서 한번씩 출동해서 기습할 수 있다. 장료가 합비를 지키면서 강남에서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린아이조차 잠에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할 정도이다. 형주성은 아주 견고하고, 그 당시에는 폭약도 없어서, 형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것은 그래도 하책이라고 할 수 있다. 중책(中策)이라면 관우가 위를 공격하고, 유비가 아래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파릉군, 이릉성을 차지하여, 형주, 익주성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역량을 집중시켜 이 두 개의 떨어진 성을 공격하면 된다. 이 곳은 강동의 본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당시에 치지 않은 것은 손권유비 연합때문이다. 이제 연합이 깨졌으니 이 눈엣가시를 쳤으면 된다. 형주가 주유에게 눈엣가시인 것과 마찬가지이고, 손권을 치는 것이 조조를 치는 것보다는 쉬웠다.

 

상책은 당연히 외교수단을 통하여 손권조조연합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손권유비연합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갈량의 장기이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몰라도 그는 이 방법을 생각지 않는다. 아마도 유비가 왕을 칭한 후, 업무가 많아져서일 수도 있고, 아마도 반대파가 있어서 그들을 상대하느라 바깥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모두 유비가 왕을 칭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이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관우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그저 유비의 북벌성공만 보았지, 손권의 2차에 걸친 북벌이 실패한 것은 보지 못했다. 하물며 현재 상대는 손권,조조 연합이다. 자시는 겨우 수만의 인마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가 북벌한 초반에 그는 약간의 승리를 거두었다. 양양성을 함락시켰다. 단지 한강을 사이에 둔 번성은 함락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제방을 터뜨려 우금의 부대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즉 소위 수엄칠군(水淹七軍)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인이 있다. 첫째, 위나라 장수는 그가 감히 고군을 이끌고 깊이 들어올 줄 몰랐고, 처음에는 경계심이 느슨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큰 물을 이용했는데, 북방의 병사들은 수전에 익숙치 않다. 셋째, 사령관인 우금과 선봉장인 방덕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넷째, 사령관인 우금은 여러 해동안 주둔하면서 전투의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관우는 승리에 취해서 중상을 입고도 전장을 벗어나지 않고, 강퍅자용한다. 서황이 분명 그의 적지 않은 소부대를 물리쳤는데, 그는 그걸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본부대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황이 그를 어찌하지는 못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번 붙어보고나서야 그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불귀의 길에 이미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 제갈량은 다시 하하책(下下策)의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지금은 사람들도 그 문제를 알아차였다. 즉, 아마도 고의로 제갈량은 관우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관우는 다루기 힘들고, 자기의 권력장악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관우는 주유만 못하다. 주유는 대도독이다. 그래봐야 얼마 역할을 하지 못한다. 관우는 사천에 세력이 없다. 그의 세력이래야 별 것이 없다. 하물며 촉은 관우 하나만 잃은 것이 아니라, 수만의 정예병사들까지 잃지 않았는가. 또한 병가의 필쟁지지인 형주까지도 잃었다. 그곳은 중원으로 나가는 가장 좋은 발판임에도.....

 

요화(廖化)가 상용으로 갔을 때, 맹달은 각종 형세를 분석한 후, 유봉에게 병력을 움직이지 말 것을 권한다. 상용에서 출병하지 않은 것이 관우가 죽은 주요 원인이다. 기실 관우가 포위당했을 때는 겨우 5,6백명이었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맥성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그곳을 함락시키는데는 별 힘이 들지 않았다. 동오는 환성(皖城)도 함락시킨 바 있다. 당시 감녕은 성벽을 타고 올라가서 철련으로 태수 주광을 때려 죽인다. 맥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관우에게 도망치라고 놔둔 것이다. 그 후에 길에서 해결하려 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 여몽은 손권에게 말한 바 있다. 현재 관우가 하늘을 나는 날개를 가졌다고 해도 우리의 천라지망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만일 상용에서 출병하면, 역시 하나하나 해결하면 된다. 왜냐하면 상용의 병력을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형주로 오려면 적지 않은 좁은 길을 지나 와야 했다. 도처에 매복이 있을 수 있다. 위,오는 충분히 준비했고, 절대로 무능한 군대가 아니다. 서촉을 보면 상용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다른 지방은 더더욱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구하러 가든 말든 관우는 어쨌든 죽는다. 당연히 구하러 가기는 해야 했다. 구하지 못하는 것은 능력문제이지만, 구하지 않는 것은 태도문제이다. 현재, 상용에서 출병하지 않았으니, 제갈량이 관우를 죽인 주요원인으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책임을 제갈량 자신이나 유비가 지게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법집행이 엄한 제갈량은 정정당당한 속죄양을 찾아낸다. 그는 유비에게 이렇게 엉터리계책을 낸다: 먼저 유봉과 맹달을 찢어놓은 다음에 하나하나 죽여버리라고.

 

세상에 빈틈이 없는 벽은 없다. 맹달의 팽씨성을 가진 친구가 이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마초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 그는 동시에 마초의 친구였다. 그러나 마초는 일생동안 여러 고난을 겪었고, 이때 겨우 자리를 잡아 편안히 지내고 있었다. 그는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그는 팽씨를 배신하고 팽씨는 피살당한다. 아주 총명한 맹달은 위기가 도래했다고 여기고, 유봉을 면죽으로 전보시키는 명령이 내려오자마자 맹달은 좋지 않게 진행된다고 여겼다. 역시 그의 생각이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예 오십여기를 이끌고 위나라의 새로운 주인 조비에게 투항한다.

 

맹달은 문무에 모두 능한 인재여서, 조비는 그를 잘 대해준다. 자주 그와 함께 시를 읊고 그림을 그렸다. 나중에 맹달은 산기상시, 건무장군, 평양정후에 봉해지고, 양양태수 겸 신성태수가 된다. 그의 지위는 적지 않은 위나라의 원로중신들조차 시기할 정도였다.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맹달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맹달이 조비에게 투항했다는 소식이 유비에게 전해졌을 때, 유비는 대노한다. 제갈량은 이때 유비에게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유봉으로 하여금 맹달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다.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면 반드시 하나는 다칠 것이다. 맹달을 죽이면 해를 하나 제거하는 것이고, 죽이지 못하면 성도로 올테니, 그때 다시 유봉을 죽여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엉터리계책일 뿐아니라, 나쁜계책이다. 왜냐하면 최종결과는 5만의 촉국병사를 잃고, 상용도 위나라에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봉은 유비의 명령을 집행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면죽, 상용의 5만기병을 이끌고 적에게 깊이 들어간다. 양양에 도착하여 맹달을 친다. 이때의 제갈량은 전투를 무슨 아이들 장난처럼 여겼다. 당초 관우를 구원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유봉을 도와주지 않는다. 양군이 교전하기 전에, 맹달은 유봉에게 말한다. 너의 의부는 왕을 칭한 후, 이전의 유비가 아니다. 그는 어느 정도 멍청해졌다. 그리고 제갈량은 냉혹무정하니, 네가 돌아간 후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조위에 투항하는 것이 어떠냐. 유봉은 맹달을 크게 욕했을 뿐아니라, 사신을 참한다. 그리고 분개하여 맹달을 공격한다. 맹달은 싸움에서 밀린다. 그러나, 이곳은 어쨌든 남의 땅이다. 서황, 하후상이 지원해주어, 유봉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할 수 없이 상용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상용의 수비장수는 이미 위나라에 투항한 후였다. 이리하여 유봉은 협공을 받게 된다. 결국 유봉은 남은 백여기를 이끌고 성도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울면서 한중왕 유비를 만난다. 이미 제갈량의 말을 들은 한중왕은 유봉의 해명을 듣지 않고 그를 죽여버린다. 나중에 그는 유봉이 위에 투항하라는 서신을 찢고, 사신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 후화막급이 된다.

 

칭왕후의 유비는 연이어 두번이나 패전을 했다. 먼저 형주를 잃고, 다시 상용을 잃었다. 이제 양천의 땅만 남았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제 신단에서 내려왔다.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하여, 제갈량은 다시 유비에게 엉터리계책을 내놓는다.

 

다섯번째 엉터리계책은 유비에게 황제를 칭하도록 권한 것이다. 유비가 말을 듣지 않자, 제갈량은 병을 칭한다. 유비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아들 하나는 유봉(劉封), 다른 하나는 유선(劉禪)이라고 지었다. 합치면 봉선(封禪)이다. 그러니 내심으로 당연히 황제를 칭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의 뜻을 어쩌지 못하는 척하며 황제에 오른다. 제갈량은 승상에 봉해진다. 그래서 황제는 항상 내궁에 거처한다. 이때의 제갈량은 일상적으로 황제를 대리하여 군국대사를 처리한다. 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이미 조운등보다 윗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것도 엉터리계책이다. 황제가 되면 모두 만세를 외치고, 행사등의 규모는 더욱 커진다. 가무승평의 땅, 온유부귀의 곳에서 공덕을 노래하고 아부하고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그래서 더더구나 진실어린 말은 들을 수 없게 되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당연히, 촉나라에서 병력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름 모으는데는 약간의 효과가 있었다. 유비가 되돌아보니, 자신이 혼자서 조조의 군과 싸워서 이기고, 한중을 집어삼켰던 위업이 있었다. 그래서 기분에 취해서, 자신이 진짜 진명천자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관우의 복수를 핑계로 동오를 집어삼키려 한다. 장비가 극력 지원하여, 조운등이 극력 반대했지만 듣지 않는다. 유비가 황제의 위풍을 내세우니 대신들이 감히 반대하지 못한다. 제갈량은 극력 반대의견을 내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그저 탄식했을 뿐이다: 만일 법정이 살아 있다면 좋았을 걸. 법정의 말이라면 황제가 들어주셨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