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70 제갈량은 왜 위연을 싫어했을까? 글: 조단양(趙丹陽) 육출기산(六出祁山)하면서 영토는 조금도 얻지 못한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피로와 수치가 겹치면서, 병세가 침중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하직할 때, 장사(長史) 양의(楊儀), 장군 위연에게 여러가지로 해석가능한 정치적 유언을 남긴다. 이 유언은 양의가 보기에 자신.. 2015. 2. 12. 무후사(武侯祠)는 왜 성도(成都)가 아닌 면현(勉縣)에 두었을까? 글: 호각조(胡覺照) 여기에서 먼저 설명할 일은 현재 성도의 무후사는 원래 소열묘(昭烈廟), 즉 유비에 제사지내는 묘였다. 단지 나중에 무후사로 바꾸었을 뿐이다. 서촉청권이 공식적으로 결정한 무후사는 바로 한중(漢中)이 면현(勉縣) 무후묘(武侯墓) 원소재지에 있었고, 그후에 묘와 .. 2015. 2. 10.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글: 호각조(胡覺照) 2년을 준비한 후, 원래 이엄(李嚴)이나 다른 장수가 맡으려던 남정(南征)업무를 제갈량은 "여러 장수들의 재능이 나만 못하다"는 것을 이유로, 친히 나서기로 결정한다. 이에 대하여, 심복인 왕련(王連) 마저도 상소를 올려 제지한다: "이곳은 불모의 땅이고, 전염병이 .. 2015. 2. 10. 3건의 사례로 본 제갈량의 "법치" 글: 호각조(胡覺照) 제갈량의 치국에 대하여 자고이래로 평가가 아주 높다. 진수는 <삼국지.제갈량전>에서 이렇게 썼다: "개성심(開城心), 포공도(布公道), 충성을 다하고 이로운 일을 한 자는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내렸고; 법을 어기도 태만히 한 자는 친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2015. 2. 10. 소년 제갈량은 조조의 손에 죽을 뻔했다 글: 유려평(劉黎平) 제갈량이 띠집(茅廬)을 떠나기 전에 조조와는 거의 만난적이 없는 것같다. 그러나, 소년시대에 제갈량의 목숨은 한때 조조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는 한헌제 초평4년(193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 해, 조조의 부친 조숭(曹嵩)은 전란을 피해, 산동 낭야일대에 거.. 2015. 2. 10. 제갈량을 도와준 4명의 조언자 글: 복녕객(福寧客) 역사는 제갈량을 신기묘산(神機妙算)의 인물로 썼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최주평(崔州平), 서서(徐庶), 동화(董和), 호제(胡濟)의 4 사람은 "시종 사이좋게 지냈고, 성의있고 진심으로 잘못된 것에 대하여 직언을 했다." 그래서 이 4사람은 그로 하.. 2015. 2. 10. 이전 1 2 3 4 5 6 7 8 ···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