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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을 도와준 4명의 조언자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복녕객(福寧客)


역사는 제갈량을 신기묘산(神機妙算)의 인물로 썼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최주평(崔州平), 서서(徐庶), 동화(董和), 호제(胡濟)의 4 사람은 "시종 사이좋게 지냈고, 성의있고 진심으로 잘못된 것에 대하여 직언을 했다." 그래서 이 4사람은 그로 하여금 "잘못을 적게 저지르게" 해주었다(<촉지.동화전>). 이는 그들이 제갈량의 사상이 비교적 객관적이고 실제적으로 되고, 과오를 적게 범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갈량은 중국역사상 다른 사람의 의견을 널리 들은 최고의 인물이다.


<삼국지.촉지> 권5 <제갈량전>에서 <원자(袁子)>를 인용하여 제갈량은 "실질을 중시하지 명성을 중시하지 않는다(治實不治名)"고 하였다. 이 말은 제갈량의 일생활동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을 개괄한다.


아쉽게도 천백년이래, 이를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갈량은 정치가, 군사가일 뿐아니라, 철학가였다. 한나라때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신인합일(神人合一)'설과 반대로 제갈량은 이렇게 말한다: "조화는 손에 달려 있고, 생사는 사람에 달려 있다."(<제갈량집.문집>) 권2 <음부경서(陰符經書)>. 그는 사람의 작용을 아주 강조한다. 제갈량은 "다견다문(多見多聞)"을 중시했다. 그는 "다견위지(多見爲智), 다문위신(多聞爲神)"이라고 생각했다. 사물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인식을 얻기 위하여, 그는 "만물을 눈으로 보고, 중음을 귀로 듣는다(萬物當其目, 衆音佐其耳)"는 것을 해냈다(같은 책 권3 <편의십육책.시청)>


특히 주목할 점은 그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에 반대하고 전면적으로 문제를 관찰하도록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찌기 법정(法正)의 사상이 편면적이라고 느꼈다. <치법정서>에서 법정이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촉지.제갈량전>). 그는 "위를 올려보는 자는 그 아래를 무시해서는 안되고, 앞을 바라보는 자는 그 뒤를 무시해서는 안된다."(<편의십육책.사려>)."시미지기(視微知幾). 청세지대(聽細知大)". 고하, 전후, 은현, 대소의 두 방면은 서로 연결된 것이다. 모두 주의해야 한다. 절대로 어느 하나만을 봐서는 안된다. 절대로 자잘한 것이라고 하여 가볍게 흘려넘겨서는 안된다. <편의십육책.치란편>에는 그가 정치를 난세에서 치세로 만들려면, "선리강(先理綱), 후리기(後理紀); 선리령(先理令), 후리벌(後理罰); 선리근(先理近), 후리원(後理遠); 선리내(先理內, 후리외(後理外); 선리본(先理本), 후리말(後理末); 선리강(先理强), 후리약(後理弱);  선리대(先理大), 후리소(後理小); 선리신(先理身), 후리인(後理人)" 이렇게 선후를 구분한 것은 "이강즉기장(理綱則紀張), 이령즉벌행(理令則罰行), 이근즉원안(理近則遠安), 이내즉외단(理內則外端), 이본즉말통(理本則末通), 이강즉약신(理强則弱伸), 이대즉소행(理大則小行), 이상즉하정(理上則下正), 이신즉인경(理身則人敬)"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전자만 돌보고, 후자는 돌보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한다.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제갈량이 승상의 신분으로 "직접 장부내용을 대조확인했다(自校簿書)"는 것을 알 것이다. 평론가들은 왕왕 이를 제갈량의 '사무주의(事務主義)'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평론을 하는 것은 연구자들이 제갈량의 사상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갈량은 사물의 두 방면은 같이 고려하라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 큰 일이라는 것은 "바깥으로 손권과 우호적으로 지내고, 안으로는 정치를 잘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잘 처리해야 했다; 작은 일이라는 것은 '자교부서'와 같은 것인데, 이것도 무시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대소간에는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았다. 큰 것을 처리하면서도 작은 일을 경시하지 않았다. 자교부서에 관하여, 승상부의 주부인 양옹(楊顒)은 일찌기 "좌이론도(坐而論道)를 해야 삼공(三公)이라 할 수 있다", "병길은 길에서 쓰러져죽은 사람에 대하여는 묻지를 않고, 소가 기침하는 것을 걱정했다." "진평은 돈과 곡물의 수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로 제갈량에게 그러지 말 것을 권한 바 있다(<촉지.양희전>에서 인용한 <양양기>).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이런 것은 치명불치실(治名不治實)이다. 승상부의 장부는 국가의 각 분야의 상황을 반영하는데, 제갈량이 촉국을 잘 다스리려면 어찌 뒤적여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치실(治實)에서 제갈량에게는 고귀한 점이 있다. 그는 한 사람이 보고 들은 것은 어쨌든 유한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집광사(集廣思), 광충익(廣忠益)"(집사광익)의 사상을 내놓는다. 집사광익은 제갈량의 민주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명언이다. 그는 그가 융중에 있을 때, 처음에 최주평을 사귀었다고 한다. "여러번 득실에 관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서원직(서서)과 교분을 가진다. "근견계회(勤見啓誨)"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처자불혹(處玆不惑)"이라는 말을 써서 서서의 집서광익을 칭찬한다(<촉지.동하전>) 익주에서 그는 '집광사.광충익'을 승상참서의 일처리방침으로 삼는다. 그는 '여러 아랫사람의 말을 듣고 살펴서 채택하여야 한다고 했다(<편의십육책.시청). 그는 동화가 7년간 참서(參署)하면서 그에 대하여 "매언필진(每言必盡)", "사유부지(事有不至), 지어십반(至於十反), 내상계고(來相啓告)"했다고 하며, 호제는 그에게 "여러번 간언하여 못하게 하였다(數有諫止)"고 했다. 그는 그가 최주평, 서서, 동화, 호제의 네 사람과 시종 잘 지냈고, 진심으로 성의있게 잘못된 것에 대하여 직언을 했다. 이 네 사람이 그에게 권했기 때문에 '과오를 적게 저지를 수 있었다.' 즉 그의 사상이 비교적 객관적이고 실제적이게 해주고, 과오를 적게 범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갈량을 가리켜,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고치고 잘못을 고집하지 않았다."(<촉지.제갈량전>에 붙은 <동궐전>에서 인용한 <한진춘추>) 그는 고대의 보기 드문 '집광사'의 이점을 아는 인물이었고, 민주정신을 갖춘 인물이었다. 집사광익의 목적은 바로 실질을 추구하고, 실질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가 융중, 익주에서 집사광익을 추구했다는 것을 보면 그는 실질을 추구하고 실질을 중시하는 정신이 일관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일찌기 그가 융중에 있을 때, 제갈량이 형세를 분석하면서, 왜 그렇게 정확했을까에 대한 수수께끼의 해답을 말해준다. 그가 융중에 있으면서 북방의 조조, 강동의 손권, 형주의 유표, 익주의 유장, 한중의 장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정족지세'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은 형주,익주를 아우르고, "밖으로는 손권과 우호적으로 지내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잘 한다"는 등 일련의 승리를 거두기 위한 방침과 정책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종일관 '치실불치명'하게 문제를 연구하고, 문제를 분석하고, 집사광익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