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호각조(胡覺照)


2년을 준비한 후, 원래 이엄(李嚴)이나 다른 장수가 맡으려던 남정(南征)업무를 제갈량은 "여러 장수들의 재능이 나만 못하다"는 것을 이유로, 친히 나서기로 결정한다. 이에 대하여, 심복인 왕련(王連) 마저도 상소를 올려 제지한다: "이곳은 불모의 땅이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곳입니다. 일국의 희망이 위험을 무릎쓰고 갈 곳은 못됩니다."(<삼국지.왕련전>). 다만 왕련은 제갈량의 더욱 깊은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225년 봄, 제갈량은 병력을 이끌고 수로로 월준에 들어간다. 마충(馬忠)을 파견하여 동남쪽으로 병력을 장가(牂牁)(치소는 지금의 귀양 부근. 관할지역은 귀주성 대부분을 포괄한다)로 출병하여 주포(朱褒)를 공격한다. 이회(李恢)를 파견하여 익주(익주군, 치소는 전지, 지금의 운남성 남녕이동)로 출병한다. 제갈량의 한 갈래 부대가 월준에 도착했을 때, 원래 고정(高定)의 부대가 집결했을 때 치려고 했다. 누가 알았으랴 고정의 부하가 쿠데타를 일으켜, 옹개(雍)와 곁의 부하들을 죽이고, 맹획(孟獲)을 수령으로 옹립한다. 제갈량의 주력부대가 고정을 격파하고, 그를 죽여버린다. 맹획은 내분이후 아직 통합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돌연 날개 하나가 꺽인 것이다. 할 수 없이 부대를 이끌고 익주군으로 철수한다. 이때, 마충은 장가의 주포를 섬멸하고 그를 참한다. 이회의 부대는 처음에 패배하였으나 나중에 승리를 거둔다. 오월, 제갈량은 부대를 이끌고 남으로 노수(瀘水)를 건너, 운남으로 진군하여 맹획을 생포한다. 그후 '칠종칠금'의 천고미담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진춘추(漢晋春秋)>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제갈량의 부대가 남중(南中)에 도착했을 때, 맹획이 소수민족들 가운데 명망이 아주 높다는 것을 듣게 된다. 그래서 그를 생포하여 감화시키기로 결정한다. 산채로 붙잡은 후, 맹획에게 촉군의 진영을 구경시켜준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 군이 어떠한가?" 맹획이 대답한다: "과거에 나는 촉군의 허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실패했다. 이제 나에게 보여주어 보게 되었다. 겨우 이 정도일 뿐이다. 나는 분명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은 웃는다. 그리고 그를 돌려보내 군대를 정비한 후 다시 싸운다. 무릇 일곱번 풀어주고 일곱번 다시 잡는다는 것은 제갈량은 여전히 맹획을 돌려보낸다. 이때 맹획은 감동한다. 그리하여 간절하게 말한다: "당신은 하늘같은 신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남중의 사람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어떤 사람은 맹힉을 석방하는데 반대의견을 내놓는다. 제갈량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외인(촉군장수를 말함)을 남기게 되면, 반드시 충분한 수의 군대도 남겨야 한다. 병력을 남기게 되면 먹을 양식이 없다. 이것이 첫번째 난제이다. 오랑캐는 이제 막 패전하여, 부모형제중 죽은 자들이 아주 많다. 만일 외인을 남기면서 병력은 남기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남을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난제이다. 하물며, 오랑캐는 계속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살육하는 죄행을 저질렀고 스스로 죄악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외인을 남긴다면, 서로간에 불신할 것이다. 이것에 세번째 난제이다. 지금 나는 병력을 남기지 않으려 한다. 식량도 운송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남중지구를 우리에게 복종하게 할 수 있다면, 존비상하를 알게 되면, 피차간에 상안무사(相安無事)할 수 있다."


역대이래로 사학자들은 이 기록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삼국연의>에서는 칠종칠금을 더더욱 생동감있게 그렸다. 그러나 아래의 몇 가지 점은 상세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같다.


첫째, 냉병기시대에, 서촉군대는 절대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이회의 부대가 처음에 패배하다가 나중에 승리한 결말은 바로 이 점을 증명한다.


둘째, 촉군은 먼 길을 원정와서, 주객의 기세는 자리바꿈하기가 어렵다. 천리먼길을 식량운송해야 하고, 낯선 지형도 촉군에 불리하다.


셋째, 전쟁은 병기가 서로 맞부닥치는 것이고, 지혜와 용기를 겨루며, 피가 흘러 강이 되고 시체가 쌓여 산이 되는 것이다.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과 같은 게임이 아니다. 아이들 장난도아니다. 조금만 실수하면, 우열지세는 바로 역전된다. 이전의 공로는 바로 수포로 돌아간다는 교훈이 자주 발생한다. 조심스럽기로 유명한 제갈량이 어찌 칠종칠금과 같은 게임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넷째, 승리라고는 하지만, 매번 승리의 결과는 서로 달랐다. 실패한 측의 총사령관은 전쟁터에서 죽는다.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날아온 화살에 맞을 수도 있고, 포위망을 돌파하여 도망칠 수도 있다. 한번의 예외도 없이 산채로 붙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섯째, 칠종칠금은 고금에 없는 전쟁신화이다. 제갈량의 보기드문 풍성한 업적이다. <삼국지.제갈량전>의 사료의 많은 것은 원천이 제갈량 본인 혹은 부하이다. 제갈량은 전적을 편찬하는데 아주 진지했다. 그런데, 전기에 왜 칠종칠금에 관해서 아무런 말도 언급되어 있지 않을까? 확실히 진수는 아무런 근거없는 지나친 칭송을 과감히 포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쪽사람들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칭송도 역사적 근거가 없다. 이와 반대로 <삼국지>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제갈량의 제5차 "북벌" 전에, "남이 유주(劉胄)가 반란을 일으킨다. 장군 마충이 격파하여 평정한다."(<삼국지.제갈량전>). 확실히 칠종칠금은 <한진춘추>가 아무런 전쟁상식이 없는 항간의 소문을 적어넣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에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덕으로 남방의 '오랑캐'를 감화시켰다는 사료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전혀 상반된 사후조치를 찾아볼 수 있다.


첫번째 수단은 현지 민중의 미신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화양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남중의 민중의 풍속습관은 귀신과 무당을 믿고, 저주를 믿으며, 인과응보를 믿는다. 그래서 관리들은 그들의 우매함을 이용하여, 이런 수단으로 '만이(蠻夷)'를 제약했다. 제갈량은 부대를 이동시키기 전에 남중에 그림을 그린다. 먼저 해,달,하늘과 땅을 그리고, 여러 신하들과 성을 그린다; 다시 신룡을 그리고, 용이 만이(오랑캐) 및 소, 말 낙타, 양을 낳는다; 그 뒤에는 각급 관리가 큰 말을 타고, 화려한 마차를 타고, 아래를 순시하며 다독이고 구휼한다. 그리고 민중이 양을 끌고 술을 가지고 금은보화를 바치는 장면을 그린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는 '만이'에게 하사한다. '만이'는 이 그림을 아주 중시하여 목숨을 담보로 약속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서촉이 멸망하고, 조정이 관리를 남중에 파견할 때마다, '만이'는 이 그림을 내놓아 관리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둘째 수단은 '분화'이다.


제갈량이 남정한 이후, '만이' 청강족(靑羌族)' 일만여가를 내지로 이주시킨다. 그리고 오부(五部)로 나누어 집안의 건장한 남자 만여명으로 소위 '비군(飛軍)'을 조직한다. 자주 선봉에 서서 적진을 뚫는데 쓰였다. 이들이 나서면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노약자와 병약하거나 장애가 있는 자들은 각각 내지의 초(焦), 옹(雍), 루(婁), 찬(爨), 맹(孟), 양(量), 모(毛), 이(李)씨등의 대성들에게 분배하여 사가부곡(私家部曲, 사병)으로 삼는다. 땅은 넓고 사람은 드문 남중의 소수민족에 있어서, 만여호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제갈량이 이렇게 한 것은 한편으로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고, 다른 한편으로 부저추신으로 남중 소수민족의 역량은 분화하여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동한때는 변방에 이민을 보내어 인구를 채웠는데, 이때는 그 반대로 행한 것이다. 이를 보면 군벌혼전으로 인구격감의 결과가 초래된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수단은 나누어 통치하는 것이다.


이전의 익주군, 장가군, 영창군, 월준군의 4개군은 지역이 지나치게 넓고, 소속부의 인구가 많아서, 그 안의 호족세력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어, 손쉽게 촉한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익주군을 건녕군으로 개명하고, 건녕군, 영창군의 중간에 운남군을 만든다; 건녕군과 장가군의 중간의 땅에는 흥고군을 만든다. 그외에 건위군에서 주제군을 분리시킨다. 이는 분리통치의 채략이다. 근본적으로 서촉정권은 '만이'와의 사이에 불화하는 근원을 해결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덕으로 감화시킨 모습은 엿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