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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39

무측천 휘하의 4대살수 글: 월초(越楚) 최근에 어느 사람이 쓴 글에서 무측천이 집권하고 이쓴 동안에 양대 "혹리(酷吏)"를 임용하여 이당종실과 공신을 도륙했다고 하였다. 본인은 그들을 "혹리"라고 불러주는 것은 지나치게 미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관료통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무측천이.. 2008. 1. 9.
무측천의 부친은 어떻게 집안을 일으켰는가? 글: 몽만(蒙曼) 무측천은 아마도 중국역사상 영향력이 가장 큰 여성일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당태종과 당고종의 두 황제였고, 그녀의 아들중에서도 당중종과 당예종 두 황제가 있다. 동시에 그녀 자신도 유일무이한 여황제였다. 그녀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녀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 2008. 1. 4.
측천무후는 정말로 친딸을 목졸라 죽였는가? (II) 저주사건이 황후폐위를 촉발시킨 도화선이다. 왕황후의 저주사건에 대하여, 여러 사서에 비교적 많이 기록되어 있다. 성격에 대하여는 논쟁이 있지만, 완전히 날조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회요>>에서는 그저 무측천이 "왕황후와 그의 모친 유씨가 저주의 무술을 썼다.. 2007. 12. 10.
측천무후는 정말로 친딸을 목졸라 죽였는가? (I) 글: 맹헌실(孟憲實) 무측천(武則天, 則天武后, 이름은 照, 측천무후는 스스로 한자 &#26316;를 만들어 자기 이름으로 썼음)은 중국의 역사상 돌연 나타났고, 역사의 기적을 이루어낸 인물이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어떻게 여자황제가 될 수 있었는가? 그러나, 그녀의 성공 뒤에는 얼마나 많은 댓가를 치.. 2007. 12. 10.
무측천 모친의 신분내력 무측천의 신세내력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진인각(陳寅恪) 선생은 <<이당무주선세사적잡고>>라는 글에서 무측천의 부친인 무사확(武士?)의 집안내력이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무측천과 불교>>라는 글에서, 무측천의 모친인 양씨가 "수나라 종실의 관광 .. 2007. 6. 21.
무측천: 중국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한족 황제 중국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던 한족 황제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바로 무측천(624-705)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무조(武照)였으며, 황제를 칭한 후에는 무조(武&#26316;)로 바꾸었다. 그녀는 병주 문수(현재의 산서성 문수현) 사람이었고,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였다. 그녀가 황제에 오른 후에.. 2006. 11. 2.
건릉(乾陵, 측천무후, 당고종의 합장묘)에 얽힌 이야기 (2) 건릉은 도굴된 적이 있는가? 1960년, 몇몇 농민이 폭약으로 돌을 깨다가, 부주의로 무척천의 묘도입구를 깬 적이 있다. 이 묘도입구는 참으로 국가의 절대기밀사항이었다. 도굴군들이 천여년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고, 황소(黃巢)가 40만대군을 시켜 수년을 팠지만 파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 2006. 10. 20.
건릉(乾陵, 측천무후, 당고종의 합장묘)에 얽힌 이야기 (1) 건릉은 진시황릉과 더불어 중국 고고학계의 2대 프로젝트이다.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자황제 무측천(측천무후)가 그녀의 남편인 당고종과 합장되어 있는 무덤으로, 전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두 명의 황제의 합장묘이다. 중국에서 건릉을 발굴할 것인지, 진시황릉과 더불어 핫이슈중의 하나이다. 발굴할.. 2006. 10. 20.
무측천의 뒤를 이어 황제자리를 꿈꾸던 여인들 무측천(武則天)은 당태종 이세민의 재인(才人, 후궁중 낮은 등급)이었고, 이세민의 아들인 당고종 이치(李治)의 황후였으며, 중국을 수십년통치한 "측천대황제(則天大皇帝)"였다. 그녀는 중국에서 유일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황제였다. 무측천은 총명하고 영리하였으며, 속이 깊고 음험하고 독랄하였.. 2006. 6.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