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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무측천 모친의 신분내력

by 중은우시 2007. 6. 21.

무측천의 신세내력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진인각(陳寅恪) 선생은 <<이당무주선세사적잡고>>라는 글에서 무측천의 부친인 무사확(武士?)의 집안내력이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무측천과 불교>>라는 글에서, 무측천의 모친인 양씨가 "수나라 종실의 관광 양웅의 동생인 시안후 양달의 딸"이라고 하였다.

 

양달(楊達)은 확실히 수나라 종실의 양웅(楊雄)의 동생이다. <<수서>> 제43권에 그의 전이 있다. 만일 무측천의 모친 양씨가 양달의 딸이라면, 그녀의 신분내력은 대단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왜 역사서에서 이에 관하여 별로 기록하지 않고 있을까? 우리가 보는 <<구당서. 후비전>>에는 후비의 출신에 대하여 조사해서 확인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고조의 황후인 두씨에 대하여 그의 모친이 주무제의 언니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고, 당태종의 황후 장손씨에 대하여는 그의 모친이 수나라때 양주자사 고경덕의 딸이라고 적고 있다. 양달은 관직이 납언(納言)에 이르렀고, 비록 주무제만은 못하지만, 양주자사보다는 고귀한 인물이다. 만일 무측천의 모친이 확실히 양달의 딸이라면, 통상적으로 보면 당당하게 역사서에 기재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역사서에 기록하지 않았다.

 

<<구당서>> 권6, <<측천황후본기>>를 보면, "부친 사확, 수나라 대업말에 응양부 대정"이라고 적고, 모친에 대하여는 아예 언급이 없다. 권183 <<외척전>>에도 무사확이 양씨를 처로 삼았다는 내용만 있지, 이 양씨가 수나라 종실 양달의 딸인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신당서>>도 마찬가지이다. 권76 <<후비상. 측천순성황후무씨전>>에서 그저 무의 부친인 사확이 양씨를 처로 취했다고만 되어 있지, 양씨의 출신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당고종이 무측천을 황후로 삼고자 했을 때, 반대파들의 가장 중요한 논거의 하나가 바로 무측천의 출신이 미천하다는 것이었다. 만일 무측천의 모친이 확실히 수나라 종실인 양달의 딸이었다면, 출신이 미천하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고종과 무측천은 왜 당시에 무측천의 모친은 고귀한 가문 출신이라고 밝히지 않았던 것일까?

 

무측천의 출신은 당시에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 낙빈왕(駱賓王)은 그녀가 "한미(寒微)"하다고 적었다. 성력원년(689년) 돌궐의 묵철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 칸은 하늘의 아들이다. 무씨와 같은 자잘한 성씨와는 비교할 수 없다"라고 한 바 있다. 무측천 자신도 그녀의 출신이 비천하다는 것을 알아서, 이에 대하여는 아주 민감했고, 다른 사람들이 무씨를 멸시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이러한 심리상태로 보아서는 그녀가 황후에 오를 때 반대파들에 의하여 출신이 미천하다고 공격을 받았으르모, 아마도 무측천은 황후가 된 후에 자신의 출신을 날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도 부계는 날조가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모계를 날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점에 관하여 명확한 사료의 증명은 없다. 그러나, 약간의 단서는 있다.

 

<<신당서>> 권76 <<후비상. 측천순성황후무씨전>>에서 무측천은 잔혹한 투쟁을 거쳐 황후의 자리에 오른 후, "황후는 <<외척계>>를 바쳐서 조롱하고 떠드는(譏?) 내용을 설명했다" 여기서 조롱하고 떠드는 내용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무측천이 황후가 되자, 조정의 신하들이 이에 불복하여 그녀에 대하여 의론이 분분하고 풍자하고 조롱하는 자,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자가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국면을 장악하기 위해서, 무측천은 문인을 찾아 그녀의 출신내력을 날조하여 만들어낸 후, <<외척계>>라는 형식으로 공포한 것이며, 여러 사람의 의문에 답을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교(李嶠)가 쓴 <<반룡시비>>에 의하면 이 이야기를 아주 잘 꾸며내고 있다. 이교는 <<반룡시비>>에서 "이때, 황제(무측천의 부친인 무사확이 무측천 즉위후 황제로 추존되어 있었음)이 먼저 본부인자리가 비어있게 되자, 고조는 친히 짝을 찾아나섰고, 황제에게 말하기를 "수의 납언인 수녕공 양달이 재주가 뛰어난데, 지금 그의 딸이 현명하여 덕으로 보좌할 수 있을 만하다...고조는 스스로 황제를 위하여 혼주가 되었다" 이 비문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그래서 나중의 사가들이 전혀 채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가 보는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에는 당고조의 사적에서 이처럼 무사확을 위하여 혼주가 된 내용의 기재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무측천이 어용문인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출신내력을 고의로 날조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신구당서>>에서 무측천의 모친인 양씨가 수나라 종실인 양달의 딸이라는 기재는 딱 두 곳에 나온다. 한 곳은 <<신당서>>권100 <<양공인전>>이고, 다른 하나는 <<구당서>> 52권 <<후비전하. 현종원헌황후양씨전>>이다. 전자에서는 양공인을 재상에 임명하면서 무측천이 우리 집안과 외가집안에서 재상이 나왔다는 내용을 얘기하는 장면이 있고, 후자는 황후 양씨가 증조부가 양달이며 수나라 납언이다.  무측천의 모친집안이다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 두 곳은 확실히 무측천이 스스로의 신분을 계속 선전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외에 두 곳의 방증이 더 있다. 수나라종실 양달에게는 자녀가 있었다. 즉 만일 무측천의 모친인 양씨가 양달의 딸이라면, 그녀에게는 당연히 형제가 있을 것이고, 무측천이 황제가 된 이후에, 무측천은 분명히 이들 사촌형제들을 자랑하고 그들의 지위를 높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주소량이 주편한 <<당대묘지회편>>에서 <<대당고천우기주사호참군사양군묘지명병서>>를 보면, 묘지주인의 이름은 양구철이고, 조부가 양달, 부친이 양칙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무측천의 모친이 바로 양달의 딸이라면 양칙과는 오누이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측천에게는 외삼촌이 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묘지명에는 무측천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없다. 집안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을텐데 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칙의 관직이 현령(그것도 외딴 지역)에 머물렀는데, 만일 무측천의 외삼촌이었다면 어찌 관직이 겨우 현령에 머물고 말았겠는가. 양구철도 사호참군이라는 낮은 직위인데, 만일 무측천의 4촌동생(오빠)라면 어찌 이런 낮은 직급에 머물고 말았을 것인가?

 

또 하나의 방증도 역시 추측이다. <<수서>> 권43 <<양달전>>에는 수나라 종실인 양달이 "학행"이 있는 인물이라고 되어 있고, 역사서에서는 "사람됨이 온후하고, 기품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무측천의 모친인 양씨가 양달의 딸이었다면, 그녀도 이러한 집안의 기품을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그녀의 언행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복수를 위하여 그녀는 무사확의 전처의 아들을 핍박하여 살해하고, 미색을 탐하여, 그녀는 자기의 외손자인 하란민과 사통하였다. 무측천과 그녀의 언니등등도 마찬가지였다. 당나라초기의 대체적인 기풍이기는 하지만, 무씨집안은 더욱 심한 편이었다. 이러한 점을 참조하면, 그녀의 모친집안이 학식있는 수나라 종실가문이라는 것을 믿기는 힘들 것이다.

 

아마도 무측천의 모친 양씨는 아마도 무사확이 생활한 동일한 지역 즉, 지금의 산서성에서 출신이 한미한 여자였을 것이다. 무측천이 황후가 된 후에, 그녀의 신분을 높일 필요가 있어서, "대국부인(代國夫人)"에 봉했다. 이렇게 대국이라는 지명을 쓰게 되면 신분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 지방색채를 담지 않은 것으로 바꾸기 위하여 "영국부인(榮國夫人)"으로 바꾸어 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