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월초(越楚)
최근에 어느 사람이 쓴 글에서 무측천이 집권하고 이쓴 동안에 양대 "혹리(酷吏)"를 임용하여 이당종실과 공신을 도륙했다고 하였다. 본인은 그들을 "혹리"라고 불러주는 것은 지나치게 미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관료통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무측천이 누구를 죽이고 싶으면, 그들은 그를 죽여버렸다. 이는 강호흑도에서의 "살수(殺手)"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살수"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실질에 부합할 것이다. 그리고 무측천이 휘하에 기른 살수는 두 명이 아니었고, 신구당서와 자치통감을 살펴보면 무측천은 최소한 '4대살수'를 길렀다. 그들은 각각 삭원례(索元禮), 내준신(來俊臣), 주흥(周興), 후사지(侯思之)이다. 이 4명은 모두 악명이 자자한 망나니이다. 하나하나 마음이 독하고 손이 매웠으며, 사람을 죽이기를 밥먹듯 하였던 자들이다.
삭원례는 무측천이 기용한 최초의 '살수'였다. 여황제에게 아무나 밀고했고, 무측천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조정에서 반대파를 제거했다. 삭원례는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봉해졌고, 형옥(刑獄)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는 고문에 사용하는 철롱(鐵籠)을 발명하였는데, 철롱안에는 쇠침을 가득 박아두었다. 만일 그가 지시하는대로 불지 않으면, 바로 머리에 못이 박혀 뇌수를 사방으로 흘려야 했다. 그는 또한 혐의자를 거꾸로 매단 후에 머리에 무거운 돌을 달아두기도 했다; 혹은 쇠로 머리를 고정시킨 후에 빈틈으로 나무못을 박기도 하였다; 십자형의 나무틀위에 묶어놓고, 나무틀을 빠르게 회전시켜, 오장육부가 위치를 이탈하여 기절할 때까지 돌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수법으로 한가지를 했으면 열가지를 불고, 열가지를 했으면 백가지를 불게 하였다. 삭원례의 독수에 죽어간 원혼이 수천명에 달하였다.
삭원례와 비견할 수 있는 또 한 명의 '살수'는 무뢰한 출신의 내준신이다. 그는 일찌기 강간강도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던 적이 있다. 나중에 여러번 상소를 올려 무측천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중용되었고, 관직은 좌대어사중승에 이르렀다. 이 내준신은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서 삭원례보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이론과 실제를 연결시켰다. 그는 주남산(朱南山)과 합작으로 <<나직경(羅織經)>>을 펴냈는데 죄명을 엮고, 억울한 사건을 만들어내는 경전이었다. 내준신은 일련의 혹형을 개발해 냈고, 거기에 섬뜩한 이름들을 붙였다. 무슨 "봉황전시(鳳凰展翅, 봉황이 날개를 펼치다)", "선인헌과(仙人獻果, 신선이 과일을 바치가)", "여구발궐(驢駒拔橛, 당나귀가 말뚝을 뽑다)"등등이었다. 하나하나 치명적인 고문수단이었다. 그리하여, 위로는 친왕권신부터 아래로는 평민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내준신의 손에 걸리기만 하면, 거의 서서 걸어들어가서 누워서 나왔다.
모두에게 익숙한 성어(成語)가 하나 있다. 바로 "청군입옹(請君入瓮)"이다. 여기의 "군"이 바로 주흥이다. 주흥은 율법에 관한 책을 몇권 읽은 바 있고, 상서도사의 하급관리였다. 나중에 재상 위동현(魏同玄)이 "태후는 나이가 들었으니, 태자를 모시는 것이 더 오래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이다"라고 말하였다고 밀고하고, 다시 우무위대장군이 모반한다고 모함함으로써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고, 나중에 관직이 상서좌승에 이르렀다. 그가 관직을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그 계단에는 원혼의 선혈이 낭자했다. 그는 일찌기 강융(江融)과 서경업(徐敬業)이 모반했다고 무고하였다. 무측천은 강융을 죽이라고 명했는데, 형을 받기 전에 강융은 주흥에게 노하여 소리쳤다: "내가 죄없이 죽으니, 너를 용서치 않겠다" 바로 우리가 자주 말하는 "죽어 귀신이 되어도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강융이 피살된 후, 과연 시신이 벌떡 일어났다. 세번 일어났다 세번 엎드렸다. 망나니들은 깜찍 놀랐고, 주흥은 더더구나 말할 것도 없었다. 당연히 이것은 민간의 소문이고,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나중에 주흥은 그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반했다고 밀고를 당한 것이다. 그의 호붕구우(狐朋狗友)인 내준신이 사건처리를 맡았다. 주흥에게 식사를 같이하자고 초청한 다음에 식사중에 어떻게 고문해서 자백을 받아내는 게 가장 좋은지를 논의했다. 주흥은 큰 항아리를 준비해서, 법인을 항아리의 가운데 앉게 한 다음에 석탄불로 항아리를 태우면, 불지 않고 베기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내준신은 주흥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지를 받아 당신의 모반죄를 조사하겠습니다. 항아리로 들어가시지요(請君入瓮)."
네번째 살수는 후사지라고 한다. 원래 호떡을 구워팔던 사람이다. 나중에 무고로 공을 세워 유격장군이 된다. 그는 관직이 너무 낮다고 생각하고, 어사(御史)같은 관직을 가지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신은 낫놓고 기역자도 몰랐다. 나중에 무측천이 그를 불러서 물었다: "너는 글을 못읽는다면서.." 후사지는 미리 고인에게 가르침받은대로 답변했다. "해치(獬, 전설상의 동물로 죄있는 자를 뿔로 받는다고 함)는 배우지 않다도 사악함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사람을 쓰시는데 어찌 글자를 알고 모르고를 가지고 하시려 하시나이까" 무측천은 그 말을 듣고 아주 기뻐했다. 그리고 그에게 조산대부, 시어사를 맡겼다. 한번은, 무측천이 모반을 한 신하로부터 몰수한 주택을 그에게 상으로 내리려고 하였다. 이때 그는 "저는 그 난신적자가 죽이도록 밉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가 살던 집에 들어가 살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무측천은 그를 더욱 아꼈고, 후사지는 심복이 되어 핵심 '살수'로 활약했다.
아주 풍자스러운 일은 무측천이 길러낸 이 '4대살수'는 모두 편안히 죽지 못했다는 점이다. 불의를 많이 행하면 반드시 스스로 망한다(多行不義必自斃)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삭원례는 뇌물을 많이 받았다고 고발당하여 감옥에 갇혔다가 그 곳에서 죽는다. '청군입옹'을 당한 주흥은 영남으로 유배가는 도중에 죽었다. 내준신은 최후에는 무씨왕과 태평공주까지 제거하려고 하고, 심지어 예종, 중종이 모반하려했다고 무고하기까지 하였다가 여러측이 연합하여 그를 주살했다. 형을 받는 날, 백성들은 길에 나와서 모두 기뻐했고, 그의 시신에서 간을 파내고 살을 잘라내고, 뼈를 부숴서 마음 속의 한을 풀었다고 한다. 후사지는 총애를 받은 후에 하늘높은 줄 모르고 조군 이자읍의 딸을 취하려고 하다가, 내사 이소덕이 홧김이 그를 때려죽여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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