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몽만(蒙曼)
무측천은 아마도 중국역사상 영향력이 가장 큰 여성일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당태종과 당고종의 두 황제였고, 그녀의 아들중에서도 당중종과 당예종 두 황제가 있다. 동시에 그녀 자신도 유일무이한 여황제였다.
그녀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녀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하여는 병주, 장안, 사천의 여러 설이 있지만, 그녀의 관적은 병주(幷州) 문수(文水)이다. 당시 문수무씨(文水武氏)는 현지의 소성(小姓)에 불과했다. 명문대가와 일반백성의 중간쯤에 속하는 집안이었다. 조상에서 관리를 지낸 사람은 있지만 고관은 지내지 못했고, 어느 정도 사회에서 명망은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높은 것도 아니었다. 무측천은 바로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다.
무측천의 부친은 무사확(武士彠)이다. 그는 4형제중 막내인데, 위로 형 세 명은 모두 순박한 농민이었다. 그러나, 무사확은 야심이 있었다. 그는 평생 땅이나 일구고 사는 농민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돈을 벌어서 생활을 바꾸고자 한다. <<태평광기>>에 의하면, 무사확은 장사를 시작한다. 목재장사였다. 무사확이 젊었을 때는 마침 수양제가 통치하던 시기였고, 수양제는 웅재대략을 지닌 황제였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대형토목공사를 벌이는 것을 좋아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궁, 별관을 무수히 지었다. 그리고 동도 낙양에서 대대적으로 건축을 벌였다. 건축에 사용되는 목재의 수요도 커졌다. 무사확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회를 보았고, 장거리목재운송의 장사를 시작한다. 이를 통해서 돈을 벌고 졸부가 된다.
그러나, 중국고대는 신분제 사회였다. 백성들은 종사하는 업종에 따라 네 개 등급으로 나뉘었다. 첫째 등급은 사(士) 즉, 지식인이고 최고급이었다. 왜냐하면 관직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등급은 농(農)이었다. 중국은 농업국가였고 농업을 근본으로 했다. 그래서 농민은 아주 중요시되었다. 셋째등급은 공(工), 즉 수공업자였다. 이들은 기술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사람들이었다. 제4등은 가장 말석인데 바로 상(商)이었다. 즉 유통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고, 자기 스스로 여하한 물건도 생산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일은 투기취교(投機取巧)로 생각하여 상인을 차별했다. 상인들에게는 많은 차별적인 정책이 제정되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위진남북조시대에 상인을 특히 차별했는데, 상인들은 집을 나서서 말을 탈 수 없었고, 가마에 앉을 수 없었다. 심지어 신발까지도 양쪽 신발이 같은 색이면 안되었다. 예를 들어 왼발에 흰색신발이면 오른 쪽은 검은색 신발을 신는 식이 되어야 했다. 사람들이 멀리서도 바로 이 사람이 상인 즉 장사꾼, 하등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부자가 될 수는 있으나 고귀하게 되는 것은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비록 돈은 있지만 사회적인 지위는 낮았던 것이다.
무사확은 이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평생을 다른 사람들에게 차별받고 살 생각은 없었다. 그는 단순한 부자로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의 신분을 바꾸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분을 바꿀 것인가? 그는 생각끝에, 군대에 들어가기로 한다. 군대에 들어가는 것은 과거제도가 시행되기 이전에 한문자제(寒門子弟)들의 가장 주요한 성공의 길이었다. 먼저, 군대에 들어가는데는 집안배경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용감하고 몸만 튼튼하면 되었다. 이외에, 군대에서는 기간도 짧았다. 전쟁에서 한번 승리하면 바로 발탁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군대에 들어가서 성공한 사례들이 아주 많았다. 가장 저명한 사례를 들자면 당나라때의 설인귀(薛仁貴)이다. 그는 원래 보통 농민이었는데, 돈도 없고, 배경도 없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백의종군했는데, 전투중에 아주 용감하게 싸워서 당태종에게 발탁되었다. 그리하여 졸지에 오품의 장군이 된 것이다. 나중에, 그는 서북전장터에서 진면목을 드러내고, "장군삼전정천산, 장사장가입한관(將軍三箭定天山, 壯士長歌入漢關)"의 전설을 만들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당시에 아주 전형적인 것이었다. 무사확도 그런 길을 걷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설인귀와 달랐다. 그에게는 돈이 있었다. 설인귀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사병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무사확은 돈이 있었으므로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보통의 사병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었다. 군대에 들어가자 마자 그는 낮지만 장교자리를 꿰찼다. 이 관직은 응양부대정(鷹陽府隊正)인데, 수나라 부병제의 체제하에서 모든 상임군관(장교)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장교였다. 50명을 거느리는데, 요즘으로 치면 소대장에 해당한다.
무사확이 장교를 지낸 곳은 그의 고향인 문수였다. 바로 이 직위에서, 그는 자기 일생중의 진명천자, 장래의 황제를 만나게 된다. 나중에 대당제국의 개국황제가 되는 당고조 이연(李淵)을 만난 것이다. 당시는 수양제의 대업11년(615년)이었고, 이연은 수양제의 명을 받아 반란을 토벌하러 왔었다. 도중에 무사확이 근무하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무사확은 바로 큰 인물임을 알아보고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접근했다. 그는 돈이 있었으므로 좋은 술과 좋은 고기로 이연을 환대했고, 서로 실컷마셨다. 그리하여 이연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다만, 이연은 바로 떠났다. 그리고는 2년이 다시 흘렀다. 대업13년, 천하는 어지러워졌고, 군웅이 봉기했다. 모두 수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고, 누군가가 수양제의 통치를 뒤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수양제는 마침 강도(지금의 양주)에 순유가 있었다. 수도로 돌아오기 어려웠다. 어떻게 할 것인가? 북방은 누군가 지켜야 했다. 그래서 수양제는 이연에게 태원유수(太原留守)를 맡겼다. 그리하여 이연은 태원부근에서 최고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연은 태원에 도착한 후 무사확이 예전에 자신에게 잘 대해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지금은 조건이 되니, 그를 뽑아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연은 무사확은 행군사개참군(行軍司鎧參軍)으로 발탁해서, 무기와 병장기를 관장하게 했다. 무사확은 행군사개참군이 된 이후, 이연과의 왕래가 더욱 많아졌다. 그는 재빨리 이연이라는 인물이 야심만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천하대란을 틈타 황제가 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상사가 반란을 꿈꾸는데 무사확은 어찌할 것인가? 생각과 형량을 거쳐, 그는 이연을 밀기로 결정한다. 이연을 지지하려면 당연히 행등으로 보여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무사확은 세 가지 일을 하게 된다.
첫째, 병서(兵書)를 바치고, 부서(符瑞)를 바친다. 무사확은 우선 고대의 병서들을 수집하고, 거기에서 경험과 교훈을 끌어모아, 한권의 병서로 편집하여 이연에게 바친다. 이러한 선물을 받으면 기쁘지 않겠는가? 이는 바로 이연의 뜻에 딱들어맞았다. 그 당시 제지술과 인쇄술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책 자체만 해도 고귀한 문화자원이었다. 병서는 더욱 귀했다.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의 전쟁에서 경험을 얻고자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연은 이 선물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 그렇다면 무사확은 또 어떤 부서를 바치는가? 사서에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신당서. 무사확전>>에 따르면, 그는 일찌기 "꿈에 황제(이연)이 그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당연히 이 꿈은 그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분명히 이것도 이연의 뜻에 맞았다. 게다가 자기가 견마지로를 다 하겠다는 것까지 표현한 것이다. 용만이 하늘로 오를 수 있는 것이니 무사확은 이연에게 당신이 바로 천자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의 의미는 첫째는 내가 당신을 도울테니 당신도 나를 도와주시오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당신이 황제가 되려면 나를 중용해주시오. 나는 견마지로를 하할 것이오라는 의미였다. 이연은 그 의미를 잘 알아들었다. 꿈얘기를 다 듣고는 가가대소를 했다. 그리고는 꿈 얘기는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말라고 하면서 당신과 나만 알자고 한다. 아마도 소위 부서를 바쳤다는 것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둘째, 이연이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도운다. 수양제는 이연을 태원유수로 파견했지만, 여하한 장군에 대하여도 황제는 100%믿지를 못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두 명의 부장을 딸려보냈다. 한 사람은 왕위(王威)이고, 또 다른 사람은 고군아(高君雅)였다. 이 두사람은 뭘 하는 사람인가? 명의상으로는 이연을 도우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연을 감시하는 사람이었다. 금방 그들은 이연이 수상한 무리들을 끌어모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의심을 가지게 되었고, 암중으로 이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사했다. 무사확은 재력이 있었으므로, 통이 컸고, 친구가 많았다. 그는 이연에게 의탁하기 전에 왕위, 고군아와도 교분이 있었다. 드들의 심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이연이 무리를 끌어모으는 것을 조사한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두 사람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말했다: "모두 당공(이연이 당국공임)의 손님인데, 만일 그를 믿지 않고 일을 저지르게 되면 좋지 않지 않겠는가"라는 식의 애기를 한다. 이 두 사람은 업무능력도 뛰어나지 못했고, 박력도 없었으며, 무슨 심계도 없었다. 무사확이 하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조사를 그만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연은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더욱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셋째, 집안재산을 다 내놓고, 온 일족을 군에 들어오게 했다. 무사확은 가진 것은 모두 쏟아부었다. 엄청난 재산을 모두 이연에게 바쳤다. 혁명에는 돈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 병마를 끌어모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연은 이때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무사확의 투자는 아주 적시에 한 것이다. 이외에 무씨일족은 사람이 많았고, 이연의 부대에 보충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연에게 많은 인재를 제공해 주었다. 이연이 황제가 된 후에 무사확의 형인 무사릉(武士稜)의 관직은 사농소경(司農少卿)에 이르고, 또다른 형인 무사일(武士逸)의 관직은 익주행태좌승(益州行台左丞)에 이른다. 이로써 볼 때 무씨일족이 이연의 반란에 공헌이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사확이 이렇게 한 것은 너무 모험적이지 않은가? 당연히 모험적이다. 이연을 따라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성공한다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지만, 실패하면 패가망신인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필요한 것은 머리만이 아니다 더욱 필요한 것은 감히 도박할 수 있는 용기인 것이다. 그는 모험을 했고, 성공을 거두었다. 이연이 이끄는 군대는 태원에서 기병한 후 파죽지세로 수나라의 도성인 대흥(당나라때 장안으로 개명함. 현재의 섬서성 서안)으로 밀고 들어가서, 수나라를 무너뜨렸다. 이연은 대당제국의 개국황제가 되니, 역사상 당고조라고 칭하는 인물이다. 이연은 황제가 된 후에 논공행상을 하게 된다. 무사확은 비록 전공은 없었지만, 군수를 담당했었고, 물자조달을 책임졌다. 그리하여 14명의 태원원모훈효공신(太原元謀勳效功臣)중의 하나가 된다. 이연은 계속 그로 하여금 계속 특기를 살리게 해주어서, 고부랑(庫部郞)을 맡아서 재화를 주관했고, 나중에 여러번의 승진을 거쳐서 3품의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오른다. 공부상서는 수리건설을 책임지는 장관이며 고위관료이다. 이때 무사확의 정치적인 꿈은 이루어졌고, 정치적 지위에는 이미 현저한 변화가 생겼다.
수당시대는 신분제사회였다. 사람들은 정치적 지위를 존중하기는 하지만, 출신신분을 더욱 중시했다. 고관이 된 후에 무사확은 금방 느끼게 되었다. 동료들은 내심으로 그를 무시하였던 것이다. 자주 등 뒤에서 뒷말을 하였다. 그는 원래 목재장사꾼이었고, 졸부였다. 이는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사회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자기의 정치적지위뿐아니라 사회적인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번에 그가 선택한 것은 결혼이라는 방법이었다. 무사확은 젊었을 때 상리(相里)라는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한 적이 있다. 상리씨는 무사확과 여러해동안 생활했으며 이미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한 명은 무원경(武元慶)이고 다른 한명은 무원상(武元爽)이었다. 무사확이 공부상서로 있을 때, 이 상리부인은 병이 들어 죽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중년에 상처를 하는 것은 인생에서 일대 불행이다. 그러나 관직에 있던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진세미가 관직에 오른 후, 진향련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그래도 진향련은 굳이 죽지 않자, 결국 진세미는 스스로 진향련을 죽여버리려고 하였었다. 상리부인은 적시에 죽었다. 무사확이 그녀를 싫어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죽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무사확의 곁에는 빈공간이 생겼다.
누가 이 빈공간을 채울 것인가? 당고조 이연은 친히 그를 위하여 중매를 섰다. 이연은 왜 무사확에게 이렇게 잘해 주었는가? <<책부원귀>>의 기재에 의하면, 주로는 무사확이 업무를 근명하게 하여, 당고조가 감동받았다는 것이다. 당고조는 "이 사람은 충절이 넘친다. 작년에 아들이 죽고, 금년에 처가 죽었는데, 그는 정부에 요구하지도 않고, 휴가를 가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일을 했다. 만일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한다면, 대당제국은 발전할 것이다"와 같은 내용의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연은 그를 위하여 좋은 부인을 찾아주려고 한다. 고르고 고른 끝에 양씨부인(楊氏夫人)이 점지되었다. 양씨부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수나라때 4대귀족의 하나인 양웅(楊雄)의 질녀이고, 양달(楊達)의 딸이었으니, 금지옥엽이라고 할 수 있다. 양부인은 어려서부터 큰 뜻을 가지고 바느질, 화장과 같은 여인의 일들을 좋아하지 않고, 문사서적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집안의 어른들은 그녀를 "집안을 융성시킬 딸"로 여겼다. 그러나, 기괴한 것은 이처럼 우수한 여자가 결혼에 있어서는 순조롭지 못하여, 그녀가 무사확과 결혼할 때 나이가 이미 44세였다. 이 정도 나이라면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이미 결혼을 언급할 시기가 지난 것이었다. 왜 양부인은 이토록 늦게 결혼하게 되는가? 무측천이 황후가 된 이후에 언급한 것을 보면, 양부인이 불교를 믿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원래 독신주의를 고집했던 것같다. 나중에 좋은 남편을 만나게 되면서 생각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양부인이 초혼이라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다.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재혼이고 이미 나이가 들었으므로 비로소 무사확이라는 신황조의 졸부와의 결혼을 응락한 것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번 결혼은 윈윈의 결과를 가져왔다. 무사확의 정치지위와 양부인의 신분배경은 좋은 결합이었던 것이다.
만혼한 양부인은 생육능력이 만만치 않았다. 40여세의 고령이면서 연속으로 딸을 셋이나 낳았다. 큰 딸은 하란씨(賀蘭氏)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곽(郭)씨에게 시집간다. 둘째 딸이 바로 무측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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