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건릉(乾陵, 측천무후, 당고종의 합장묘)에 얽힌 이야기 (1)

중은우시 2006. 10. 20. 13:03

건릉은 진시황릉과 더불어 중국 고고학계의 2대 프로젝트이다.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자황제 무측천(측천무후)가 그녀의 남편인 당고종과 합장되어 있는 무덤으로, 전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두 명의 황제의 합장묘이다.

 

중국에서 건릉을 발굴할 것인지, 진시황릉과 더불어 핫이슈중의 하나이다. 발굴할 것인가 말 것인가? 발굴한다면 언제 발굴할 것인가?

 

중국의 역대제황릉중에서 건릉은 가장 특이한 것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산을 파서 혈(穴)을 만들었으며, 규모가 거대하고, 매장품이 풍부하며, 한쌍의 부부, 두 명의 황제가 하나의 묘실에 합장되어 있으며, 1000여년동안 전혀 손을 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측천은 천하에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보니 건릉은 더욱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있다.

 

중국정부는 1957년 건릉은 "섬서성 제1기 명승고적중점보호단위"로 지정하였고, 1961년 국무원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였다. 40여년이래로, 각급정부는 계속 자금을 투입하여 건릉의 유지와 보수에 신경겄다. 2004년말까지 건릉을 참관한 국내외 관광객은 3800여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건릉의 사마도에 내리면 보이는 것은 그저 하나의 산과 혼연일체가 된 황가능원뿐이다. 도대체 지하궁전은 어디 있는가? 능침은 어디 있는가? 거의 모든 관광객들은 건릉을 유람한 후에, 여러가지 의문을 안고 돌아가게 된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능묘안에는 도대체 어떤 보물들이 있을까? 측천무후와 당고종의 유해는 남아 있을 것인가? 혹시나 호남의 마왕퇴에서 나온 천년여시처럼 지금도 형체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을까? 만일 뼈라도 남아 있다면, 현대화된 기술을 가지고 원상으로 회복시켜 측천무후의 풍채를 느껴볼 수는 없을까? 여기안에 숨겨진 수수께끼는 너무 많다. 만일 발굴하게 된다면, 아마도 건릉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이 될 것이다.

 

지궁(地宮, 지하궁전)에는 어떤 무가지보가 있을까?

 

건릉의 지궁안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들어있을까? 여러해동안의 탐측과 고찰을 한 바에 의하여 한 문화재전문가가 추산한 바에 의하면, 보수적으로 보더라도 최소한 500톤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묘도안의 돌은 포함하지 않은 것인데, 그 안의 형태가 각각이고 여러 문자를 새긴 돌들도 얻기 힘든 문화재일 것이다.

 

고고학자가 건릉의 주봉에서 수직으로 지궁을 일부 탐사한 결과와 건릉부근의 일부 배장묘를 발굴한 바에 의하면 전문가들은 건릉묘실의 구조는 묘도(墓道), 과동(過洞), 천정(天井), 전후통도(前後通道), 좌우궁전(左右宮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에는 당고종이 누워 있고, 오른쪽에는 무측천이 누워 있다.

 

전후통도의 양측에는 4간의 석동이 있고, 석동안에는 성당(盛唐)시대의 고귀한 문화재들이 쌓여 있다. 금강장으로 향하는 근 100미터의 과도 양측에는 각종 금은제기가 쌓여 있다. 세상사람들이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은 바로 최고급 국보인 <<난정서(蘭亭序)>>이다. 역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난정서는 이세민이 유언으로 그의 머리아래에 두라고 하였다고 한다. 즉, 이 보배는 당연히 당태종의 소릉(昭陵)에 있어야 하고 건릉에 있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대시대의 요주자사인 온도(溫韜)는 소릉을 도굴하였다. 그러나 그가 기재한 출토문물의 리스트에 <<난정서>>는 없었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난정서는 건릉에 묻혀 있으리라는 것이다. 건릉일대의 민간전설에서도 <<난정서>>를 무측천의 묘에 배장했다는 말이 있다.

 

자세히 얘기하자면, 중국의 수천년역사상 유일하게 정통황제를 쫓아내고, 황제의 모자를 썼던 여인은 무측천 한 사람이다. 그녀는 66세때 이당(李唐)황조를 무너뜨리고, 무주(武周)황조를 열었고, 15년간 황제의 지위에 있었다. 사후에 자기의 묘 앞에 검은 색의 무자비(無字碑)를 세웠으니, 일생의 공과는 후세사람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뜻이리라. 당고종 이치(李治)는 풍류남아였고, 병상에서 유언을 하였는데, 그가 생전에 좋아하던 자화(字畵)를 모두 묘에 넣어달라고 해ㅆ다. 아마도 서법의 대가인 왕희지의 <<난정서>>를 제외한 진품들이 이치의 관속에 같이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무측천은 재주가 뛰어난 일세의 여걸이었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전당시>>에는 그녀가 지은 몇 수의 당시만 남아 있다. 무측천이 지었다는 많은 시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이것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문화재전문가인 곽말약 선생은 일찌기 주은래 총리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분명히 적지 않은 글자, 그림, 서적들이 묘실에 보존되어 있을 것입니다. 건릉을 열면, 아마도 무측천의 <<수공집(垂拱集)>> 100권과 <<금륜집(金輪集)>>10권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무측천의 화상, 상관완아(上官婉兒)등의 글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단한 일, 분명히 대단한 일이 될 것입니다."

 

곽말약은 묘실에 있는 금은주보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건릉을 열기만 하면, 그 진품보석은 전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고, 아마도 세계의 제9대기적으로 언급되지 않을까 싶다. 길고 긴 역사, 몇번의 부침이 있었는가? 건릉에 흥미를 가진 사람이 어찌 곽말약 한명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