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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1388

청나라말기의 "섬감회란"과 하마스 글: 사감 (2023. 10. 17) 청나라말기 동치연간의 섬감회란은 1862년부터 1873년까지, 10여년간 지속된 후 청나라조정에 의해 진압되었다. 폭란은 섬서와 감숙 외에도 영하, 청해와 신강까지 파급되어, 중국의 서북지구의 경제와 문화에 엄청난 파괴를 초래했다. 사료를 보면, 섬감 두 개 성의 인구손실이 약 2000여만명에 이르렀다. 전후 청나라조정은 섬서,감숙의 나머지 회민을 강제로 서부의 더욱 편벽한 지역으로 이주시켜, 그들이 다시 한번 중국의 중심지역의 안녕을 파괴하지 못하게 조치했다. 19세기 하반기, 태평천국운동이 전체 남부중국을 석권하다가, 마지막으로 최후의 근거지 남경이 함락되면서, 일찌기 기세등등했던 태평천국은 쇠망한다. 그러나 하나가 끝나면 또 하나가 시작한다. 북방의 여러 성에서.. 2023. 10. 24.
적벽대전: 조조가 패배한 원인은 화공이 아니다? 글: 역사학당군(歷史學堂君) 역사상 적벽대전은 한말 삼분천하의 정치국면을 결정한 중대사건이다. 의 가공을 거쳐, 특히 설전군유(舌戰群儒), 초선차전(草船借箭), 차동풍(借東風), 장간도서(蔣幹盜書), 주유타황개(周遊打黃蓋), 화소적벽(火燒赤壁)등의 이야기로손류연합군이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대파한 민간기억을 채워놓았다. 그렇다면, 위, 촉, 오 삼국정립 국면을 확립시킨 적벽대전에서 결정적인 승패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중 결정적인 작용을 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정말 손류연합군이 동풍을 빌어, 조조의 전선을 태워버렸기 때문에 조조의 군대가 패배하게 된 것일까?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에 대하여, 최근 들어, 여러 연구자들이 삼국연의의 사고범위를 넘어, 역사로 되돌아가 더.. 2023. 8. 14.
"충의군(忠義軍)"의 진상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명나라때의 희곡가 탕현조(湯顯祖)의 대표작 는 판타지애정물의 거작이다: 두려낭(杜麗娘)이 꿈속에서 서생 유몽매(柳夢梅)와 서로 사랑에 빠졌다가, 죽게 된다. 그후 한줄기 혼백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 사랑하다가 결국 기사회생하여 사랑을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탕현조는 판타지와 애정이라는 두 가지 요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많은 역사이야기를 포함시켰다. 그는 두려낭의 이야기를 송금전쟁(宋金戰爭)이라는 배경하에 두고, 다시 강도부부를 출연시킨다: 이전(李全)과 양낭낭(楊娘娘). 극에서 금나라황제 완안량(完顔亮)이 군대를 몰고 남으로 쳐내려와 남송을 삼킬 준비를 한다. 산동(山東) 회해(淮海)일대에서 활약하던 이전 부부는 장두초(墻頭草, 담장위의 풀과 같이 이리.. 2023. 8. 3.
진실한 대당 장안(長安): 그다지 번화하지 않았다... 글: 해변적서새라(海邊的西塞羅) 아래의 도면은 당나라때의 장안성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도시의 주택지역(坊)과 상업지역(市)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고, 물리적으로 높은 담장, 제도적으로 법률로 엄격히 통제했다. 이런 기이한 도시의 구성방식은 중국역사상 아주 유명한 "방시제도(坊市制度)"이다. 그렇다. 비록 지금이 대다수 영화드라마작품에서는 성당시기의 장안이 얼마나 번화했는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역사적으로 진실한 성당의 장안성은 아마도 그 이름의 뜻 그대로, 정제(整齊), 숙목(肅穆), 냉청(冷淸)했었다고 할 것이다. 전체 도시의 25개 관도(官道)는 동서로 14도(道), 남북으로 15도(道)이다. 전체 장안성은 이들 도로로 모두 108.. 2023. 7. 18.
중화민국의 12개 직할시(直轄市) 글: 민초사운(民初思韻) "직할(直轄)"은 고대에 "직예(直隸)"라고 불렀다. '직예제'는 송(宋)나라때부터 시작되었다. 북송은 "로(路)"를 성급(省級)행정단위로 삼았다. 23로(路)를 설치하는 외에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부(府)가 있었다. 예를 들면 북경의 수도인 개봉부(開封府)이다. 1946년, 국민정부는 '헌법'에서 여러번 '직할시'를 언급한다. 그러나, 제11장의 '지방제도'에는 단지 '성(省)', '현(縣)'만 있고, 직할시와 지방(서장)에 관한 규정은 없었다. 그리고 그후 공문서에서는 "원할시(院轄市)"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직할시는 직접 사용되지 않는다. 1921년 7월 북경정부가 반포한 에서 경도시(京都市)는 내무부가 직접 감독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중앙정부가 직접 감독하는.. 2023. 7. 6.
아편전쟁때 청군의 황당무계한 전술들.... 글: 한언쇄어(閑言碎語) 역사상의 오늘 1840년 7월 5일은 영국전함이 주산(舟山) 정해(定海)를 포격하여 아편전쟁이 정식으로 개전된 날이다. 아편전쟁이전에 천조(天朝)로 자처하며 고보자봉(故步自封)하던 대청제국은 이미 시대에 낙후되어 있었다. 문화와 사상도 그러했고, 무기와 군사는 더욱 그러했다. 제1차아편전쟁의 전모를 살펴보면, 청정부의 여러가지 대응책을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무계하다. 오늘은 그런 것들을 얘기해보기로 한다. 아편전쟁때 청군은 어떤 웃지못할 전술전략을 펼쳤을까? 여인의 마통(馬桶)과 과각포(裹脚布) 영국인들이 광주로 쳐들어 올 때, 전선의 장수는 여인의 마통(요강)과 과각포(전족발싸개)를 내건다. 그들이 보기에 "오예(汚穢, 더러운 물건)"로 서양인들의 "요법(妖法)" 즉 서양인들의 .. 2023.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