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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진실한 대당 장안(長安): 그다지 번화하지 않았다...

by 중은우시 2023. 7. 18.

글: 해변적서새라(海邊的西塞羅)

 

아래의 도면은 당나라때의 장안성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도시의 주택지역(坊)과 상업지역(市)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고, 물리적으로 높은 담장, 제도적으로 법률로 엄격히 통제했다. 이런 기이한 도시의 구성방식은 중국역사상 아주 유명한 "방시제도(坊市制度)"이다. 

 

그렇다. 비록 지금이 대다수 영화드라마작품에서는 성당시기의 장안이 얼마나 번화했는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역사적으로 진실한 성당의 장안성은 아마도 그 이름의 뜻 그대로, 정제(整齊), 숙목(肅穆), 냉청(冷淸)했었다고 할 것이다.

 

전체 도시의 25개 관도(官道)는 동서로 14도(道), 남북으로 15도(道)이다. 전체 장안성은 이들 도로로 모두 108개 방으로 나뉘어진다. 백거이(白居易)의 소위 "백천가사위기국(百千家似圍棋局), 십이가여종채휴(十二街如種菜畦)"(백개 천개의 집은 마치 바둑판같고, 12개의 거리는 마치 밭두둑같다)이다.

 

가도(街道)의 경우 통행의 기능을 제외하고, 도로를 따라 점포를 개설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물건을 사거나 장사를 하려면 반드시 도시의 동서에 있는 두 개의 "시(市)"로 가야 한다(실제로 상품을 중국에서 '동서(東西)'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반드시 동시,서시로 가서 사야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정해진 곳에서만 살 수 있다. <당육전(唐六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무릇 시(市)는 해가 중천에 뜨면 북을 삼백번 치면 사람들이 모이고, 해가 지기 7각전에 징을 삼백번 치면 사람들이 흩어진다" 동서 두새의 시장은 매일 오후에만 개설될 수 있었다. 정오가 넘어가야만 시장이 열렸고, 해가 지면 흩어진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는 물건을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상업거래가 엄격히 제한받았을 뿐이나라,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도시내에서 통행하는 것도 통제를 받아야 했다. 장안성의 각 성문, 방문(坊門), 그리고 각 방의 골목에는 소위 '무후포(武侯鋪)'가 설치되어 있어, 위병을 파견해서 장안성의 치안을 감시감독했다. 이런 직책을 가진 책임자를 좌우가사(左右街使)라고 불렀고, 해가 지면 엄격하게 통행금지(宵禁)를 실시했다.

 

상상해보라. 성당시기 매일 해가 지면, 가사들이 도로에서 행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하고 심지어 쫓아낸다. 초당시기에는 구두경고였는데, 정관시기에 이르러서 인구가 증가되면서 관리상 곤란이 발생하자, 마주(馬周)라고 부르는 관리가 아이디어를 내서 길거리에 "동동고(鼕鼕鼓)"를 설치해서 저녁때가 되면 도시의 각 가도에서 북소리를 내자고 했다. 북소리를 세번 낸 후에는 각 방의 방정(坊正)이 방문을 닫고 걸어잠근다. 이때 장안의 108개 방은 108의 독립된 지역이 되고, 마치 108개의 감옥처럼 변해 드나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해가 진 후에 누군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기지 못했다면, 미안하지만, 야간통행금지의 처벌이 아주 엄격했다. <당률소의>의 기록에 따르면, 문을 닫고 북이 울린 후, 문을 열고 북을 치기 전에 길거리를 다니는 자는 모두 '범야자(犯夜者)'로 취급되어 특수한 원인(예를 들어, 긴급한 공무, 임산부의 출산, 급한 질병등)이 없는 한 모두 처벌을 받게 된다. 경하면 태형 20대, 중하면 장형을 받고 경고를 듣지 않으면 가사는 직접 사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주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힘들게 길을 가는 행인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가고성을 듣게 되면, 그는 이제 긴장하고 당황하게 된다. 당나라때의 전기소설 <장무시(張无是)>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장무시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돌연 문을 닫는 가고성을 들었다. 발견되어 심문당하지 않기 위해 그는 할 수 없이 다리 아래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그리고, 특수한 원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민의 야간외출은 반드시 방정에게 '증명서'를 받아야 했다. 방정이 '보단(保單)', '문첩(文牒)'을 발급해주어야만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도중에 지닌 것들은 수색을 받게 된다. 이 절차는 QR코드를 찍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번잡하다.

 

그리고, 방문, 가도를 지키는 군사들이 악독하다고 할 수도 없다. 당률은 그들이 업무를 소홀히 하게 되면 엄중하게 처벌받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야자에 대하여 놓아주지 말아야할 자를 놓아준 경우에는 태형30대, 만일 도적이 지나갔는데도 발견하지 못한 경우에는 가중하여 태형 50대에 처했다.

 

이런 엄격한 제한정책은 최소한 성당시대엒 엄격하게 실행되었다. 그래서 성당때 한밤의 장안성에는 많은 경우 "월색등광만제도(月色燈光滿帝都)"의 광경은 볼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육가고헐행인절(六街鼓歇行人絶), 구구망망공유월(九衢茫茫空有月)"(길거리에 북이 울리면 행인이 끊기고, 네거리에는 그저 달만 떠 있다)의 처량한 모습뿐이다.

 

길을 걸어가면 반드시 등뒤에서 길거리를 순찰하는 군사의 고함이 들릴 것이다: "도적은 걸음을 멈추라! 대담하구나! 감히 정부의 야간통행금지정책을 어기다니"

 

그렇다. 이것이 바로 성당의 생활모습이다. 관민을 불문하고, 평소에는 모두 좁은 방(坊) 안에서 지내야 한다. 물건을 사려면 문을 나가 멀리 갔다 와야 한다. 외출이 마치 소풍가는 것같다. 도시생활이라기보다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당연히, 야간통행금지가 없는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매년 상원절(上元節)에는 황제가 일반적으로 '은지(恩旨)'를 내려, 장안에서 '통행금지를 잠정정지'한다. 2년전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사극드라마 <장안십이시진>에서 얘기한 것이 바로 그 내용이다.

 

그러나, 만일 당나라때 평소의 엄격하기 그지없는 통행금지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장안에서 상원절의 등회가 왜 그렇게 번화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기실 상업문명이 극도로 번영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통제하에서 민중의 보상심리적인 방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관리가 "잠시 통행금지를 정지한다는 은지"를 읽을 때, 길거리에서 왜 그렇게 황제를 칭송하는 소리가 드높았는지. 자유와 개방은 원래 국제화대도시의 특색이다. 그러나 성당의 장안은 확실히 '은혜를 베풀었을 때'만이 백성들이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당나라때 장안은 왜 그렇게 엄격한 통행금지제도를 실행했을까? 그 배후의 논리는 연구해봐야 한다.

 

한가지 견해는 이러하다. 조명기술이 낙후되어 있을 때, 낭비와 화재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내린 하책(下策)이라는 것이다. 다만 실제로 이 견해는 맞는 것같으면서도 아니다. 당나라이후의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하지 않은 왕조이다. 방시제도가 타파되고, 도시주민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고, 어디서든지 장사를 할 수 있었다. 다만 모두 알다시피, 송나라때는 아마도 뭐든지 부족했고, 유독 부족하지 않은 것은 돈이었다. 이 유일한 '야간통행금지'가 없던 시대는 고대중국에서 상품경제가 가장 발달하고, 백성들이 가장 풍족했던 시기이다. 같은 시기의 잉글랜드 국왕의 부유한 정도는 아마도 변경성의 성문을 지키는 무졸과 비슷했을 것이다. 야간통행금지정책이 타파됨으로 인하여 도시나 백성들에게 빈곤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반대로 납촉(蠟燭)등 조명설비그 대량으로 채택된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번화한 '불야성'이 나타난 것이다.

 

화재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송나라의 관청은 성안의 높은 곳에 망화루(望火樓)를 만들어, 주야로 사람이 감시하게 했다. 일단 화재가 발견되면 관병이 소방설비를 가지고 불을 끄러 달려가게 된다.

 

이런 비교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송나라때의 도시에 대한 관리태도야말로 정확했다는 것을 활력도 있고, 사람에게 자유도 주는 것이었다. 도시는 기실 자신으로부터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를 소화하고, 해결할 능력이 있다. 정부가 해야할 일은 '수야인(守夜人)'의 역할이다. 잘 봉사하면서, 공권력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면 된다.

 

그러나, 당나라때, 혹은 송나라를 제외한 중국의 거의 모든 고대왕조에서 도시관리의 사고방식은 '순야인(巡夜人)'이었다. 극도의 통제를 실시함으로서 문제의 소지를 아예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이런 기이한 사고방식의 원인은 뿌리부터 보자면, 고대중국문명이 거의 진정한 '도시문명'이 없었다는 것에서 나온다. 상앙(商鞅)이 진왕에게 정책을 올릴 때, 백성을 국가를 위해 '경전(耕戰, 농사짓고 전쟁하는)'하는 기계로 규정한 때로부터 도시는 고대공권력이 봉사하는 대상이 아니라, '난원(亂源)'을 해결하고 심지어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대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보라, 한비자가 진왕조에 올린 글에서 말한 원수 소위 "오두(五蠹)"는 학자, 언담자(言談者), 대검자(帶劍者), 환어자(患御者), 상공지민(商工之民)이다. 거의 모두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통제하고, 그들을 제거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도시의 용량을 압축하여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의 규칙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두는 것이다.

 

어쨌든, "유이문란법(儒以文亂法), 협이무범금(俠以武犯禁)"(유학자는 글로써 법을 어지럽히고, 협객은 무력으로 금지하는 것을 어긴다). 사람이 많아지면, 관리비용이 증가한다. 만일 통제를 완화하려 하지 않는다면, 최대한 문제를 줄이고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나라이후, 고대중국은 왕조가 어떻게 바뀌든, '반도시'적인 가혹한 법은 아주 많았다.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숙위랑관(宿衛郞官)을 두어 야간통행금지를 집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진나라때 이미 야간통행금지는 실시되고 있었다.

 

전체 장안성은 기실 수당의 관농귀족이 통일을 완성한 후, 왕권을 도와주는 방대한 관료기구를 지탱하기 위해 만들었다. 부득이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관사'였다. 장안과 당시 서방에서 이미 몰락한 로마, 그리고 막 일어나기 시작한 콘스탄티노플과 비교해보면,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도시의 집중으로 권력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집중으로 부득이하게 도시를 탄생시킨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안성은 처음부터 처리해야할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방시제도, 야간통행금지제도는 바로 이 문명이 천년동안 도시통제경험을 축적한 후, 꺼내놓은 해결방안의 '집대성'이다.

 

도시의 발전을 구속하고 제한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방시제도가 도시에 큰 폐단이었지만, 고대황권의 입장에서는 계속하여 채택되고 완비되었던 큰 장점이었던 것이다. 

 

인구 수십만의 대도시라면 반드시 방대한 상업거래의 수요가 있다. 그러나 최소한 당나라전기에 장안성에 거주하는 사람은 주로 봉건관료, 군대 및 그 가족 그리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인원이었다. 생활 필수품의 배급은 기실 조정의 봉록제도하에서 진행되었다. 이 체계는 표에 근거해서 운행되던 계획경제와 비슷한 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상품교환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체계에 들어온 외래인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미안하지만 장안성은 그런 사람을 환영하지 않는다. 당나라떄 농촌에서는 균전제, 조용조제가 실시되었다. 그 주요 사고방식은 농민들이 최대한 고정적인 그들의 토지에 얽매어 있게 하는 것이고, 그런 분배를 통해서 왕조의 치안, 재정과 군대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농민들이 토지를 떠나 대도시로 가서 '무질서한 유동인구'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이 거대한 도시의 생장을 억제하기 위하여, 당왕조는 기실 큰 힘을 들여서 단속하고 관리했다. 마백용(馬伯庸)의 <장안십이시진>에서 물샐틈없이 전체 장안에 펼쳐진 치안체계를 허구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진실한 역사에서, 성당시대의 정부가 장안의 통제를 위해 투입한 인력, 물력, 재력은 기실 전혀 그에 못지 않았다. 장안의 곳곳에 설치된 '무후포', 매일 길거리를 순시하는 순가사(巡街使)가 기실 그 분명한 증거이다.

 

그리하여 언뜻 보기에는 매우 괴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장안성은 성당(盛唐)시대에는 정숙, 냉청했다. 만당(晩唐)에 이르러 중앙정부의 재정능력이 부족하여, 방시, 야간통행금지제도를 완벽하게 실시하지 못해 날이갈수록 느슨해지자 도시는 오히려 활발해지고 번영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백성들은 몰래 방의 벽에 구멍을 뚫어, 편리하게 출입하고, 심지어 규정을 어기고 '장사'하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농촌에서 도망쳐온 장사꾼들이 길거리를 누빈다. 자신의 생활을 위해 또한 백성들에게 편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양인조조반야기(良人朝早半夜起), 앵도여주노여수(櫻桃如珠露如水)" 심지어 야간통행금지도 점차 느슨해진다. 장안성의 밤에도 마침내 행인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더 이상 감옥같은 모습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결국 회광반조(回光返照)에 불과했다. 장안성은 어쨌든 교통, 상업의 편리를 통해 자발적으로 형성된 대도시가 아니었다. 장안성을 만든 것은 행정명령이고, 황권의 부용(附庸)이었다. 황권의 쇠락으로 장안성의 발전을 일시적으로 가능하게는 하였지만, 황권의 몰락은 결국 그 도시를 훼멸시켜버리게 된다.

 

904년, 대당 원우원년, 일대효웅 주온(朱溫)이 봉상을 토벌하고 현지의 군벌에게서 '당소종'을 빼앗아 '봉가(奉駕)'하여 장안성으로 돌아온다.

 

당왕조를 더욱 약화시키고 자신의 찬위야심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는 삼국시대 동탁과는 정반대되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결과는 놀랍게도 일치했다: 황제에게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청한 것이다. 천도만이 아니라, 그는 장안의 관리, 군사, 백성, 그리고 궁전까지도 모조리 철거해서 가져가버린 것이다.

 

결국, 수만의 성당궁전이라는 거목에 빌붙어 살던 사람들은 위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버렸다. 장안성이라는 13조고도는 철저히 폐허가 되어 버린다. 이때부터 다시는 화하의 중심위치를 되찾지 못하게 된다.

 

장안이 무너질 때,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건재했고, 런던과 파리는 막 건립되고 있었다. 하나의 국제대도시가 이렇게 철저훼멸되는 것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경우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런 명단에 올라간 도시들이 사실 아주 많다.

 

장안이 무너졌다. 그러나 하나의 의문을 모든 사람에게 남겼다. 이 도시를 훼멸시킨 것은 정말 주온이었을까? 자유롭게 발전하는 본능을 지닌 도시와 통제의 본능을 지닌 공권력은 또 어떻게 일종의 균형을 이루어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했을까?

 

장안일편월(長安一片月)

만호도의성(萬戶搗衣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