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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충의군(忠義軍)"의 진상

by 중은우시 2023. 8. 3.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명나라때의 희곡가 탕현조(湯顯祖)의 대표작 <모란정환혼기(牧丹亭還魂記)>는 판타지애정물의 거작이다: 두려낭(杜麗娘)이 꿈속에서 서생 유몽매(柳夢梅)와 서로 사랑에 빠졌다가, 죽게 된다. 그후 한줄기 혼백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 사랑하다가 결국 기사회생하여 사랑을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탕현조는 판타지와 애정이라는 두 가지 요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많은 역사이야기를 포함시켰다. 그는 두려낭의 이야기를 송금전쟁(宋金戰爭)이라는 배경하에 두고, 다시 강도부부를 출연시킨다: 이전(李全)과 양낭낭(楊娘娘).

 

극에서 금나라황제 완안량(完顔亮)이 군대를 몰고 남으로 쳐내려와 남송을 삼킬 준비를 한다. 산동(山東) 회해(淮海)일대에서 활약하던 이전 부부는 장두초(墻頭草, 담장위의 풀과 같이 이리저리 바람부는대로 향한다)였다. 그들 둘은 원래 항금(抗金)의 충의군(忠義軍)에 가담했다가, 다시 송나라를 배신하고 금나라에 투항하여 금나라의 응견(鷹犬)이 된다. 형세가 좋지않자, 다시 남쪽으로 귀순하고, 돈을 받고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즐겁게 해적으로 살아간다.

 

이 장면들은 너무 재미있게 쓰여있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역사상 정말 이전, 양낭낭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는 남송말년으로, 금나라는 위기일발이었고, 몽골인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산동, 회해일대에서 굴기하여, 의군(義軍)을 이끌고 송나라에 가담하여, 금나라와 맞서싸운다. 그들은 금나라에 투항한 적이 없고, 몽골인들에게는 투항했었다. 그들의 결말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전은 출정했다가 전사하고, 양낭낭은 몽골인들의 아래에서 산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탕현조는 학식이 뛰어난 작가였는데, 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이렇게 고쳐썼을까?

 

송나라이래, 중국이 이민족의 위협을 받을 때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화이지분(華夷之分,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이 아주 강렬해진다. 탕현조가 살았던 명나라는 비록 송나라처럼 싸울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민족의 위협은 시종 존재했다. 당시 명나라조정을 골치아프게 했던 것은 "남왜북로(南倭北虜)"였다. 즉 동남연해의 왜구의 침입과 북방변경의 호로(胡虜)의 습격이었다.

 

역사상의 이전 부부는 반복무상의 '기장파(騎墻派)'이다. <송사>이건 <원사>이건 그들은 모두 <반신전(叛臣傳)>에 실렸다. 그러한 시대분위기하에서 탕현조가 이전 부부를 고른 것은 실제로 투적매국(投敵賣國)한 소인들을 풍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주관적이고 심미적인 것이다. 예술은 관중의 내심에 있는 모종의 정서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역사는 복잡하고, 객관적이다. 그래서, 역사는 풍부한 자료들 중에서 '진실에 가까운' 진상을 찾아내는 것이다.

 

역사의 영역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이전 부부의 이미지가 아주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송, 여진, 몽골이 서로 싸우는 배경하에서 굴기했고, 살아갔고, 죽었다. 화이지쟁(華夷之爭)은 그들 생명의 일부분이었을 뿐이고, 전부는 전혀 아니었다.

탕현조

1. 

 

13세기초의 산동은 인간지옥이 되어 있었다.

 

1206년, 한탁주(韓侂胄)는 개희북벌(開禧北伐)을 개시한다. 금나라에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송나라조정은 산동에서 망명지도(亡命之徒)들을 끌어들여, 그들로 하여금 약탈을 하고, 적군의 동정을 살펴서 보고하도록 선동한다. 그러나, 북벌하는 송군은 연이어 패배한다. 송나라조정은 금나라와의 화해를 위하여 부득이 한탁주를 죽여야 했다. 산동에서 난에 가담했던 밀탐들과 망명지도들은 할 수 없이 숨어지내며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송금이 싸우고 있을 때, 징기스칸이 몽골을 통일하고,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막북(漠北)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1211년, 몽골기병이 남하하여, 야호령(野狐嶺)에서 40만 금군을 대파하고, 금나라의 중도(中都)일대까지 깊이 쳐들어간다. 몽골군사들은 약탈을 전술로 삼았다. 성을 함락시킨 후에는 대거 약탈한 후 즉시 말을 타고 되돌아갔다. 그들이 이르는 곳은 모두 폐허로 전락했다. 역사에서 말하기를: "인민은 거의 모두 살륙당했고, 비단, 자녀, 소양말은 모조리 가지고 가버렸으며, 집은 모두 무너지고, 성벽을 폐허가 되었다."

 

금나라군대의 저항은 날로 약해지고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지역이 점점 넓어졌다: 중도, 요동, 하북, 산서, 산동.... 1214년, 금선종(金宣宗)이 변경(汴京)으로 천도한다. 그리하여 황하이북은 모조리 몽골인의 철기아래 들어간다.

 

몽골인의 남침과 약탈은 산동의 사회를 진공으로 만들었고, 제로(齊魯)대지는 황량한 모습이 된다; 살아남은 백성들은 화를 피하기 위해, 속속 산속이나 섬으로 도망쳐 숨었고; 강인한 사람들은 서로 단결하여 무장세력을 만들어 스스로를 지켰다; 화북의 한인들은 그 기회를 틈타 호족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킨다; 금나라의 관리들은 속속 피살되었으며, 행정질서는 붕괴된다. 이곳은 도적, 간첩, 호족이 횡행하는 세계였다. 

송,금,원의 형세도

이런 상황하에서, "홍오군(紅襖軍)"이라는 일군의 지방무장세력이 흥기한다. 그들은 서로 상하관계가 없으며, 지방을 약탈하고 관청을 약탈하는 것으로 살아갔다. 그중 두 "대창(大槍)"이 나타난다.

 

하나의 창은 이전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농민출신으로, 소와 말을 판매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가 나중에는 도살을 업으로 삼는다. 이전은 전형적인 '산동호한'이다. 협의를 행했고, 적지 않은 강호의 친구들을 사귄다. 철창(鐵槍)을 잘 다루어 사람들은 그를 "이철창(李鐵槍)"이라고 불렀다. 난세가 도래하자 그는 거병하여 무력으로 살길을 찾게 된다.

 

또 하나의 창은 양묘진(楊妙眞)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고, 특히 "이화장(梨花槍)"이 뛰어났다. 사람됨이 기민하고, 호소력이 있었다.

 

그녀의 오빠인 양안아(楊安兒)는 직업강도였다. 강도짓을 하다가 체포되었는데, 금나라사람들은 그가 강인한 것을 보고 그를 하북으로 보내어 몽골군과 싸우게 한다. 양안아는 전장에서 도망쳐 산동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반금(反金)'의 기치를 내건다. 그후 인원이 계속 불어나서, 가장 많을 때는 수십만에 이른다. 이 홍오군은 무리가 가장 많았지만, 전투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금나라군대가 진압을 시작하자, 양안아는 패전하여 죽는다. 양안아가 죽은 후, 이 홍오군은 군룡무수(群龍無首)의 상태가 된다. 사람들은 무예가 뛰어난 양묘진을 수령으로 받들고, 그녀를 "고고(姑姑)"라고 부른다. 양묘진은 무리를 끌어모아 마기산(磨旗山)으로 퇴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이 부대를 이끌고 그녀에게 투항하고, 두 사람은 이때 만나서 결혼하게 된다.

 

정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전이 무리를 이끌고 귀부했다. 양씨는 그와 통하여 마침내 그에게 시집간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비무를 겨룬 적이 있다. <대금국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양묘진)이 말을 몰아 창을 꽂는데, 깊이가 1척(尺)이나 들어갔다. 그녀는 이전에게 말을 몰아 창을 뽑게 시켰는데, 이전은 뽑을 수가 없었고, 말에서 내려 굴복한다. 그후 부부가 된다."

 

양묘진과 이전이 결혼한 후, 무리를 합친다. 그러자 양묘진이 이끌던 홍오군은 즉각 약세로 바뀐다. 이전의 지휘하에, 이 군대는 금나라군대에 여러번 공격을 감행하고, 연전연승한다. 그렇게 산동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세력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이전, 양묘금이 직면해야하는 곤경이 있었다: 군대에 양식이 없는 것이다. 몽골의 침입, 금나라의 압박으로 백성들은 남으로 도망쳤으며, 농지는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식량부족이 심각했다. 산에는 비록 약탈해서 얻은 재물이 가득했지만, 그것은 밥으로 삼아 먹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다가 남방에서 온 장삿군이 양식을 밀수해서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배수거신(杯水車薪)이었다.

 

어떤 사람이 남방의 장삿꾼을 통해 남송조정과 줄을 대어 양식을 얻는다. 이를 보고 이전부부는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긴다.

 

양안아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나라사람, 몽골사람들이 한인을 살륙하는 장면을 계속 보아왔고, 게다가 양식의 유혹도 있어서, 이전 부부는 송나라에 귀순하기로 결정한다.

 

같은 한인이므로 당연히 성의를 가지고 협력해야 한다. 아마도 이때가 그들의 마음 속에서 '화이지분'이 가장 강렬했던 때일 것같다.

 

2

 

그러나, 송나라의 생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남송의 군신들은 금나라군대가 몽골인의 공격하에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목도했다. 그리하여 마음 속으로 놀라면서 두려웠다. 그러나, 계속 연약하고 구차하게 생존을 도모하던 남송이 무슨 큰 일을 시도하지도 못했다. 조정을 책임지고 있는 재상 사미원(史彌遠)이 비록 금나라에 보내던 세폐(歲幣)를 중지시켰지만, 여전히 화약(和約)은 지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으로 도망쳐온 한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심지어 국경을 넘어오는 백성들을 죽여버렸다.

 

이전등에 대하여, 사미원은 공개적으로 거둘 수가 없었다. 그저 암중으로 그들에게 "충의군"이라는 명호를 부여하고, 1만5천명분의 군량미를 제공한다. 명목은 "충의량(忠義糧)"이었다. 그리하여, 산동호걸들이 속속 내려왔지만, 회북(淮北)의 초주(楚州)일대에 오밀조밀 모여있게 되고, 지방의 거대한 세력이 된다.

 

쌍방의 합작은 비록 "충의"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처음부터 이익을 따지는 것이 명확했다.

 

1217년, 징기스칸이 서쪽정벌에 나선 틈을 타서, 금나라조정은 송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금나라군대는 3로로 나누어 내려왔고, 양회(兩淮)가 그중 한 전장이었다. 송나라군대는 금방 패퇴하였고, 다시 평화협상을 하고자 했다. 이는 '충의군'으로 하여금 마음 속에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송과 금이 일단 평화협상을 맺게 되면, '충의군'은 금나라군대에 의헤 토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충의군은 속속 남으로 벌떼처럼 피난하여 내려온다. 이는 혼란을 가중시킨다.

 

바로 이때, 가섭(賈涉)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국면을 바로 잡는다. 그는 기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신분을 가지고 있다: 가사도(賈似道)의 아버지. 

 

그는 위기의 순간에 "충의군"을 보내 송군을 지원하고, 금군의 후방을 습격한다. 계약직이 정규직으로 편제해주니 충의군의 사기는 크게 오른다. 충의군이 열심히 싸웠기 때문에 양회 각지의 위기국면은 모두 해소된다. 이전은 과구(涡口)와 화피호(化陂湖) 두 전투에서 금군의 주력을 대파하고, 금군장수 몇명을 포로로 잡는다. 이는 양회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하는 전투였다. 그후, 금나라군대는 회동(淮東)을 6,7년간 다시는 노리지 못하게 된다.

 

전쟁후, 가섭은 회동제치사(淮東制置使)에 임명된다. 이는 송나라에서 회동의 최고장관이었다. 이전은 충의군의 영수로, 관직이 급속히 오른다. 양묘진도 남송정부로부터 재물을 하사받는다. 금나라의 회유를 받자 이전은 이렇게 말한다: "강회의 귀신이 될지언정 금나라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최소한 이때까지는 이전이 진심으로 송나라에 귀순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송나라조정과 충의군의 협력은 밀월기에 접어든다. 송나라는 이전을 이렇게 칭한다: "변경이 위기에 처했을 때, 기꺼이 선봉으로 나섰으니, 그 공을 가릴 수 없다." 충의군이 선봉에 나서 적진을 돌파하여, 송나라로 하여금 산동, 하삭의 땅을 개척하게 해주었다. 이전은 금나라에 투항했던 청주(靑州)를 수비하는 관리 장림(張林)에게 권유하여, 산동70여성과 함께 송나라에 귀순하게 한다. 그래서 금나라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다: "송나라조정은 이전에게 허명을 주고, 산동이라는 실지를 가져갔다."

 

그러나, 가섭의 눈에, 충의군은 어쨌든 자기 사람이 아니었다. 이는 절대다수의 송나라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했다. 가섭은 이전등은 그저 혼란을 틈타 이익을 도모하는 토비일 뿐이다. "굶주리면 사람도 물고, 배부르면 목숨을 바친다" 그는 양식을 가지고 통제하고, 고관후록을 가지고 회유했다. 그저 충의군을 도구로 본 것이다. 충의군에 대한 적대감으로 기회만 있으면 가섭은 충의군을 분리시키고, 그들 서로의 관계를 틀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규군을 파견하여 감시하고 배척했다.

 

그래서 왕부지(王夫之)는 이렇게 말한다: "송나라는 원래 외롭지 않았는데, 외롭게 된 것은 의심하는 가법떄문이었다."

 

이전은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살려는 의지가 아주 강렬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이해관계를 따졌다. 송나라사람들이 그에게 잘 대해주면 그는 전심전력을 다해서 송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일단 형세가 변화하면 예를 들어 송나라사람들이 그를 경계하고, 금나라에서 그에 대한 토벌을 느슨하게 하면 그는 개인세력을 키우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가섭의 대비와 이전의 속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섭이 경계하면 할수록, 이전의 반감은 커진다. 이전의 반감이 커질수록 가섭은 더욱 경계하게 된다. 결국 끊을 수 없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1223년, 가섭은 교외로 나가 권농(勸農)의식을 진행한다. 초주로 돌아오는 도중에 충의군의 부하가 그의 행렬을 가로막고, 시위를 한다. 당시, 이전은 멀리 산동의 청주에 있었고, 부인 양묘진을 초주에 남겨서 부대를 통솔하게 했다. 양묘진은 그 말을 듣고, 즉시 집을 나서, 행렬을 가로막은 충의군을 질책한다. 그리하여 가섭은 비로소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신이 피로해진 가섭은 병으로 쓰러진다. 그는 조정에 글을 올려 사직한다. 그후 임안(臨安, 지금의 항주, 남송의 수도)으로 간다. 황제를 만나기도 전에 그는 병사하고 만다. 이전은 계속 회해일대에서 주변세력을 흡수하면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송나라조정이 충의군을 조종하려는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가섭

 

3

 

가섭이후, 송나라조정은 여러번 회해를 책임지는 관리를 교체했지만, 회해의 형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1223년, 강경파인 허국(許國)이 초주로 부임한다. 당시 이전은 출정하여 외부에 나가 있는 상태였고, 양묘진이 성문을 나와 맞이하려고 하는데, 허국은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 않는다. 나중에 그는 모든 산동사람들 앞에서 북군(北軍)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남군과 북군이 다투게 되면 항상 남군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후, 허국은 회서(淮西)와 회동(淮東)의 마보군(馬步軍, 보병,기병) 13만명을 모아서, "초주성 밖에서 열병식을 하여, 북인들의 마음을 좌절시킨다." 이런 시위는 그저 이전부하들의 반감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들은 어느날 아침, 허국을 활로 쏘아 상처입히고, 그의 일가족과 일부 관병들도 죽여버린다. 허국은 남으로 도망쳤으나 중도에 목을 매어 자결한다.

 

이번 병변(兵變)은 최종적으로 이전에 의해 '제지'된다. 그는 전선에서 초주로 돌아와서, 상징적으로 몇명을 죽이고나서 송나라조정에 보고하며 최를 처벌해달라고 청한다. 송나라조정은 이들을 누르는 것이 안되겠다고 여겨 다시 회유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꾼다. 그리하여, 이전에게 더 많은 양식을 준다. 새로 취임한 서희직(徐晞稷)은 그저 미봉책으로 양쪽을 달랠 뿐 서로간에 갈라진 틈을 봉합하지는 못했다. 

 

송나라조정과 충의군은 이미 동상이몽상태였다. 형세때문에 서로 결렬하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1226년, 몽골기병이 다시 남하한다. 이전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격패당하여 청주에 갇힌다. 소식이 남방에 전해진 후, 송나라조정은 즉시 안면을 바꾼다. 유탁(柳琸)을 서희직과 교체하면서, 진압책을 쓴다. 이때 이전이 초주에 남겨둔 부대는 겨우 3천명이었다. 이전계열의 충의군이 남겨놓은 수십만의 가족, 난민은 이제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비참한 처지가 된다.

 

당시, 초주성에는 이전이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양묘진과 충의군은 혼동에 빠진다. 유탁은 또 다른 충의군 수령 하전(夏全)과 연합하여 초주의 '북군'을 위협한다. 그들로 하여금 3일내에 성을 떠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을 일단 나서면 몸에 지닌 무기, 금은재물은 모조리 빼앗기고, 도살을 당하게 될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양묘진은 미인이간계를 쓴다. 그는 사람을 하전에게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장군은 설마 산동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고 했다. 이가가 무너지면 하씨라고 얼마나 가겠는가." 하전도 그녀의 말에 동의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양묘진은 곱게 차려입은 후 하전의 면저능로 가서 애걸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모두 이전오빠는 죽었다고 한다. 나는 일개 여인으로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신을 남편으로 삼을 수밖에 없고, 집안의 자제, 금은재물, 병기양식은 모두 당신 것이 될 것이다. 당신이 받아달라. 이것이 나로서 최대의 성의이다.

 

하전은 미인을 보자 마음이 움직인다. 다시 이전의 재물을 모조리 자기에게 주겠다는데 싫어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크게 연회를 베풀고, 양묘진의 부대와 적대관계에서 우호관계로 바꾸고, 함게 유탁을 상대하기로 한다.

 

금방 하전이 양묘진과 연합하자, 초주성은 큰 혼란에 빠지고, 송군이 막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유탁은 혼자 도망친다. 하전이 성으로 돌아오자, 성벽위에는 모두 양묘진의 사람들 뿐이었고, 그를 성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그제서야 속은 줄 알았다. 그리하여, 하전은 어쩔 수 없이 무리를 이끌고 금나라에 투항한다.

 

양묘진은 일석삼조의 계책을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유탁도 쫓아내고, 하전도 몰아냈으며, 그녀와 충의군은 보존한 것이다. 그녀가 있었기 때문에 이전은 후방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조정에서 파견나온 회도절도사 요충(姚翀)도 그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게 된다.

 

회해를 다스리는 송나라의 관리는 가섭, 허국, 서희직, 유탁과 요충까지 주마등처럼 교체되었다. 그러나 시종 회해의 상황은 호전되지 못했다. 송나라의 정책은 시종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 충의군을 이용하여 고토를 회복하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의심하고 타격했다. 타격할 때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했고, 실패한 후에는 그저 그들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었다. 그러다보니 충의군의 마음 속에 '충의'는 남아있지 않게 되고, 실력도 그다지 약화되지 않았다.

 

송나라의 일련의 진압조치는 이전으로 하여금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전선에서 적과 싸우고 있는데, 배후에서 칼질을 할 줄은 몰랐다. 이때 금나라의 사자가 즉시 찾아와서, "회남왕(淮南王)"을 주겠다고 그를 회유했다. 이전의 태도는 이전처럼 그렇게 확고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옛 부하도 너희 나라에서 '왕'으로 있는데, 그럼 나에 대한 대우는 어떠해야겠는가?"

 

민족대의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의 그는 단지 현실의 이익과 권력의 크기만을 따질 뿐이다.

 

이전은 청주에서 1년간 갇혀 있었다. 그동안 장수와 병사를 많이 잃었으며, 양식도 떨어졌다. 남쪽에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원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몽골에 투항한다.

사미원

 

4

 

1227년, 송나라조정은 더 이상 "충의양(忠義糧)"을 공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발호하던 "충의군"을 견제했다.

 

생존압력의 압박하에 충의군의 내부는 분열한다. 5명의 장수는 남송정부의 돈과 양식을 받기 위하여, 양묘진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병력을 이끌고 양묘진의 집으로 쳐들어가, 이전의 친척들을 주살하며, 쌍방은 수백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다. 그들은 부인 1명을 죽여버리고, 양묘진이라 여겨, 수급을 경성으로 보낸다. 그러나 그 부인은 기실 이전의 둘째부인 유씨(劉氏)였고, 양묘진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전은 청주에서 그 소식을 들은 후, 몽골대장의 장막으로 달려가 남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몽골인이 허락하지 않자, 이전은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 자신의 충성심을 표시한다. 몽골인은 이전을 죽여버리는 것은 산동을 통치하는데 불리하다고 여겨 그로 하여금 산동을 관할하게 한다. 그리고 매년 공물을 바치면 된다고 했다. 그후 이전은 초주로 돌아가서, 미친듯이 보복한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회해일대의 패주지위를 확보한다.

 

이전이 남으로 돌아온 후, 공개적으로 송나라에 반기를 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또한 북상하여 몽골궁정으로 배알하러 가지도 않는다. 그는 한편으로 산동을 적극적으로 경영하면서 대거 남북의 인사를 끌어모으고, 전마를 구매하며, 전함을 건조하며, 무력을 과시한다. 한편으로 송나라조정에 사신을 보내 양초의 공급을 요구한다.

 

이것은 그의 전략이었다: 삼국의 사이를 오가면서 자신의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한다.

 

그는 송나라의 대신 장국명(張國明)을 교사하여 조정에 말하게 한다: "이상공은 영웅이며, 오백보 거리를 활로 쏘아 맞출 수 있다. 조정에서 영토를 떼어주어 그를 왕으로 삼고, 돈과 양식을 보내어 변방을 지키게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 말에 숨은 뜻은 이전은 절대 송나라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현지의 지방왕이 되기를 원하며, 돈과 양식을 원한다는 것이다. 송나라조정으로서는 할 수 없이 그를 절도사로 임명한다. 

 

이전은 연약한 송나라조정은 자신의 물자공급처로 여겼다. 양식이 부족하면 전함을 보내어 가흥을 순시하고, 돈이 부족하면 회동의 염장(鹽場)을 강점했다. 그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조정은 나를 아이로 여긴다. 울면 먹을 것을 준다."

 

1230년, 이전은 정식으로 송에 반기를 든다. 병력을 일으켜 염성(鹽城)을 점령한다. 사미원은 그 소식을 들은 후 그가 군사쿠데타까지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다독인다. 심지어 사죄를 면해주는 "서서철권(誓書鐵券)"까지 하사한다. 이를 통해 이전을 달랜다. 이런 고식적인 책략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대에 부닥친다. 그리하여, 송이종(宋理宗)은 이전의 관작을 박탈하고, 전량의 공급을 중단하며, 병력을 보내어 그를 상대하게 한다. 쌍방은 양주 일대에서 격전을 벌인다.

송이종

이언의 언행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그는 송나라조정과 철저히 결렬할 생각은 아니었다. 남하한 것은 그저 더 많은 이익을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송나라의 실력을 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1231년 정월 십오일, 이전은 군대를 이끌고 남송의 군대를 맞았으니, 양주성 바깥의 신당(新塘)에서 창에 찔려 전사한다.

 

이전이 죽은 후 남소은 그 기회를 틈타 군대를 북진시켜 초주까지 진격한다. "충의군"의 나머지 무리들은 양묘진을 수령으로 추대하여 대국을 주재하게 한다. 그러나 국면을 호전시키지 못했다. 오랫동안 분을 참아왔던 남송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북인이 보이기만 하면 미친듯이 살륙을 벌였다. 역사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 만여가를 불질렀으며, 비린내나는 화염이 하늘을 덮었다."

 

이렇게 되니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게 된다. 양묘진은 마음이 떠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20년간 이화창을 휘둘렀으며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이제 대세가 기울었다. 너희들은 아직 송에 투항하지 않았는데, 내가 여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죽이고 송에 투항하는 것은 너희들이 차마 할 수 없을 것이고, 나를 죽이지 않으면 송나라군대가 투항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조정에 이렇게 말해라. 원래 나를 죽이고 투항하려 했는데, 나에게 발견되어, 나를 산동으로 쫓아냈다고. 사람들은 모두 그게 좋겠다고 말한다. 충의군은 이렇게 분열된다.

 

복수를 위하여, 양묘진은 자신의 직계부대를 이끌고 초주로 쳐들어가나 연전연패한다. 개략 1,2년간 버티다가 결국 산동으로 되돌아간다. 

 

5

 

1233년, 양묘진은 오구데이칸을 배알한다. 몽골인의 도움을 받아 그녀는 죽은 남편 이전의 "산동행성"이라는 직위를 이어받고, 자신의 영지를 확보한다.

 

형세가 변했다. 먼저 평화가 도래한 것이다. 이전이 몽골에 투항한 후, 산동에서는 기본적으로 전투가 없었다. 다음으로, 송나라에서 받던 전량이 끊어졌다. 송나라의 사인도 더 이상 무역을 하지 않았다. 양묘진은 더 이상 남방에 기대를 걸 수 없었고, 그저 혼자힘으로 산동을 재건해야 했다. 

 

이전,양묘진집단은 산속, 섬으로 도망쳤던 백성들을 다시 불러모았고, 전통적인 농업생활을 회복시킨다. 지방지의 기록에 따르면, 숙천주씨(宿遷周氏)는 금나라말기의 병란을 거친 후, 유주북해현(濰州北海縣)으로 옮겨가서, 이곳에서 땅을 개간하고 후손이 번성하기 시작한다. 결국 북해의 대성이 된다. 경제가 회복되면서, 이전,양묘진집단도 다시 흥성하게 된다.

 

산동으로 돌아간지 1년여가 지나서, 양묘진은 야율초재(耶律楚材)에게 글을 올려 사직한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연령이고, 둘째는 자신이 공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까 우려된다는 것이고, 셋째는 빈계사신(牝鷄司晨,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아들 이단(李璮)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양묘진, 이전은 산동 홍오군(紅襖軍)의 두령중 하나이다. 양묘진이 맡은 것은 모두를 이끌고 나아가는 지도자의 역할이 아니라, 정해신침(定海神針)같은 역할이었다. 매번 집단내에 위기가 나타날 때마다, 그녀가 앞장서서 국면을 되돌리곤 했다.

 

지금 이단이 이미 성장했고, 부친의 효웅기질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확실히 이제 늙었다.

 

처음에, 야율초재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더욱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해서 남송에 남편을 죽인 복수를 하라고 말한다. 몇년이 지나지 않아, 양묘진은 다시 상소를 올렸고, 산동의 대권은 이단에게 넘어간다.

야율초재

부친과 마찬가지로, 이단은 홍오군의 할거지위를 확보하려고 했다. 다만 그의 처지는 부친때보다 훨씬 어려웠다. 먼저, 1233년 오구데이가 순지해(純只海)를 익도행성(益都行省)의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한다. 다루가치의 원래 뜻은 '장관이 되는 사람'이며, 실제로는 몽골인이 지방에 심어놓은 눈과 귀이다. 그리고 이단은 반드시 몽골인에게 인질을 보내어 충성을 표시해야 했다.

 

1236년, 송과 몽골의 전쟁이 발발한다. 산동을 차지하고 있던 이단은 송나라와의 전투에 거의 참가하지 않고, 오히려 남송과의 상업무역관계를 재건한다. 산동은 원래 물산이 풍부한 땅이다. 염광과 동광(銅鑛)은 풍성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이단은 몰래 물자를 송나라에 팔았고, 얻은 돈으로 실력을 확충한다. 당시 이단은 5만에서 7만에 이르는 정예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용맹하기로 이름난 몽골인들조차도 그의 병사들이 "용맹하여 억누르기 힘들다"라고 했을 정도이다.

 

그외에 그는 적극적으로 문인들을 회유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익도사람 왕문통(王文統)이다. 그는 모사이며 여러 제후들을 찾아다녔지만, 재능을 가지고 좋은 주공을 만나지 못횄다. 그러나 이단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자신의 휘하로 받아들이며 또한 왕문통의 딸을 취한다. 왕문통은 이단에게 몇 가지 계책을 내놓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허장적세(虛張敵勢)로, 적국을 끼고 자신의 힘을 늘인다는 것이다.

 

1258년, 몽케칸이 조서를 내려 이단의 병력으로 하여금 사천을 정벌하도록 명한다. 이단은 즉시 송나라가 호시탐탐하고, 익도는 요충지이니 빼앗겨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출병을 거부한다. 몽케는 그를 남하하여 양회(兩淮)로 진격하도록 다시 명한다. 그리하여 이단은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연수(漣水), 동해(東海)를 점령한다. 이로 인하여 송나라조정은 깜짝 놀란다. 그러나, 그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후에 더 이상 성과를 확장시키지 않고, 송나라에서 장강상류로 병력을 파견할 수 있도록 해준다.

 

1260년, 쿠빌라이가 칸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송나라조정과 의화(議和)를 원한다. 이단은 알고 있었다. 일단 몽골이 송나라와 의화를 이루면 자신의 독립적인 지위는 보장되기 어렵다는 것을. 그리하여 서신을 사신에게 보내어, 송나라에 들어가지 말도록 하면서, 자신은 병력을 보내어 송나라변경을 침입한다. 그리고 몽골인들에게 성을 보수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구한다. 

 

같은 해, 왕문통은 쿠빌라이에게 발탁되어 중앙정부로 간다. 이 관계를 통해서, 이단은 더욱 몽골인들의 동향을 잘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는 각지의 한인제후(몽골에 붙어 정복에 공을 세운 한인장수)들과 연락하여 조정의 동태를 주시한다. 일단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병력을 일으킬 수 있도록 했다.

 

이단이 대권을 쥐고 지방에 할거하려는 것에 대하여 쿠빌라이는 일찌감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급히 손을 쓰지 않았다. 어쨌든 당시 내부적으로는 아릭부케의 반란이 있었고, 밖으로는 송나라조정의 위협이 있었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후한 상을 내리면서 이단을 다독였다.

쿠빌라이

 

6

 

1261년 겨울, 쿠빌라이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막북으로 가서, 아릭부케와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이단은 그 기회를 틈타 반란을 획책한다. 다음 해 정월, 그는 사설 역도(驛道)를 통해 연경(燕京)에 인질로 잡혀 있던 아들을 데려온다. 그후, 이단은 경내에서 몽골에 충성하는 수군(戍軍)을 주살한다. 그리고 연수, 해주등의 성을 남송에 바치고, 송군과의 협력을 요청한다.

 

이단의 계획은 이러했다: 쿠빌라이와 아릭부케가 양패구상하면, 각지에 웅크리고 있던 한인제후들이 일거에 거병하고, 송나라조정이 북상하면, 화북경내의 한인들이 속속 가담할 것이니, 이런 힘들이 모이면, 몽골인의 통치를 끝장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아름다우나, 현실은 잔혹하다.

 

이단이 자신만만하게 제남성을 함락시킨 후, 돌연 자신이 생각하던 흐름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릭부케는 화림(和林)을 포기하고, 서정(西征)에 나서고, 쿠빌라이는 주력을 이끌고 회군한 후, 직접 왕문통을 죽여버린다. 송나라조정은 힘이 미치지 못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한인제후들은 모두 관망만 하고 있었다. 심지어 산동의 한인들조차 이단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속속 산속이나 성안으로 숨어버린다. "그리하여 익도에서 임치까지 수백리는 적막하여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몽골기병의 공격에 이단은 금방 제남으로 퇴각하게 된다. 몽골인은 성을 포위만 할 뿐 공격하지 않는 책략을 취한다. 시간이 흐르자, 제남성안에는 양식이 떨어지고, 사기가 바닥을 친다. 그후 몽골인이 공격하여 성안으로 진입한다. 이단은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대명호(大明湖)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죽지 않고, 몽골인에게 포로로 잡혀서 군대앞에서 처형당한다. 

 

이렇게 하여 산동을 할거하던 이전,양묘진집단은 멸망하게 된다.

이단

 

이단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이씨는 산동을 삼십여년간 장악하고 있었으니, 이론적으로는 민심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민족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당시는 금나라가 멸망한지 이미 30년이 지났고, 산동의 질서는 재건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전란을 원치 않았다. 반란을 일으킨 이단은 구세의 영웅이 아니라, '평화의 파괴자'로 보였던 것이다.

 

이단이 실패한 후 어떤 사람이 몽골장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단의 일당은 토착이 아니고, 동남의 광사(狂士)들이 있었다". 비록 이단이 연수, 해주를 함락시킨 후, 현지의 병사를 많이 거두었지만, 여전히 산동인들이 '이단의 일당'의 핵심이었다. 예를 들면, 주살된 왕문통같은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한 진정한 의도는 이단과 동남광사들을 속죄양으로 삼아, 산동인들에게 화를 미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만일 대거 살륙을 벌이게 되면, 몽골인들이 다시 '질서를 파괴하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송조정은 이단이 죽은 후 그를 태사(太師)로 추봉한다. 그리고 그에게 "현충(顯忠)"이라는 묘호를 내린다. 비록 그의 부친은 회해를 어지럽힌 적이 있지만, 송나라조정이 생각한 것은 이단의 이름을 빌어, 더 많은 사람들을 "반이(反夷)"의 기치아레 모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 기치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을까? 악비, 육유, 신기질, 문천상....다만, 그들 대부분은 하나의 계층이다. 즉, 사(士). 우리가 눈길을 하층출신인 이전에게 돌려보면, 발견하게 된다. 민족의식의 영향은 아주 낮았다.

 

우리가 이전, 양묘진등을 평가할 때, 항상 그들의앞에 하나의 선택이 있었다고 가정한다: 이(夷)냐 아니면 화(華)냐. 영웅으로 죽을 것인가. 반도로 구차하게 연명할 것인가?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길 것인가, 아니면 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릴 것인가? 그러나, 기실 그들의 앞에 놓인 것은 오직 하나의 길이었다: 이익. 아마도 항금때, 이전은 영웅의 감각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송조정이 그를 배척하자 그의 민족대의는 더 이상 자리잡을 곳이 없어져 버린다.

 

소위 민족은 민족이 되고자 하는 그런 것이다. 즉, 혈연, 문화, 종족은 민족간에 피차를 구분하는 기초이다. 다만 하나의 민족이 성립하려면, 이 민족은 반드시 하나의 강렬한 바램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다.

 

글을 많이 읽은 선비계층은 비교적 가볍게 이것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선비계층 이외의 농민, 상인, 공장(工匠)은 제국체제하에서, 그들의 의무는 그저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고, 그들의 목표는 생존이다. 그후는 부유해지는 것이고, 그들에게 정치는 '자신과 관련없는 국사'이다.

 

이런 질서가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다. 그들이 복종하는 것은 스스로 자각해서가 아니다. 그저, 방대한 정부체제하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들어지면, 반란에 가담하게 되어 질서를 흐트려버리게 되는 것이다.

 

민중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 신하들의 상호견제, 이것이 바로 송나라에서 바라던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이민족의 침략을 받게 되자, 남인은 북인을 시기하고, 문인은 무인을 경계하고, 백성들은 그저 생존만 생각하고, 우두머리는 그저 이익만 생각하게 된 것이다. 

 

"화이지분"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상하지분(上下之分)"을 너무 성공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