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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적벽대전: 조조가 패배한 원인은 화공이 아니다?

by 중은우시 2023. 8. 14.

글: 역사학당군(歷史學堂君)

 

역사상 적벽대전은 한말 삼분천하의 정치국면을 결정한 중대사건이다. <삼국연의>의 가공을 거쳐, 특히 설전군유(舌戰群儒), 초선차전(草船借箭), 차동풍(借東風), 장간도서(蔣幹盜書), 주유타황개(周遊打黃蓋), 화소적벽(火燒赤壁)등의 이야기로손류연합군이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대파한 민간기억을 채워놓았다.

 

그렇다면, 위, 촉, 오 삼국정립 국면을 확립시킨 적벽대전에서 결정적인 승패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중 결정적인 작용을 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정말 손류연합군이 동풍을 빌어, 조조의 전선을 태워버렸기 때문에 조조의 군대가 패배하게 된 것일까?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에 대하여, 최근 들어, 여러 연구자들이 삼국연의의 사고범위를 넘어, 역사로 되돌아가 더욱 신뢰할만한 답안을 찾으려 노혁했고, 몇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나타났다.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다음의 몇 가지 견해이다.

 

1

 

조조가 병가의 금기를 범했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병가에서 금기를 범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역사학자들의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금기를 범했는지에 대하여는 주장하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조조가 교병필패(驕兵必敗) 즉 교만한 군대는 반드시 패한다는 금기를 어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조조가 전선을 쇠사슬(鐵鎖)로 연결시키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한다(일설에서는 목판을 대어 못을 박아 앞뒤로 배들을 연결시켰다고 말한다). 

 

또 어떤 연구자들은 조조가 5천의 경기병(輕騎兵)을 이끌고 위험을 무릅쓰고 적벽으로 나아가 손류연합군과 조우전을 벌였다가, 첫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어서 장강북안의 오림(烏林)에서 다시 황개의 화공을 받아, 결국 패배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적벽대전의 정확한 정의는 적벽-오림대전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본다.

 

2

 

조조의 군대와 손류연합군의 병력은 그다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어떤 견해에 따르면, 조조와 손류연합군의 병력차이가 컸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전투전의 여론선전과 형세분석에서 조조는 자칭 80만군대를 이끌고 남정에 나섰다고 했지만, 주유는 조조군이 기껏해야 24만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여사면(呂思勉) 선생은 조조가 이끈 북병은 약 15,6만명이라고 본다. 여기에 새로 투항해온 형주병 7,8만명을 합치면 합계 전투병력은 20여만으로 본다. 그리고 손류연합군은 대체로 5만가량이어서, 쌍방의 병력차이는 5대1정도였다고 본다.

 

다만 어떤 연구자들은 물자보급과 행군 그리고 형주에서 투항한 군대의 상황을 볼 때, 조조측의 실제참전부대는 약 7만명이라고 본다. 손류연합군의 참전인원은 5만명이므로 양자간의 병력대비는 2대1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력차이가 크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군원정(孤軍遠征)에 나선 조조군이 적벽대전에서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본다.

 

3

 

조조의 전선이 불에 탄 사건에 대하여, 손류연합군의 화공이라는 설과 조조가 배를 불태우고 퇴각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화공은 제갈량의 차동풍과 주유타황개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걱벽일대에서 겨울에 동풍이 나타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증을 해보았고, 다수는 장강중류일대에서 겨울에는 장기간 북풍이 불지만 잠깐 동풍 혹은 동남풍이 나타날 수있다고 보았다.

 

주유타황개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황개가 거짓으로 투항하고, 조조군의 배를 불태운 것은 믿을만하다고 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주유타황개는 완전히 근거없는 헛소리라고 본다. 다만 거짓투항과 화공은 확실히 존재했다고 본다. 손류연합군이 조조의 전선에 화공을 가했다는 것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사서의 기록을 인용하여 조조가 스스로 배를 불태워버리고 퇴각했다고 말한다.

 

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서신에서 조조는 이렇게 언급한다: "적벽의 전투에서, 질병이 있었다. 고(孤)는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퇴각했다(燒船自退). 생각지도 못하게 주유가 헛되이 명성을 얻게 만들었다." 만일 조조가 스스로 "고는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물러났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주유가 헛되에 명성을 얻게 만들었다"는 것이 죽어도 체면을 지켜야겠다는 것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면 , <삼국지.오지.오주전>에 기록된 조조가 "나머지 배를 불태웠다(燒其餘船)"은 적군의 각도에서 조조가 스스로 자신의 전선을 불태웠다는 것을 인정한 내용이라 할 것이다.

 

4

 

전염병의 적벽대전에 대한 영향

 

전통사서에는 조조가 배를 불태우고 퇴각한 일을 기록할 때, 전염병을 중요한 영향요소로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서신중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퇴각했다(燒船自退)"고 한 서신에서, 그가 퇴각한 원인으로 "질병이 있었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여기의 "질병"은 바로 전염병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외에 <삼국지.오지.주유전>에는 "손권이 주유와 정보를 보내어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 대항하여 적벽에서 만났다. 당시 조조의 군대중 많은 사람이 이미 질병에 걸려 있었다. 첫 교전이 있은 후, 조조는 패퇴하여 강북으로 물러났다." 그중 특별히 조조의 군대에 당시 전염병이 있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또 다른 <삼국지.오지.오주전>에는 조조의 군대가 적벽에서 패퇴한 후, "조조는 나머지 배를 불태우고 퇴각했다. 병사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또 다른 <삼국지.촉지.선주전>에서도 "선주와 오군이 수륙의로 병진하여, 남군까지 추격했다. 당시 다시 질병이 일어나 북군의 다수가 사망했고, 조조는 되돌아가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조조의 군대는 적벽대전을 전후하여 전염병으로 고생했다는 것이 다툼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조조의 군대가 걸린 전염병에 관하여, 어떤 사람은 페스트(鼠疫)이라고 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흡혈충병(吸血蟲病)으로 본다. 다만 어떤 연구자들은 발진티푸스(班疹傷寒)이야말로 한말,삼국시대에 주로 유행했던 전염병이라고 말한다.

 

한말의 '전염병'을 직접 겪었으며 후세인들이 의성(醫聖)으로 추앙하는 장중경(張仲景)은 그의 <상한론(傷寒論)>의 "서(序)"에서, "나의 종중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백명이 넘었다. 건안이래 십년도 되지 않아 죽은 자가 삼분의 이에 이르렀고, 상한이 열중 일곱이었다."

 

역사상 장중경이 장사태수를 맡았는지 여부와 그가 맡은 기간에 대한 문제를 둘러싸고, 어떤 연구자들은 적벽대전때 조조군이 전염병으로 패배했다는 기록에서 추간하여, 장중경이 분명히 적벽대전을 전후하여 의술치료와 상한에 대한 통제를 통해 손류연합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에게 승리를 거두도록 했다고 본다. 그리하여 유비가 그를 장사태수로 임명했다고 보는 것이다.

장중경(150~154-215~219)

그렇다면, 적벽대전에서 조조는 도대체 왜 패배한 것일까, 패배한 주요원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실제로,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확실히 여러 방면의 원인이 있다. 두드러진 것으로는 완급의 조절문제였다. 조조의 군대는 형양(荊襄)을 향했고, 유종은 즉시 투항했다. 그런데, 유비가 소속병마와 백성을 이끌고 도망쳤다. 조조대군은 계속 추격했고 장판파에서 유비의 군대를 만나 대파한다.

 

마땅히 조조군의 추격속도는 아주 빨랐을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그후 더이상 궁지에 몰린 적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비는 재정비할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손권은 노숙, 주유등 주전파의 주장과 유비의 유세객 제갈량의 유세하에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와 맞서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조조군은 일거에 2대1로 싸워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국면변화에, 이미 전투기회를 놓친 조조는 그냥 진지를 고수하면서 싸우지 않을 수 있었다. 새로 귀속시킨 형양의 사람들을 다독이면서 새로 투항해온 형주병을 재편하는 업무를 진행하면서 손류연합군과의 결전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조조는 이미 승리에 취해서, 결전을 하기로 한다. 그러다가 결국 패배한 것이다. 금방 손에 넣었던 형주도 빼앗겨버린다. 즉, 조조의 잘못은 급해야 할 때 급하지 않았고, 늦추어야 할 때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리듬을 거꾸로 가져갔던 것이 문제였다.

 

그외에 구체적인 전투에서, 조조는 다시 적을 무시하고 자만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전선을 하나로 묶어둔 것은 그다지 큰 실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화공에 대하여는 다시 한번 조조가 전투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히 우발적인 동풍이 불기 전에 자신에게 유리한 바람을 이용하여 손류연합군에게 화공을 가하거나 통상적인 진격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조군의 배를 불태운 것에 대하여 <삼국지>의 기재를 종합하면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조조군의 일부 전선이 확실히 손류연합군의 화공에 불탔다. 그러나 손실이 크지는 않았다. 조조군의 대부분의 전선은 조조가 철수결정을 내린 후 스스로 불질러버린 것이다. 상대방이 활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조조가 왜 첫전투에서 실패했는지를 분석하는 면에서, 스스로 퇴각을 결정하게 된 근본원인은 조조군내부에서 발생한 심각한 전염병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전파된다는 것은 위생상황 및 인원의 밀집정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군영과 감옥같이 인원이 밀집되고 위생조건이 열악한 장소에서는 쉽게 전염병이 발생했다. 자고이래로 그리하여 수온(囚瘟), 군온(軍瘟)같은 말이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예를 들어, <한서.왕망전>과 <한서.서남이전>을 보면, 왕망이 병력을 파병하여 구정(句町)을 치는데, 결과적으로 "병졸들이 전염병에 걸려 죽은 자가 열에 여섯일곱이었다." "삼년여동안 죽은 자가 수만이었다."

동한말기의 건안연간에 전염병이 횡행했고,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다. 역사에서는 "건안대역(建安大疫)"이라고 부른다. 비록 건안13년 적벽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전염병은 건안말기의 전염병만큼 심하지 않았지만, 조조군내에서 전파되는 것은 상당히 심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조조의 중요모사 곽가(郭嘉)와 조조가 아끼는 아들 조충(曹冲)이 모두 이때의 군역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번 군역은 조조군의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 방면에서의 증빙은 앞에서 인용한 사료들 외에 <예문류취>권25에도 기록이 있다. 완리(阮璃)의 "조공을 위하여 손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적벽의 전투는 전염병을 맞아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돌아왔다. 이는 악지(惡地)를 피하기 위함이지 주유의 수군에게 좌절된 것이 아니다." 조위의 이런 입장은 단순히 패군지장의 핑계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말은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기이다. 악지를 피하고 전염병을 피하는 것은 이미 어쩔 수 없는 현명한 선택이다. 예를 들어, 황초4년, 조비는 병력을 보내 동오를 공격한다. 비록 첫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오군은 이미 독안에 든 쥐였지만, 오나라땅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위군은 할 수 없이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해서 전염병을 피해야 했다. 

 

이상을 종합하면, 객관적으로 맗새서,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패전한 원인은 여러 방면이지만, 군온이 조조군의 전투력을 급격하게 하락시키고, 조조가 패전하여 북으로 퇴각하게 만든 중요요소라 할 수 있다. 즉, 적벽대전의 승부를 결정지은 요소중에서 전염병이 실제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