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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75

모택동과 생활비서(生活秘書) 글: 서승빈(徐勝斌) 모택동은 입만 열면 말했다: "우리의 책임은 인민에게 부담한다" 사실 그의 여인에 대한 태도만을 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가 진정으로 인민에 대하여 책임을 부담했는지를. 1. 여인은 그저 모택동의 욕망배출도구였다. 애정은 충성(忠誠)을 기초로 한다. 모택동은 그의 여인.. 2008. 11. 18.
모택동은 하루에 돈을 얼마나 썼는가? 작자: 미상 중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주석이 담배를 즐겨피웠다고 알고 있다. 70년대초에는 시가도 피웠다. 차를 마시는 것도 모주석의 또 다른 취미였다. 그렇다면, 모주석은 하루에 생활비로 얼마나 소비했을까? 모주석은 60년대초에 급여를 3급으로 내려서 매월 404.8위안을 받은 후, 1976년 서거할 때.. 2008. 11. 14.
모택동이 유소기를 버리고 임표를 택한 이유는? 글: 김산(金汕) 모택동과 유소기의 관계는 친밀한 전우로서 문혁전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왔다. 다만, 1966년 제8기 11중전회에서 이런 혈우성풍(血雨腥風) 속에 맺어진 혁명의 정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1966년 8월 18일, 모택동은 천안문에서 홍위병을 접견했는데, 전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 2008. 10. 10.
모택동의 적벽대전에 대한 평가 위,오,촉 삼국정립의 국면을 만들어낸 적벽대전에 대하여, 사서를 많이 읽었고, 현실문제와 연결시키는데 능했던 모택동은 일찌기 8번에 걸쳐 4가지 측면에서 평가한 바 있다. 첫째, 어떤 문제는 아랫사람을 모두 탓해서는 안된다. 1959년 7월초, 여산(廬山)에 막 올랐을 때, 모택동은 대약진, 고지표문제.. 2008. 8. 2.
모택동은 생일에 어떤 요리를 먹었는가? 글: 누행건(樓行健) 생일은 인생의 중대한 날이다. 모택동도 그와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매년 자기의 생일을 잊지 않았다. 국가지도자로서, 모택동은 원래 매년 요란하고 풍성하게 생일을 지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연안(延安) 빼부터 당내에 "불축수, 불송예(不祝壽, 不送禮, .. 2008. 6. 29.
모택동의 다섯 명의 후계자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화국봉(華國鋒, 화궈펑)은 모택동이 다섯번째로 선택한 후계자이다. 유소기(劉少奇, 류샤오치)가 모택동이 선택한 첫번재 후계자이고. 1945년 중공칠대(中共七大, 중국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에서, 유소기는 모택동의 후계자라는 신분으로 나타났다. 그때 유소기를 위해서 여론을.. 2008. 6. 6.
모택동과 금병매 글: 유계흥(劉繼興) 명나라 융경 내지 만력년간에 만들어진 <<금병매(金甁梅)>>는 중국 최초의 장편 사회세정소설(社會世情小說)이다. 금병매는 수호전(水滸傳)에 묘사된 서문경(西門慶)과 반금련(潘金蓮)의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시정평민생활을 그리고, 관료, 악당, 부상이 삼위.. 2008. 6. 2.
모택동의 중공최고지도자 지위확립과정 글: 유계흥(劉繼興) 모두 아는 바와 같이, 1935년 1월에 소집개최된 준의(遵義)회의에서 실질적으로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지위를 확립했다. 깊이있게 분석해보면, 이 '확립'은 단지 '실질적'인 것이고, 또한 막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1938년초까지, 모택동의 중국공산당 지도자의 지위는 나.. 2008. 5. 15.
모택동과 수장(收藏)에 얽힌 이야기 모택동은 일생동안 문방사보, 고서적, 서화, 인장등의 감상과 수장을 좋아했다. 그는 저명한 수장가 및 서화가들과 교분이 있었고,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벼루와 묵합 모택동은 당대의 위대한 시인이다. 일생동안 붓을 즐겨 썼으므로, 벼루(硯)도 평생 곁에 두었다. 그러나, 그가 수장한 것은 단연(端.. 2007. 9. 3.
모택동과 홍루몽 모택동은 일생동안 많은 책을 읽었다. <<홍루몽>>이라는 고전소설은 모택동이 가장 중시했던 문학작품중의 하나이다. 청소년시대부터 그는 이 책을 아주 좋아했고, 나이들어서까지 여러번을 읽어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모택동의 아들 모안청과 그의 처인 소화(邵華)는 .. 2007.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