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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75

모택동의 입당일자는 왜 창당일자보다 빠른가? 글: 제오천추(第五千秋) 중앙자료관에 보관중인 중국공산당(중공) 제8차전당대회(8대)의 문서중에는 모택동이 친히 쓴 중공팔대 대표등기표가 있다. 이 등기표에는 입당일자를 쓰는 칸이 있는데, 분명하게 1920년이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바로, 모택동의 입당시간이 1920년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 2010. 10. 8.
모택동의 고위직을 역임한 7명의 친척 글: 진전요(秦全耀) 1. 강청(江靑): 중앙정치국 위원 - 모주석의 부인. - 1966년 5월이후, 문혁소조 제1부조장, 대리조장, 해방군문혁소조 고문. - 중공 제9차, 제10차 전국대표대회 중앙정치국위원 2. 모원신(毛遠新): 중앙정치국 연락원 - 모택동의 조카(모택동의 동생 모택민(毛澤民)의 아들) - 1968년, 요녕.. 2010. 5. 5.
모택동의 가정성분은 빈농인가 부농인가? 글: 제오천추(第五千秋) 과거 중국은 오랫동안 가정성분(家庭成分)을 아주 중요시했다. 모택동은 중국인민의 위대한 지도자이고, 세계에서 저명한 지도자급인물이다. 그러나 그도 마찬가지로 가정성분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모택동의 가정성분은 무엇인가? 많은 국내외인사들은 소산(韶山)의 모택동.. 2010. 4. 11.
모택동과 코민테른의 은원 글: 신력건(信力建) 모택동과 코민테른(共産國際)의 관계는 좋을 때도 있었고 나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좋거나 나쁘거나간에 모두 그의 운명과 적지 않은 관련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코민테른이 모택동에 처음 주목한 것은 1927년이다. 이해 3월, 모택동의 <<호남농.. 2010. 2. 21.
모택동 고거(故居) 편액의 변천사 "중국인민위대적영수모주석적가(中國人民偉大的領首毛主席的家)" 중국인민의 위대한 영수 모주석의 집. 신중국이 설립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산(韶山)의 모택동 고거에는 첫번째 편액인 "중국인민위대적영수모주석적가(中國人民偉大的領首毛主席的家)"가 걸렸다. 이 편액은 '소산일지필(韶山一.. 2009. 12. 26.
모택동은 이자성에게서 무엇을 배웠는가? 글: 홍촉(洪燭) 장중행(張中行) 노인이 1920년대 후반기에 통현(通縣)에서 사범대학을 다닌 적이 있다. 그 때 북경에 들어가 보았다: "걸어갔던 길은 임대옥(林黛玉)이 걸어서 입경했던 그 길이다. 조양문을 들어가서 계속 서쪽으로 갔다. 더 앞으로 가서, 나는 동사패루(東四牌樓)의 저시대가(猪市大街).. 2009. 10. 19.
모택동과 인연깊은 4개의 숫자: 28, 99, 8341, 300 글: 유계흥(劉繼興) 모택동의 일생을 살펴보면, 4개의 숫자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네 개의 숫자는 각각 28, 99, 8341, 300이다. 모택동과 28 1. 1893년 12월 26일, 모택동이 태어난다. 28년후인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탄생한다. 중공 제1차대회에 참석한 대표의 평균연령은 28세.. 2009. 7. 22.
맹금운(孟錦雲): 모택동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여인 글: CC 만일 1976년 9월 13일의 각 신문을 찾아본다면, 모택동의 영구를 지킨 사람의 명단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마지막에 쓰여진 낯선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맹금운. 바로 이 보통여자 맹금운이 일대의 개국원수를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모택동의 팔십여년의 비.. 2009. 6. 10.
모택동은 소년때 노동을 좋아했을까? 글: 오비(吳非) [주: 이 수필은 개략 1999년에 썼고, 3년전에 수정을 했다. 그러나 어느 신문잡지에도 발표할 수 없었다. 연초에 남방의 어느 잡지가 이미 싣기로 하고, 편집인이 제목을 "모택동은 소년때 논밭노동을 좋아했을까"로 두 글자를 추가시켰다. 고심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래도 최종심의를 통.. 2008. 12. 31.
모택동의 고대제왕에 대한 평가 글: 상진(尙振) 1. 상(商)나라 주왕(紂王) 제신(帝辛) - "아주 능력이 있다. 문무에 모두 능한 사람이다" 1958년 11월 스탈린의 <<소련사회주의경제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중에 상품생산을 이야기 하면서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상나라가 왜 상나라인가? 왜냐하면 상품생산이 있었기 때문이.. 2008.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