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과 하자진(賀子珍)의 결혼일자는?

by 중은우시 2014. 3. 2.

글: 복녕객(福寧客) 

 

1959년 7월 9일, 전 강서성제1서기 양상규(楊尙奎)의 부인 수정(水靜)은 여산(廬山)에서 하자진과 밤을 새워 얘기를 나누었고, 하자진에게 모택동과 언제 결혼했는지 물어보았다.

 

하자진은 수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1928년 영신(永新)에서 주석과 결혼했다. 당시에는 19살이 아직 되지 않았을 때이다." 이 내용은 수정이 쓴 <하자진과 함께 여산에 오르다>, <특수한 교왕 -- 성위제1서기부인의 회고>, 강소문예출판사 1992년 9월판 제222페이지에 나온다. 

 

하자진은 수정에게 이런 말도 했다. 1927년 10월초 모택동주석이 공농혁명군을 데리고 정강산지구에 들어온 후, 그녀는 영신으로 돌아가서 군중공작을 했다. 주석이 영신을 '있는 힘을 다하여 경영'하고 있을 때, 그녀는 자주 주석을 따라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나중에, 주석은 이 조사연구를 근거로 지금은 사라진 <영신조사>를 쓴다. 그들은 일을 하면서 점차 감정이 생겨났고, 1928년 6월 용원구대첩(龍源口大捷)이후 결혼한다. 이 내용은 같은 책 223페이지에 나온다.

 

우리는 다시 모택동의 1928년 여름의 상세한 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1928년 6월, 강서군벌 양지생(楊池生), 양여헌(楊如軒)은 장개석의 명령을 받아, 5개단의 병력을 이끌고, 호남군벌 오상(吳尙)의 부대와 함께 정강산혁명근거지에 대하여 공동으로 "회초(會剿)"를 진행한다.

 

6월 20일, 모택동은 주덕(朱德), 진의(陳毅)와 함께 영강고성에서 홍사군 연(連)이상의 간부회의를 개최하여 전투배치를 한다.

 

6월 21일, 모택동은 홍군31단 3영을 이끌고 영신현 서향용전, 노강 일대로 가서, 군중을 발동하여 강서군벌군대를 교란시키고, 호남군벌군대를 견제했다.

 

6월 22일, 모택동은 영신 서향에서 영강신성에 주둔하고 있던 홍사군 군위에게 서신을 보내어, 강서군벌군대가 영신에서 영강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적을 이길 계책을 제출한다.

 

6월 23일, 모택동은 영강신성에서 전투를 지휘한다. 홍사군의 주력은 영신과 영강의 경계에 잇는 신칠계령, 노칠계령, 용원구 일대에서, 적위대와 폭동대의 지원하에, 격렬한 전투를 거쳐, 강서군벌군대의 1개 단을 섬멸하고, 2개단을 궤멸시킨다. 승기를 잡아 세번째로 영신현성을 점령하고, 강서군벌군대의 제4차 '진초(進剿)"를 분쇄했다.

 

6월 26일, 모택동은 영신현성 화천중학에서 홍사군 연이상 간부, 지방당 및 지방무장책임자회의를 소집개최한다. 여기서 용원구전투의 경험을 종합하고, 홍군이 단기간내에 병력을 나누어 군중을 발동하는 문제를 연구한다. 회의 후, 모택동은 홍31단 1영을 이끌고 영신현성 하유구 풍전향 당변촌 일대에서 조사연구를 진행한다. 그리고 먼저 당변에서 일을 하고 있던 하자진과 만난다.

 

6월 30일, 모택동은 영신현성에서 중공상감(호남,강서)변계특위, 홍사군군위 및 연신현위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정강산혁명근거지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킬 여러 업무를 토론 연구했다.

 

7월초, 호남군벌군대 오상의 제8군이 강서군벌군대 호문두(胡文斗)의 제6군, 양지생의 제9사와 함께 호남,강서 변경을 공격했다. 이런 상황에 근거하여, 모택동, 주덕과 진의는 영신현성에서 홍사군군위확대회의를 개최하고, 호남군벌군대를 맞이하고, 호남,강서 양쪽 군벌군대가 회합하는 것을 저지하는 방안을 연구배치했다. 회의후, 모택동은 회의결정에 따라, 홍군제31단을 이끌고 영신에 진입하려는 강서군벌군대를 맞이했고, 주덕, 진의가 이끄는 부대와 긴밀히 협력하여, 군벌군대가 정강산혁명근거지에 대하여 '회초'하는 것을 분쇄했다.

 

이상의 상황을 보면, 모택동과 하자진이 혼례를 거행하여 혁명반려가 된 것은 1928년 6월임에 틀림없다. 그 장소는 강서 영신현 하유구 풍전향 당변촌이다. 구체적으로 어느날 결혼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일자는 분명 1928년 6월 27일 혹은 28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