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80

누가 10년문혁의 역사죄인인가?

글: 왕위범(王偉凡) 나는 비록 문혁때 출생하고, 문혁때 동년을 보냈지만, 문혁에 대하여 윗세대처럼 직접 겪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문혁에 대한 이해는 문혁당사자들이 쓴 회고록에서 어느 정도 얻은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금은 문혁을 얘기하는 사람이 적다. 최근 CCTV에서 인기리에 방송된 을 보고 다시 10년문혁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문혁은 이미 38년이 지났다. 다만 중국의 집권자들은 오랫동안 선택적망각을 했고, 나도 대다수의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찌기 문혁의 주요 죄괴화수(罪魁禍首)는 임표집단과 왕장강요(王張江姚) 사인방의 두 '반혁명집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중 임표와 그의 가족은 전용기추락으로 사망했고, 강생(康生)은 일찌기 병사했다. 그리하여 문혁이 끝난 후에 법정에 서지 않았다..

모택동은 준의회의(遵義會議)에서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확립했는가?

글: 원빈(袁斌)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의 전당 및 전군의 최고지도자지위를 확립했다는 것이 중공의 일관된 설명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학자들은 장정역사연구를 통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현존하는 자료와 학자 허팡(何方)등의 연구에 따르면, 준의회의는 중공이 장정으로 도망하는 도중에 귀주 준의에서 거행한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이다. 주로 박고, 주른애, 이덕이 장정에서 통솔하던 군사노선의 잘못을 반성한 것이다. 그때 중앙홍군의 장정을 통솔한 사람은 소위 "삼인단"(총서기 박고, 정치국상위 주은래 및 코민테른 대표 이덕)이다. 회의에서 박고는 5차에 걸친 포위소탕에 대한 총괄보고를 했고, 주은래는 부보고(副報告)를 했다. 정치국상위 장문천(張聞天)은 '반보고(反報告)'를 하여, 삼인단의 군사노선의 ..

노삼편(老三編) 1: "위인민복무(爲人民服務)", 장사덕(張思德)은 어떻게 죽었는가?

글: 대기원(大紀元) 베이징 중남해의 남문은 신화문(新華門)이라고 불린다. 십리 장안가를 동서로 오가는 차량과 행인들은 모두 총을 들고 문앞을 지키는 위병을 볼 수 있고, 또한 문안의 홍색 영배(影背)와 그 위에 5자의 금칠이 된 "위인민복무(爲人民服務)"를 볼 수 있다. 이 다섯 글자는 모택동이 연안에 칩거하고 있을 때, 사고로 사망한 경위병 장사덕을 위해 쓴 추도문의 제목이다. 1949년 정권을 차지한 후, 이 5글자는 중공의 통치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사용되었고, 중국인민을 70년간 우롱해왔다. 황탄주의(荒誕主義) 대가로 불리는 대륙작가 얜롄커(閻連科)가 쓴 소설이 있는데, 제목이 이다. 내용은 모주석이 같은 제목의 연설에서 한 "우리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한다"는 말을 풍자한 것이다. 어떻게 풍자했는..

모택동의 10명 자녀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글: 수자백년(水煮百年) 첫째, 백가반(百家飯)을 먹으며 자란 모안영(毛岸英) 모안영은 모택동과 양개혜(楊開慧) 사이의 장남이다. 1922년 10월 24일 장사(長沙) 청수당(淸水塘)에서 태어났다. 그 동탕(動蕩)의 세월 속에서 모안영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사방을 떠돌아 다닌다. 모택동은 ..

"중국인이 이렇게 멍청할 수 있는가?"

글: 임중(任重) "중국인이 이렇게 멍청할 수 있는가?" 이는 <모택동이 일본군과 결탁한 진상>이라는 책의 작자이자 일본의 물리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엔도 호마레(遠藤譽) 여사가 외국미디어와의 인터뷰때 한 말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화민족이 원래 아주 총명하고, 계..

마오쩌둥은 왜 장손자 마오신위(毛新宇)를 6년간 만나지 않았을까?

글: 주해빈(周海濱) 1970년 1월 17일, 77세의 마오쩌둥은 말년에 손자를 얻는다. 마오쩌둥은 기쁜 나머지 이름을 "신위(新宇)"라고 짓는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6년간 이 조손은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사진 하나 같이 찍지 못한다. 이치대로라면, 할아버지가 된 마오쩌둥..

모택동의 헤어스타일은 누가 만들었는가?

글: 집야(集也) 모주석의 표준상은 아마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의 독특한 "대배두(大背頭)" 헤어스타일은 전수도(錢水桃)가 설계한 것이다. 전수도는 항주호텔의 유명한 이발사였다. 1958년 10월, 간부가 그를 찾아와서 말한다: "너는 성의 간부와 함께 출장을 가야 겠다. 짐을 싸라." 다음 ..

모주석은 왜 정면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았을까?

글: 문사박람 "홍장촬영사(紅墻撮影師)" 두수현(杜修賢)은 중남해에 들어가서 뉴스촬영에 십여년간 종사하면서, 지도자들을 위하여 많은 멋진 순간들을 담았다. 거기에는 모택동의 진귀한 사진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1960년대, 천안문의 앞에 모택동의 대형화상을 교체해야 하여,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