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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은 왜 하자진(賀子珍)과 복혼하지 않았는가?

by 중은우시 2013. 10. 10.

작자: 미상

 

하자진은 모택동과 헤어진 후, 평생 재혼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의 성격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는 연안을 떠난 그날부터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1949년 그녀의 여동생 하이(賀怡)가 북경으로 가서 모택동과 복혼하여 부인의 지위를 되찾는 것을 논의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모택동이 옛날일을 생각하며 분명히 흔들렸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곧 신중국의 최고지도자에 오를 사람이 어찌 복혼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하이와 하자진은 모두 모씨형제에게 시집갔다.

 

1949년 5월, 하자진의 여동생 하이는 북경 향산으로 간다. 그녀는 강력하게 모택동에게 하자진과 복혼할 것을 요구했다. 하자진에게 '그녀가 마땅히 받아야할' 부인의 지위를 주라고 요구했다. 모택동은 여러 방면의 요소를 고려한 후 동의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하이와의 이 대화를 얘기하면서, "하이는 나에게 하자진과 관계를 회복하라고 했다. 하이는 정말 철이 없다. 내가 어찌 그녀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단 말인가? 한 당의 지도자가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같은 해 여름, 하자진은 천진으로 가서 잠시 머문다. 모택동은 공작인원을 염장림을 보내어 교교와 함께 하자진을 찾아가 보도록 시킨다. 염장림은 북경으로 돌아온 후, 모택동에게 하자진의 근황을 상세히 설명한다. 염장림이 하자진이 옛날 일을 얘기할 때의 장면을 얘기하자,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지나간 과거는 그냥 지나간 것으로 하자."

 

1950년, 모택동은 하자진과 형수가 공동명의로 쓴 편지를 받은 후, 회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교는 내 곁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다. 나는 그녀를 아주 좋아한다. 너는 몸을 잘 보살펴라. 혁명제일, 신체제일, 타인제일, 고전대국(顧全大局)." 3개의 '제일', 1개의 '대국'을 당부한다. 이는 여러 가지 말을 한 마디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모택동의 전처와 노전우에 대한 깊은 감정을 드러낸 것이고 가정단결과 정치영향에 대한 상세한 고려를 엿볼 수 있다.

 

비록 모택동이 하자진과의 복혼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 노전우에 관심을 가졌다.

 

하자진은 모택동과 헤어진 후 여러가지 이유로 재가하지 않았다.

 

1953년 6월, 모택동은 하민학(賀敏學)과 길게 얘기하면서, 하민학에게 하자진의 재혼을 권하라고 한 적이 있다. 하민학은 이렇게 대답한다: "자진 동생은 말한 바 있습니다. 그녀는 일생동안 한 사람만을 사랑했고 재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당신도 그녀의 성격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녀가 결정한 일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모택동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기실, 그는 당시의 실제상황에 따라 하자진을 위하여 고려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강청과 가족을 이루었고, 이미 딸까지 있었다. 하자진이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이민이 모택동의 곁으로 돌아온 후, 모택동과 하자진간의 연락을 맡았다. 다만 모택동이 하자진에게 직접 서신을 쓰는 일은 드물었다. 기본적으로 이민을 통하여 그의 안부인사를 전했다.

 

모택동은 하자진이 외지에서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것과 그녀의 몸이 좋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이민에게 방학때가 되면 엄마를 보러가도록 해주었다. 매번 엄마를 만날 때마다, 이민은 부친의 명을 받들어, 보따리를 가득 싸서 엄마에게 가져가 주었다. 동시에 부친의 모친에 대한 문안인사도 전했다. 방학이 끝나면, 이민은 다시 엄마의 명을 받아, 보따리를 가득 싸서 북경으로 돌아왔다. 거기에는 모택동이 잘 먹는 음식과 야채도 있었다. 그리고 강청, 이눌과 모안청 부부에게 주는 물건도 있었다. 한번은 하자진이 이민으로 하여금 모택동에게 정교하게 만든 뿔을 깎은 귀이개를 보낸 바 있다. 그녀는 모택동이 기름귀여서, 수시로 귀의 귀지를 깨끗이 정리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택동은 감격한다. 그는 이민에게서 예전 하자진의 그림자를 보았다.

 

1954년, 하자진은 라디오에서 모택동이 전국인대 제1기 1차대회에서의 개막사 녹음을 듣는다. 그리고는 정신이 자극을 받아 병세가 악화된다. 모택동은 그 말을 들은 후, 하자진이 자신을 생각하다가 병이 났다고 여기고, 이민과 함께 눈물을 흘린다. 그는 급히 이민을 상해로 보내어 하자진을 보살피게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하자진에게 보내는 서신 한 통을 보낸다. 하자진에게 의사의 말을 잘 듣고, 병을 잘 치료하고, 식사를 잘하며,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지 말라는 것이다. 하자진은 모택동의 서신을 받은 후,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식사를 하고 약을 먹기 시작하여, 점차 정상을 회복한다. 그리고 담배도 끊는다.

 

모택동은 도주의 부인 증지에게 하자진을 얘기하면서, 감상에 젖어 말한 바 있다: "나는 하자진과 감정이 남아 있다. 어쨌든 십년간 부부였다." "다만 나는 아직도 그녀를 그리워한다. 그녀는 장정때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 나와 함께 10년간 10명의 아이를 낳았다. 해가 시작할 때 한 명씩 낳고 연말에 또 낳기도 했다."

 

1969년 8월, 모택동은 여산에서 20년간 헤어져 있던 하자진과 만난다. 자신이 밤낮으로 생각하던 사람을 만나게 되자, 달고 쓰고 시고 매운 맛이 모두 함께 끓어올라 하자진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그저 계속하여 울 뿐이었다. 모택동은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고, 온화하게 말한다: "우리가 만났는데, 네가 말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는구나. 나중에 보지 못하면 또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하자진은 더욱 눈물을 흘렸다. 하자진의 감정이 약간 안정된 후, 모택동은 그녀의 생활상황을 묻는다. 그리고 그녀의 소련에서의 생황을 상세히 알아본다. 하자진은 하나하나 대답한다. 모택동은 처연하게 말한다: "너는 당초에 왜 그렇게 억지로 떠나려 했느냐?" 모택동은 밤이 깊어진 것을 알고는 사람을 시켜 그녀를 하산시킨다. 강청이 곧 여산으로 오므로, 모택동은 강청의 오해를 피하고 싶었고, 가정의 화목을 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는 하자진을 만나지 않는다. 이것이 모택동과 하자진이 해방후 유일하게 만난 것이고, 이후 두 사람은 영원히 헤어진다.

 

여산에서 만난 후, 하자진은 병으로 쓰러져서 며칠을 고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 모택동은 아주 조급해진다. 막 결혼한 이민을 남창으로 보내어 그녀를 돌보게 하고, 딸에게 "그녀에게 반드시 진찰을 받고, 약을 먹고,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라고 말해라"고 시킨다. 그는 하자진이 물을 마시려 하지 않는 것을 알고는 과일을 두 광주리 준비해준다. 딸로 하여금 하자진에게 주어서 해갈하게 하도록 한다. 그는 이민이 일처리를 잘 하지 못할까 우려하여, 관리원을 한 명 보내어 그녀와 같이 가게 한다. 이민이 곁에 있으면서 정성껏 돌보아주자, 하자진은 천천히 정상으로 회복된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한다. 3년후, 하자진은 마침내 신중국성립후 처음으로 북경에 들어온다. 그녀는 모택동의 화상을 올려다보고, 모주석기념당에서 모택동의 좌상앞에서, 1.5미터 높이의 북숭아형의 견화로 만든 화환을 바친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쓰인 비단띠가 붙어 있었다:

 

"영원히 당신의 유지를 계승하겠다.

전우 하자진이 딸 이민, 사위 공령화를 데리고 바침"

 

사전에 화환의 형상, 띠의 글에 대하여 하자진은 모두 하나하나 물어서 결정했다.

모택동의 현재가정의 화목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자진은 소련에서 돌아온 후, 혼자서 상해, 강서등지에서 생활한다. 모택동이 사망한 후에야 북경으로 돌아왔다. 모택동과 헤여질 때의 일에 대하여 얘기할 때면 하자진은 한마디도 모택동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잘못한 것이다. 나는 당시에 철이 없었따. 내가 너무 내 마음대로 했다." 그녀는 모택동이 요구한 "타인제일, 고전대국"을 실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