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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양개혜(楊開慧)는 모택동과의 사이에 아들을 몇 명 낳았는가?

by 중은우시 2014. 3. 2.

글: 복녕객(福寧客) 

 

 

 

1990년, 중국인민대학 도서고적연구소의 관원 쏭핑성(宋平生)등은 <중국인민대학도서관장가보목록>을 편찬하는데, 의외로 하나의 진귀한 족보자료를 발견한다 -- <소산모씨족보(韶山毛氏族譜)>.

 

이 족보는 1941년 모씨서하당(毛氏西河堂) 활자인본(活字印本)이다. 모택동의 족형(族兄)이자 사숙 선생인 모택계(毛澤啓), 자는 우거(宇居)가 선통3년(1911년) 삼수본(三修本)에 근거하여, 민국30년(1941년) 편찬한 사수본(四修本)이다.

 

이 족보는 모씨가 원말명초에 시조 모태화(毛太華)로부터 민국까지 22대인을 기록한 것이다. 그중 모택동 본인 및 그의 조부, 부모, 형제, 처 및 자녀상황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것을 근거로 모택동 일가에 대하여 잘못 전해진 것이나 빠진 부분을 보충할 수 있어서, 아주 중요한 참고가치가 있다.

 

이 족보의 기록에 근거하여, 쏭핑성이 <새로 발견한 <소산모씨족보>의 서략 및 모택동 가족사의 고정>이라는 글을 발표하자, 국내외의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나타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모택동과 양걔혜의 후손에 대하여 통상적인 견해에 따르면 3명의 아들 즉 모안영(毛岸英), 모안청(毛岸靑), 모안룡(毛岸龍)이 있다는 것이다. 모안영은 1922년 10월 24일에 태어났다(1992년 6월에 광서인민출판사와 이강출판사가 공동으로 출판한 <모택동대사전> 제1288페이지에는 모안영이 1922년 10월 22일에 출생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모안청은 1923년에 태어나고,모안룡은 1927년 4월 4일에 태어났다(<양개혜>를 참조)

 

다만, <족보>에서는 모택동과 양개혜 사이의 4번째 아들을 기록하고 있고, 처음으로 아들들의 본명까지 나타난다. 장남 모원인(毛遠仁), 자(字) 안영(岸英); 차남 모원의(毛遠義), 자 안청(岸靑); 삼남 모원지(毛遠智), 자 안립(岸立); 사남 모원회(毛遠懷), 자 식곡(式谷). 그리고 모원회의 이름 아래에는 이렇게 주석을 달아놓았다: "민국십이년 계해이월초이진시생(癸亥二月初二辰時生)"(즉 1923년 3월 18일). 기괴한 것은 그중 모안룡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원회의 생년은 차남 모안청과 같다. 만일 쌍둥이라면 왜 모원회를 넷째로 적었을까? <족보>에는 그가 모택명(毛澤銘)에게 양자로 보내졌다고 기록한다. 현재 기타의 방증은 없다. 결론적으로, <족보>에서 모택동과 양개혜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아직도 추가확인이 필요한 상황이다. (쏭핑성. <새로 발견한 <소산모씨족보>의 서략 및 모택동 가족사의 고정>, <모택옹사상연구>1990년 제2기 제56-57페이지에서 재인용함)

 

"모택민(毛澤民), 자 윤련(潤蓮)" 이것은 <중공당사인물전> 제9권에 기록된 것이고,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다. 현재 우리는 <족보>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의 원명은 모택명(毛澤銘), 자는 영련(咏蓮)이라는 것을. 그는 원부인 왕씨와의 사이에 모두 3남3녀를 낳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딸 하나만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고, 왕씨성의 남자에게 시집간다. 나중에 모택민 부부는 모택동과 양개혜 사이에 낳은 네번째 아들 모원회를 키우고, 이를 통하여 슬하에 아들이 없는 유감을 달랜다(<모택옹사상연구> 1990년 제2기 56페이지 참조).

 

모택동과 양개혜는 정말 네번째 아들을 낳았을까? 고증과 여러 방면으로 확인해본 바에 의하면, 모택동은 양개혜와의 사이에 모두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즉, 장남 모원인, 자 안영; 차남 모원의 자 안청; 삼남 오뭔지 자 안룡이다. 뫡동과 양개혜의 사이에 넷째 아들이 있다는 주장은 분명 착오일 것이다.

 

그렇다면, 상술한 <소산모씨족보>에는 왜 모택동과 양개혜가 4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했을까? 확실히 모원회를 모택동과 양걔혜가 낳은 네번째 아들로 오인한 것이다.

 

모원회는 모택동과 양개혜의 아들이 아니다. 그는 누구의 아들인가? 얘기하자면 길다.

 

모택동의 친우(親友)중에 확실히 모원회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 필자는 1967년 12월에 그를 만났고, 그는 자신의 집안내력과 생활경력을 얘기해준 바 있다. 그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1949년 8월, 호남이 평화적으로 해방된 후, 그는 일찌기 상담현위 조직부 부장, 현위 부서기, 서기를 맡았다. 1955년 4월, 호남성 임업청 부청장이 된다. 1957년에는 호남성 교육청 부청장을 지낸다. 1959년 호남성 당안국 부국장이 되었고, 1961년에는 호남성 정책연구실 부주임 겸 호남성 농림수판공실 부주임이 된다.

 

그러나, 그의 원래 이름은 왕화초(王華初)이고 호남 유양(瀏陽) 사람이다. 그의 모친 나성영(羅醒英)이 희생된 후에 성을 모씨로 바꾸고, 모화초(毛華初)라고 한다. 일명 모원회(毛遠懷)이다.

 

그의 상황이 이러한데, 왜 <소산모씨족보>에는 그를 "택명(모택민, 일명 모택명)의 아들 원회, 자 식곡, 민국십이년 계해이월초이진시생"(즉 1923년 3월 18일생)이라고 적었을까? 1976년 9월, 모택동이 서거한 후, 그는 어떻게 모택동의 가족으로 북경에서 추도회에 참가하여 모택동의 유체고별의식을 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의 근원은 19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해에 장개석은 상해에서 "412" 반혁명정변을 일으킨 후, 다시 호남국민당 군관 허극상(許克祥_등이 '마일사변(馬日事變)"을 일으켜 공산당인을 대거 체포하여 죽인다. 백색공포하에서, 모택민의 원부인 왕숙란(王淑蘭)은 소산에서 더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6살된 딸 모원지(毛遠志)를 데리고 장사(長沙)로 간다. 거기서 당조직을 찾아가려 했지만, 적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녀가 있던 감옥에 나성영이라는 공산당원이 있었는데, 8살된 아들 왕화초를 데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찌감치 이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같은 혁명의 신념과 환난으로 그녀들은 금방 뜻이 맞는 자매가 된다.

 

하루는 나성영이 왕숙란에게 말한다. "국민당 반동파는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언제든지 죽을 위험에 처해 있다. 내가 먼저 피살당하던 네가 먼저 피살당하든, 누구든지 살아남으면 아이를 기르는 책임을 맡아주기로 하자. 나와 너는 이 두 아이의 공동 엄마이다." 말을 마치고, 왕화초의 손을 끌어 왕숙란의 앞으로 데려와서 바닥에 절을 하게 하며 말한다: "화초, 빨리 절을 해라. 그리고 엄마라고 불러라." 왕화초는 모친이 시키는대로 왕숙란을 엄마라고 부른다.

 

1930년 7월 25일 오후, 팽덕회는 장사를 공격한다. 나성영과 왕숙란은 그 틈을 타서 감옥을 빠져나와 도망친다. 그녀들은 호남 유양으로 가는데, 나성영은 불행히도 다시 체포된다. 얼마후 장열하게 희생당한다. 이때부터 왕화초는 왕숙란이 길렀다. 그리고 이름을 모화초로 바꾸게 된 것이다.

 

1942년, 소산 모씨가족이 족보를 만들 때, 비록 왕숙란이 소산에 없었지만, 모화초는 이미 연안에 가 있었고, 여전히 모화초를 모택민과 왕숙란의 이름아래 넣었다.그의 배항(排行)은 23번째이고, 이름은 원회, 자는 식곡이라고 기록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어떻게 보더라도, 모원회를 모택동과 양개혜 사이의 네번째 아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모택민과 왕숙란의 양자이다.

 

쏭핑성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괴한 것은 그중에 모안룡이 없다는 점이다." 기실 그렇지는 않다. <소산모씨족보>에 기록된 '모원지'가 모안룡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모안룡의 다른 이름은 모원지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원지의 자가 안룡이라고. <소산모씨족보>에는 '모원지, 자 안립'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오자이다.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