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자지(李子遲)
며칠 전에 북경에서 하북성 한단(邯鄲)시 문예이론가협회 주석 왕승준(王承俊)과 만나서, 일찌기 전국시대 조나라의 도성이었던 하단의 유구한 역사를 얘기했다. 한단은 중국역사문화명성이며, 중국성어전고의 고장이고, 중국산문의 도시이고, 중국태극의 고향이며, 특히 "성어의 도시"이다. 역대 한단의 지방특색과 한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성어전고는 3000여개에 달한다. 예를 들어, 호복기사(胡服騎射), 한단학보(邯鄲學步), 완벽귀조(完璧歸趙), 부형청죄(負荊請罪), 황량미몽(黃梁美夢), 모수자천(毛燧自薦), 일언구정(一言九鼎), 탈영이출(脫潁而出), 순망치한(脣亡齒寒), 지상담병(紙上談病), 위위구조(圍魏救趙), 절부구조(竊符救趙), 가치연성(價値連城), 문경지교(刎頸之交), 매개이도(梅開二度), 퇴피삼사(退避三舍), 기화가거(奇貨可居), 남원북철(南轅北轍), 노불습유(路不拾遺), 삼촌지설(三寸之舌), 경궁지조(驚弓之鳥), 광일지구(曠日之久), 불유여력(不遺餘力), 사본축말(舍本逐末), 영위옥쇄불위와전(寧爲玉碎不爲瓦全), 전사불망후사지사(前事不忘後事之師) 등이 있다. 그들은 언간의해(言簡意賅), 정벽신묘(精辟神妙)하고 철리(哲理)가 풍부하며, 정취(情趣)가 넘치며, 의미심장하다. 중국언어예술의 정수이다.
왕승준 선생의 말에 따르면, 한단시 산하의 계택현(鷄澤縣)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인 "모수자천"의 그 모수의 고향이다. 2008년, 여러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계택현 모관영촌은 바로 모수의 고향이라고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모씨씨족의 조적지이기도 하다. 그후 시대를 거치면서, 모씨의 일부 후손은 계속하여 하남, 절강, 강서, 광서, 사천, 운남등지로 이주했고, 나중에 호남 상담, 소산에까지 이른다. 그리하여 일대이 위인 모택동이 탄생하게 된다. 즉, 모수는 모택동의 선조라는 것이다.
모수는 정말 모택동의 선조인가?
모씨는 중국성씨중 하나이다. <백가성>의 랭킹은 106위이다. 2007년 인구조사때 중국대륙의 랭킹은 87위이고, 2009년에는 랭킹이 85위였다. 대만에서는 모씨가 100대성씨에 들지 못한다. 오늘날 세계의 모씨인구는 300여만에 이른다. 중국의 여러 성씨중, 모씨는 아주 오래된 성씨이다. 중국의 각종 성씨학 전적에서, 모두 모씨성의 기원에 대한 동일힌 기록을 볼 수 있다. 모씨는 주문왕의 아들이자 주무왕의 동생인 희정(姬鄭)이 모지(毛地)에 봉해지면서 시작한다. 주로 장강이북의 황하유역등지이다.(지금의 하북성 계택현 모관영촌일대; 그리고 하나의 견해는 하북 거록, 섬서 부풍, 혹은 하남 의양이다)
최초의 모씨성의 유명인사는 모두가 알고 있는 전국시대의 모사 모수(기원전285년-기원전228년). 모수는 조나라 사람이다. 관적은 하북 계택이며, 전국4공자중의 하나인 평원군 문하의 식객이다. 조효성왕9년(기원전257년), 진나라는 한단을 포위하고, 평원군은 초나라에 구원을 청한다. 이때 모수가 스스로 자천하여 따라간다. 평원군은 초왕과 담판하는데 요령을 몰랐다. 중요한 순간에, 모수는 검을 차고 올라가서, 직접 이해관계를 설명한다. 그렇게 하여 초왕이 조와 초의 합종에 동의하게 된다. 평원군 조승은 이로 인하여 감탄하여 말한다: "승(평원군)의 상사(相士)는 많으면 천명, 적으면 백명이어서 천하지사(天下之士)는 빠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모선생을 보니 빠졌다는 것을 알겠다. 모선생이 초나라에 오니, 조나라는 구정대려(九鼎大呂)보다 무거워졌고, 모선생의 삼촌지설은 백만지군보다 강하다." 모수는 이때부터 탈영이출하여 평원군의 상빈이 되고 나중에 설(薛)에서 죽고, 한단시 광부 고성 교외지구에 묻힌다. 현재의 모공사(毛公祠)가 있는 곳이다.
대대로 북방에 살던 모씨가 강남각지로 이주한 것은, 나중에 학자들이 고증한 바에 따르면, 약 한, 당시대라고 한다. 한 갈래의 모씨성의 사람들이 중원에서 지금의 절강 구주(衢州)로 이주한다. 남으로 복건에 접해 있다. 다시 강서 길주 용성(지금의 강서 길주)로 이주한다. 그 후에 이곳에서 번성한다. 그 중의 일부 사람들을 모태화(毛太華)가 이끌고 운남 난창위(지금의 난창현)으로 이주한다. 명나라가 건국된 후 모태화는 다시 장남 모청일(毛淸一), 사남 모청사(毛淸四)를 데리고 북상하여 관리가 된다. 호남 상향 북문 밖 비자교(緋子撟)(지금의 상향 기차역 부근). 10여년 후, 모청일, 모청사는 다시 상담 삼십구도(지금의 소산(韶山))으로 이주하고 최종적으로 이 곳에 정착한다. 여기에서, 상술한 2 갈래의 모씨는 지금의 호남 소산 일대에서 번성한다. 열심히 일하고 묵묵히 경작한다. 모태화의 아래로 20대가 내려가서 비로소 중국역사를 새로 쓴 걸출한 인물 모택동이 나타난다. 호남 소산의 모씨의 항열 돌림자는 "입현영조사(立顯榮朝士), 문방운제상(文方運濟祥), 조은이택원(祖恩貽澤遠), 세대영승창(世代永承昌), 효우전가본(孝友傳家本), 충량진국광(忠良振國光), 기원돈성학(起元敦聖學), 풍아열명장(風雅列名章)". 모택동의 "택(澤)"은 그중 14번째 항열이다.
필자는 자료를 찾아보았다. 2008년 11월, 중국모씨연구회의 최종검증을 거쳐, 모수는 일대위인 모택동의 22세조라고 인정했다. 중국모씨연구회 회장 모병한(毛炳漢)은 한시를 지었다: "계택모수일천명(鷄澤毛燧一薦名), 모정모장전시경(毛亭毛萇傳詩經), 후인수천도소산(後人數遷到韶山), 잉육위인모택동(孕育偉人毛澤東)" 다만 이런 주장도 있다. 동진의 명장 모보(毛寶)는 흉노를 막다가 희생되었는데, 그가 모택동의 27세조라는 것이다. 이건 좀 이상하다. 모수는 모보보다 600여년이나 앞선 인물이다. 어찌 모수는 22세조이고, 모보는 27세조가 되는가? 설마 모수의 52세조를 22세조라고 잘못 적은 것은 아닐까?
다만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엄격하게 말해서, 모택동의 조상은 모수와 동족의 형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명하지 않아서, 모수를 모택동의 선조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더라도 크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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