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1374

이윤(伊尹)의 수수께끼: 상왕태갑(商王太甲)을 쫓아낸 후 스스로 다시 권력을 돌려주었을까?

글: 자귤(紫橘)​고대 권신(權臣)의 찬위탈권(纂位奪權)을 얘기하면 모두 상(商)나라때의 이윤(伊尹), 한(漢)나라때의 곽광(霍光)을 떠올린다. 자신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군왕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윤, 곽광은 군왕의 권력을 침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만, 곽광의 사적은 비교적 구체적이나, 이윤의 사적은 비교적 모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윤이 현신(賢臣)이라 여기고, 탕(湯)을 보좌하여 천하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윤은 권신이다. 직접 상왕태갑을 쫓아냈다. 이런 권신의 최후가 좋을 수 있을까?​1 이씨부락(伊氏部落)​오늘 얘기할 상나라때의 저명한 대신 이윤은 사마천이 에서 "이윤의 이름은 아형(阿衡)이다"라고 하였다. 에서는 "이름이 지(摯)이다"라고 하였다. 한나라때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군왕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신하가 임신한 소첩을 바치다.

글: 역사대미감(歷史大微鑒)​옛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었다: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를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不孝有三, 無後爲大)" 이를 보면, 옛사람들은 가족혈맥의 전승을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백성도 마찬가지이니, 왕실은 더욱 신경썼다. 황제가 만일 생육능력이 없다면, 이는 단순히 효 불효의 문제가 아니라, 황위를 노리는 자들이 기회를 노릴 수 있어, 통치지위에 위기가 미치고, 국가가 동란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전종접대(傳宗接代)'는 황제의 가장 중요한 직책중 하나가 된다.​역사상 후사를 두지 못한 군주는 많다. 한소제 유불릉, 한애제 유흔, 명무종 주후조, 광서제 재첨, 선통제 부의가 모두 일국지군으로 후사를 두지 못한 경우이다. 그리고 춘추전국시기에 한 초나라..

육군양가자(六郡良家子):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은 기반

글: 자귤(紫橘)​양한(兩韓, 서한 및 동한)은 무덕(武德)이 충만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한나라때 북방에서 전투를 벌이던 병사들과 장수는 대부분 )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풍이 사납고, 집안자산도 충분하고, 장비도 우수하였다. 그들은 우림군(羽林軍)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관직과 작위를 얻으려년 적극성이 아주 높았다. 이것이 바로 한나라군대가 강대했던 주요한 원인이다. 양한은 이로 인해서 흥했고, 동한은 바로 육군의 후인이다. 그러나, 동한말기 군벌할거가 일어나면서 우림군 건제는 사라지고, 육군양가자라는 집단도 역사에서 인멸되어버린다.​육군(六郡)과 양가자(良家子)​소위 양한의 육군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반고(班固)의 이다. 그러나 그는 육군이 구체적으로 어..

모백온(毛伯溫): 명나라는 안남(安南)을 정복했는가?

글: 자귤(紫橘)​가정제(嘉靖帝)는 각박과은(刻薄寡恩)한 것으로 유명했고, 시기심이 많은 군주였다. 그가 진심으로 대한 사람을 실로 많지 않다. 역사상 대명이 자자한 엄숭(嚴嵩), 서계(徐階)도 가정제로 하여금 안심하게 만들지 못했다. 가정제의 유모의 아들인 금의위지휘사(錦衣衛指揮使) 육병(陸炳)은 비록 그의 신임을 받았지만, 가정제가 직접 그의 전포(戰袍)를 벗겨주는 영광은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모백온이라는 명나라의 개국공신 유백온(劉伯溫)과 성만 다른 인물은 가정제가 그를 위해 지어준 시에서 "태평대조귀래일(太平待詔歸來日), 짐여선생해전포(朕與先生解戰袍)"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그럼 도대체 이 모백온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을까?​명나라와 안남(安南)​홍무제때, 안남국왕(安南國王) 진일규(陳日喹)는..

착융(笮融): 삼국시대 가장 음험한 소인(小人)

글: 삼립신문(三立新聞)​삼국시대에는 성격이 선명한 풍운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들은 용맹함으로 혹은 지혜로 난세를 헤쳐나갔으며, 불후의 공명을 남겼다. 그러나 한 사람이 유명해진 것은 아주 의외이다. 그는 삼국시대 가장 음험한 소인 착융(笮融)이다. 은혜를 배신하고 의리를 저버리는데 전문이며 은인을 죽이는데 전문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불교사원에서는 그를 기리고 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착융이라는 이름을 듣고, 아마도 많은 사람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 에는 나관중이 그에 관하여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웅할거하던 삼국의 난세에, 착융의 악명은 제후들간에 아주 유명했다.​착융은 처음에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의 부하였다. 그는 도겸에 의해 하비(下邳)의 국..

송빈빈(宋彬彬) 배후의 인물들....

글: 원릉(袁凌)​송빈빈, 그녀는 문화대혁명기간동안 송요무(宋要武)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의 원로 송임궁(宋任窮)의 딸이다. 문혁기간 저명한 홍위병으로 북경의 "홍팔월(紅八月)"기간동안 모택동에게 홍수장(紅袖章)을 채워주는 사진때문에 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문혁기간 북경사범대학부속여자중학교의 홍위병 지도자였으며, 2024년 9월 16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송빈빈 배후의 사람을 알아야, 비로소 문혁배경하의 송빈빈의 죄와 벌을 알 수 있다.​1966년 8월 18일, 송빈빈은 천안문 성루에 올라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의 팔에 수장을 채워주었고, 모택동이 "빈빈은 문질빈빈(文質彬彬)의 그 빈이냐"고 묻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무가 필요하다(要武嘛)"고 말하자 그녀는 그후 이름을 "송요무..

함풍제(咸豊帝)의 단명을 초래한 4가지 습관...

글: 역사대학당(歷史大學堂)​청나라말기 함풍제의 짧은 일생은 거의 비극으로 끝날 운명이었다. 대청제국의 말기황제로서 외적의 침입과 내란이 빈번한 곤경에 직면해야했을 뿐아니라, 자신의 생활방식은 그의 일생을 비극으로 이끌었다. 함풍제의 재위시 그의 여러가지 행위와 그의 기호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함풍제의 운명은 일찌감치 정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네티즌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함풍제의 4가지 애호(愛好)가 실로 그를 요절하게 만들었다. ​함풍제의 단명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생활방식이 그렇게 만들었다. 즉위초기, 함풍제의 나이는 겨우 20살이었다. 한창 나이여서 원래 대청왕조를 진흥시키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실망시킨다..

유춘림(劉春霖): 중국과거역사상 마지막 장원(狀元)

글: 세설신어(細說新語)​중국의 유구한 역사에서 과거제도는 독서인의 유일한 출로와 추구하는 목표였다. 천년이래 무수한 한문자제(寒門子弟)는 공명을 얻고 운명을 바꿀 희망을 품고, 밤낮으로 등불아래에서 열심히 공부했다.​그러나 과거제도는 청나라말기에 점차 폐지된다. 그렇다면 고대 장원의 수준은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중국의 마지막 장원의 답안지를 보면 그의 글씨체에 현대인들이 보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그렇다면 중국의 마지막 장원은 누구일가? 그의 일생은 어떠했을까?과거지로(科擧之路)와 서법천부(書法天賦)​​중국의 마지막 장원은 유춘림(劉春霖)이다. 1872년, 그는 직예(直隸) 숙녕(肅寧)의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비록 집안은 가난했지만, 유씨집안에서는 교육을 아주 중시했다...

이백(李白)은 왜 과거시험을 치지 않았을까?

글: 야사미필가(野史未必假)​1​시선(詩仙) 이백(李白)은 평생 과거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았다.​당현종(唐玄宗) 개원(開元)초년, 한 18살짜리 소년이 사천(四川) 재주(梓州) 장평산(長平山) 안창암(安昌巖)으로 가서 조유(趙蕤)라는 은사(隱士)를 방문한다.​조유는 촉중(蜀中)에서 유명한 잡가(雜家)이고, 이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이는 종횡가(縱橫家)의 모략을 집대성한 책이다. 내용은 내정, 외교, 군사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고, 아주 실용적이었다.​이 소년은 어려서부터 제세안민(濟世安民)의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기서를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직접 찾아가서, 조유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한 것이다. 조유는 젊은이가 솔직하고 시원스러운 것을 좋아했다. 두 사람의 나이는 20여세였지만, 같은 나이대..

명나라의 영왕(寧王), 원나라의 아릭부케: 후손의 백년후 복수...

글: 자귤(紫橘)​명나라때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는 영왕(寧王) 주권(朱權)에게 나중에 천하를 나누어갖자고 유혹하여 반란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주체는 반란에 성공한 후, 영왕계를 탄압한다. 그리하여 영왕계통은 모두 복수를 꿈꾸었다. 다만 진정 반란을 일으킨 것은 명무종(明武宗)때의 주신호(朱宸濠)인데, 그는 왕양명(王陽明)에 의해 손쉽게 진압당했다. 그런 일이 이때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원나라때도 실의한 왕족 아릭부케(阿里不哥)가 있었다. 당시 아릭부케는 쿠빌라이(忽必烈)와 황위를 다투었고, 실패한 후 그 가족은 탄압을 받고 서북으로 흘러들어간다. 나중에 원나라가 망하고 북으로 도망쳤을 때, 아릭부케의 자손은 마침내 기회를 잡았고, 포어아해(捕魚兒海)의 전투이후 아릭부캐의 자손인 이수데르(也速迭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