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고대 권신(權臣)의 찬위탈권(纂位奪權)을 얘기하면 모두 상(商)나라때의 이윤(伊尹), 한(漢)나라때의 곽광(霍光)을 떠올린다. 자신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군왕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윤, 곽광은 군왕의 권력을 침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만, 곽광의 사적은 비교적 구체적이나, 이윤의 사적은 비교적 모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윤이 현신(賢臣)이라 여기고, 탕(湯)을 보좌하여 천하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윤은 권신이다. 직접 상왕태갑을 쫓아냈다. 이런 권신의 최후가 좋을 수 있을까?
1 이씨부락(伊氏部落)
오늘 얘기할 상나라때의 저명한 대신 이윤은 사마천이 <사기>에서 "이윤의 이름은 아형(阿衡)이다"라고 하였다. <손자병법>에서는 "이름이 지(摯)이다"라고 하였다. 한나라때의 대유학자 공안국(孔安國)은 이윤의 이름은 확실히 지(摯)이며, 아형(阿衡)은 그의 관직명칭이라고 하였다.
이윤의 출생지는 이윤연구의 첫번째 난제이다. 하, 상시기 사람들은 여전히 부락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 이윤은 소호씨(少皞氏)의 적계후손이라고 본다. 그의 성(姓)은 이미 고증할 수가 없다. <수경주(水經注)> 이수조(伊水條)에 이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윤이 이수에 거주했기 때문에 '이(伊)'를 씨로 삼았다고 본다. 삼국시대 초주(譙周)는 <고사고(古史考)>에서 이윤이 공상(空桑)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따. 공상은 진류(陳留, 지금의 하남성 개봉)에 있다. 다만 학계는 <상해박물관장전국초죽서.용성씨>에 근거하여 최신논증을 내놓았고, 하윤은 산동 사수(泗水)에 거주했다고 본다. 즉 조현(曹縣)일대이다. "사(泗)"는 "이(伊)"의 통가자(通假字)이다.
당시 하왕조의 동쪽에는 많은 부락이 있다. 이씨도 그중의 하나이다. 다만 그 실력이 그다지 강대하지는 않았다. 이들 부락이 바로 소위 "이(夷)"이다. 제이(諸夷)중에서 방이(方夷)와 백이(白夷)가 가장 강대했고, 그들은 하왕조의 작위를 받아, 하왕조의 대리인으로 여러 부락을 통치했다. 이씨는 통치를 받는 한 갈래이다.
2. 이윤의 신분
하걸(夏桀)시기, 걸은 동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동방에 세금을 추가로 부과한다. 또한 동방부락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죽서기년>에는 걸이 민산(岷山)을 공격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한비자>는 "걸이 민산의 여자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걸이 민산을 공격하자, 민산의 제후는 두 명의 미녀를 걸에게 바쳤고, 그러자 걸은 물러간다. 중앙의 하왕이 직접 지방에 손을 쓰니, 동이의 여러 부락들은 하정권에 대해 점점 이반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 상부락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일부 동이부락의 지지를 받는다. 그들은 상과 결맹하여 하의 통제를 벗어나고자 했고, 그 대표적인 부락이 바로 이씨부락이었다.
이윤의 신분에 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자주보는 것은 "잉인포주설(媵人庖廚說)"이다. 이건 <여씨춘추>에 나온다. <여씨춘추>에 따르면 탕(湯)이 유신씨(有侁氏)와 결혼하는데, 이윤은 '잉인'으로 따라갔다는 것이다. 소위 '잉인'은 <송동양마생서>에서 복역(僕役)으로 해석한다. 다만 선진시대에 이는 노예이다. 노예는 여러 직업으로 나뉜다. <여씨춘추>에서는 이윤이 요리를 책임진 노예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연구에 따르면, 신분등급이 분명했던 시대에 노예가 학식을 가지기는 어렵다. 더더구나 신분을 뛰어넘을 수도 없다. 그래서 이윤이 주방을 책임진 노예일 수는 없다고 본다. 그의 진실한 신분은 마땅히 "무(巫)"였을 것이다. 하,상시기 '무'의 범위는 아주 넓다. 굿을 하는 무당을 제외하고, 문직(文職)도 있다. 그래서 이윤은 나라를 다스리는 재능을 가진 것이다. 갑골문에서 윤(尹)이라는 글자는 사람이 지팡이를 집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는 부락족장, 무사의 권위를 생생하게 표시한다. 그후 "윤(尹)"에서 "군(君)"자가 파생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다수는 이윤이 이씨부락의 족장으로 무사(巫師)의 사명을 맡았으며, 하늘 및 땅과 소통하며, 동시에 서적과 문자를 장악하고, 음악과 춤에도 능했으며, 제사용의 정조(鼎爼)를 조작하는 것을 책임졌다.
3. 탕과 이윤의 반란
상부락이 돌연 동방에 출현하면서 둥방부락은 하와 상 사이에 놓이게 된다. <맹자정의>에는 이윤이 "오취탕(五就湯), 오취걸(五就桀)"(다섯번 탕에게 가고, 다섯번 걸에게 갔다)라고 하였으니, 하와 상 사이를 계속 오갔다. 다만, 어떤 사람은 이윤이 족장신분외에 또 하나의 신분이 있었다고 본다: 간첩. <손사.용간>에는 이렇게 적었다: "예전에 은(殷)이 흥할 때, 이지(伊摯)는 하(夏)에 있었다." 그가 하와 상 사이를 오가면서 탕에게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씨춘추>에 이런 말이 있다. 탕(湯)은 마음 속으로 큰 뜻을 품고 있었고, 천하를 탈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라가 너무 강대한 것을 우려하여, 이윤을 보내어 정보를 얻는다. 하왕이 믿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탕과 이윤은 고육책을 써서, 탕이 거짓으로 활로 이윤을 쏘고, 이윤은 하로 망명한다. 3년간 정보를 수집한 후 상부락으로 되돌아오면서, 하의 최신정보를 가져온다. 이윤은 하걸이 말희(妺喜)에 빠져서 간신을 총애하여, "중지불감(衆志不堪), 상하상질(上下相疾), 민심적원(民心積怨)"하여 민심이 정권이 바뀌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탕은 기뻐하며 말했다. "약고아광하진여시(若告我曠夏盡如詩)" 그 뜻은 네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니 시에서 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탕과 이윤의 부락은 결맹을 맺는다.
<설원(說苑)>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탕이 먼저 군대를 이끌고 하를 공격했다. 하걸이 분노하여, 구이지사(九夷之師)를 일으켜 상부락을 공격한다. 이때 탕의 부하로 있던 이윤은 탕에게 저항하지 말고, 먼저 죄를 인정하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하걸이 구이의 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아직 그의 세력이 강성하다는 것이고, 우리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탕은 사죄하고 복속을 청하며 다시 공물을 바쳤다." 다만 다음해부터 다시 탕은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 걸은 다시 구이의 군대를 나서도록 명하지만, 구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자 이윤이 말한다: 때가 되었습니다. 역사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탕이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이렇게 하여 하왕조를 무너뜨리고 상왕조를 세운다. 이윤은 최대공신인 것이다.
4. 권신 이윤의 최후
하상혁명이후, 오늘날의 연구에 따르면, 이윤과 탕이 있던 자성(子姓)부락은 결혼을 통해 인척이 되었다고 본다. 이윤은 상왕의 처남, 수석문관, 조정사제의 3중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하들중 으뜸이었다. 탕이 사망한 후, 이윤은 국군의 외삼촌신분으로 계속하여 군왕을 보좌한다. 지위는 당고종시기의 황제의 외삼촌이었던 장손무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 정도였다.
유가경전과 <사기>에는 이윤을 명신(名臣)의 대표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그는 권세를 탐하지 않고, 사대의 제왕을 보좌했다는 것이다. 제4대 군왕 태갑은 덕이 없어, 이윤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결국 이윤에 의해 추방되고, 동궁(桐宮)에서 반성하게 한다. 3년이 지난 후, 이윤은 태갑이 반성하여 새 사람이 된 것을 보고, 스스로 태갑을 다시 모셔와서 계속하여 왕으로 앉게 한다. 이윤은 차지했던 권력을 되돌려준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을까? 어쨌든 유학자들은 이를 굳게 믿는다.
다만, <죽서기년>에는 전혀 다른 기록이 남아 있다. "중임붕(仲壬崩), 이윤방대갑어동(伊尹方大甲於桐), 내자립(乃自立)" 중임은 상왕조 세번째 군주이고, 대갑은 바로 태갑이다. 탕의 적장손이다. 이윤은 직접 태갑을 유배보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왕에 올랐다는 것이다. 태갑은 유배지에서 7년간 은인자중하다가 나중에 병력을 일으켜 이윤을 죽이고 권력을 다시 찾는다. 다만 태갑은 이윤의 후손은 살려주고, 이윤의 가족이 계속 제사지내게 해준다.이런 피비린내나는 권력다툼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부합한다.
오늘날의 고증에 따르면, 태갑이 이윤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원형이 전국(戰國)에서 전해진 것이다. 전국은 예악이 붕괴되었던 시기이고, 신하가 국군을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금의고(以今擬古, 오늘날의 일을 기준으로 옛날 일을 판단하는 것)"는 통상적인 일이다. 한비자는 전국시대에 상고의 일을 추측하는 습관이 있다고 비판한 바도 있다. 다만 태갑이 이윤을 죽인 일에 대하여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찬동하고 있다. 송나라때의 <태평어람>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중임(仲壬崩), 이윤방태갑(伊尹放太甲), 내자립사년(乃自立四年)" 이것이 전형적인 대표이다.
결론
연대가 오래되고, 문자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윤의 여러가지 사적은 모호하게 전해진다. 다만 오늘날 갑골문과 고서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이윤의 사적을 대체로 정리해볼 수 있다. 이윤은 4대의 군왕을 보좌했고, 특히 군왕을 유배보내는 '장거(壯擧)'도 벌인다. 이때부터 그는 역대권신의 목표가 된다. 역대권신은 모두 이윤이 섭정한 이야기를 가지고 자신은 단지 군왕을 반성하게 하기 위함이지, 황위를 찬탈하기 위함은 아니라고 말하게 된다. 이윤은 권신들의 중요한 간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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