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세설신어(細說新語)
중국의 유구한 역사에서 과거제도는 독서인의 유일한 출로와 추구하는 목표였다. 천년이래 무수한 한문자제(寒門子弟)는 공명을 얻고 운명을 바꿀 희망을 품고, 밤낮으로 등불아래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과거제도는 청나라말기에 점차 폐지된다. 그렇다면 고대 장원의 수준은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중국의 마지막 장원의 답안지를 보면 그의 글씨체에 현대인들이 보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의 마지막 장원은 누구일가? 그의 일생은 어떠했을까?
- 과거지로(科擧之路)와 서법천부(書法天賦)
중국의 마지막 장원은 유춘림(劉春霖)이다. 1872년, 그는 직예(直隸) 숙녕(肅寧)의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비록 집안은 가난했지만, 유씨집안에서는 교육을 아주 중시했다. 그의 부모는 먹고 쓰는 것을 아끼면서 그에게 공부를 할 기회를 제공했다.
어린 유춘림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놀라운 천부적인 공부의 재능을 드러낸다. 나이 겨우 6살때 사숙(私塾)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한다.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한 그는 학업에서 뛰어난 재능을 드러낼 뿐아니라, 서예방면에서도 비범한 천부를 드러낸다. 매일 새벽에 다른 아이들이 아직 잠들어 있을 때, 그는 이미 붓을 잡고 글씨를 쓰는 연습을 시작했다.
어른이 된 후, 유춘림은 연지서원(蓮池書院)에 들어가서 공부한다. 당시 이곳은 직예성에서 명문학교였다.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이 적지 않게 모였다. 여기에서 그는 원장 오여륜(吳汝綸)을 만난다. 그는 서예와 학문에 모두 심후한 조예를 지닌 학자였다.
오여륜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이 있었다. 유춘림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제자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학생중 한명으로 본다. 오여륜의 지도하에 유춘림의 서예솜씨는 신속히 발전하고, 글자는 힘이 있으면서 깔끔했다.
1904년, 과거시험이 예정대로 치러진다. 유춘림은 가족의 기대와 자신의 이상을 안고, 전시(殿試)에 참가했다. 그의 글과 서예는 전시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특히 그의 단정하고 깔끔한 글씨는 시험관들이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의 글씨는 현대인들이 보더라도 '인쇄글씨'같다고 느껴진다. 정말 장원이 되기에 부끄럼이 없을 정도이다.
나중에 자희태후(서태후)가 장원의 답안을 검토할 때, 유춘림의 이름인 "춘림(春霖)"이 길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대청국이 "춘일영주(春日永駐), 복림편포(福霖遍布)"(봄날을 영원히 잡아두고, 복을 장마비처럼 온 대지에 내린다)하라는 것으로 보았다. 비바람에 흔들리던 시대에 이런 길상의 의미는 더욱 진귀했다. 그리하여 유춘림을 중국역사상 마지막 장원으로 결정한다.
2. 일본유학과 민국시대의 관료생활
장원이 된 후의 유춘림은 당시의 청나라정부에 의해 일본법정대학(日本法政大學)으로 파견되어 서방의 법률과 정치사상을 공부한다. 그때의 청정부는 신규교체, 구신도강(求新圖强)의 관건적인 시기였고, 젊은 인재를 해외로 보내어 공부하게 하여, 서방의 선진사상을 도입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했었다.
유춘림이 일본에 있을 때, 그는 서방의 법률제도와 현대정치사상을 접촉한다. 그는 청나라의 중국과 열강간의 차이를 깊이 인식하게 된다. 도쿄의 강의실에서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이러한 새로운 사상으로 스스로를 무장하여 장래 귀국한 후 국가의 변혁을 추진할 준비를 한다.
그러나, 1905년, 청정부는 과거제도를 폐지한다. 이 소식은 유춘림과 과거출신인 관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는 것은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춘림은 이렇게 하여 중국에서 마지막 장원이 되어버린다.
비록 과거제도가 폐지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 그는 적극적으로 민국초기의 조정에서 활약한다. 전후로 자정원의원(諮政院議院), 학교제조(學校提調), 총통부비서장(總統府秘書長)등의 중요한 직무를 맡는다.
당시의 배경하에서 유춘림의 지위와 영향력은 계속하여 상승한다. 1916년과 1917년, 당시 대총통(大總統)이던 서세창(徐世昌)은 두 차례에 걸쳐 그로 하여금 공자대성절(孔子大成節)을 주재하게 한다. 이는 전통문화와 유가사상을 선양하는 중요한 활동이었다.
이 시기에, 유춘림은 민국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나아가 그의 문화와 정치분야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그러나, 그는 시종 고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문화를 보호하는 동시에, 계속하여 중국을 어떻게 하면 현대화의 길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3. 북평은거(隱居北平)와 가국정회(家國情懷)
관료로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유춘림은 민국시기의 혼란과 권력투쟁에 실망한다. 정치적인 명쟁암투와 날로 격화되는 투쟁은 그 자신의 이상과 현실간의 거대한 격차를 느끼게 만들었다.
1924년, 심사숙고를 거친 후, 유춘림은 관직을 떠나 북평에 은거하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은 당시에 적지 않은 파란을 불러왔다. 많은 사람들은 재능이 뛰어난 장원이 왜 산림에 은거하는 편을 선택했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춘림에 있어서, 이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면서 또한 당시의 상황에 대한 깊은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북평에 은거한 후, 유춘림은 세상와 완전히 연을 끊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국가대사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특히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는 그러했다. 1931년, 9.18사건이 발발하고, 일본침략자들이 중국의 동북영토를 잠식하기 시작하며, 국토는 점령당하고, 민중은 고통에 빠진다.
당시의 국민정부는 일본의 계속되는 침략에 부전이퇴(不戰而退)의 정책을 썼다. 유춘림은 이에 대하여 분개한다. 그는 공개적으로 발언하며, 장개석정부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고, 마땅히 무력으로 국가주권을 보위해야 하며, 민족존엄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3년, 황하가 범람하여 재난이 발생한다. 기로예(冀魯豫, 하북, 산동, 하남)의 3개성이 심각한 수재를 당한다. 강열한 가국정회를 가진 지식분자로서 유춘림은 전혀 망설임없이 수재구조의 제일선에 나선다.
그는 나이가 이미 많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이재민구조에 참여한다. 이재민을 내몽골의 안전한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현지정부를 도와서 돌아갈 집이 없어진 이재민을 안치(安置)시켰다. 유춘림의 이런 거동은 심후한 가국정회를 체현한 것일 뿐아니라, 많은 민중의 존경과 옹호를 받았다.
4. 친일정부의 관직을 거부하고 말년에는 곤경에 처한다.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의 발걸음을 가속화하면서, 특히 전면적인 침화전쟁이 발발하면서, 유춘림은 다시 한번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그는 문화계와 정치계의 특수한 지위를 지니고 있어서, 친일정권은 그를 기용하고자 했고, 그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더 많은 중국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후 친일정권에서는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그와 접촉한다. 심지어 고위관직과 높은 급여를 약속한다. 이익을 가지고 그를 회유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유에 유춘림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침략자와의 협력을 확고하게 거절한다.
유춘림의 확고한 거부 입장은 친일정권을 분노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많은 압력과 위험을 가져온다. 일본특무기관은 그의 행적을 엄밀하게 감시하고, 빈번하게 괴롭힌다.
그가 협력을 거절하게 되자, 유춘림의 가족들도 피해를 입는다.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고, 가정생활도 곤경에 빠진다. 이런 고압적인 상태하에서, 유춘림은 여전히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고, 금전과 권력에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그는 깊이 알고 있었다. 국가가 위난할 때, 지식분자로서 원칙을 견지하고 국가의 존엄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비록 곤경에 빠져 있지만, 유춘림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하여 교육사업에 종사했고, 문화의 역량으로 민중의 민족의식과 국가인식을 일깨우고자 했다. 그는 서예반을 조직하여, 젊은이들에게 전통문화를 전수하고, 이를 매개로 하여, 그들에게 애국정신과 민족절개를 가르쳤다. 그는 믿었다. 교육과 문화는 침략자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최강의 무기이며,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근본이라는 것을.
5. 생명의 마지막 세월
다만, 그의 처지는 호전되지 않았다. 친일정권의 압박하에, 유춘림의 건강상황은 날로 악화된다. 그는 원래 심장병이 있었는데, 오랫동안의 정신적인 압박과 생활상의 곤경으로 병이 더욱 심각해진다.
1942년 1월 8일, 신체상황이 계속 악화하면서 유춘림은 마침내 세상을 떠난다. 향년 70세이다. 비록 유춘림의 인생은 많은 곡절이 있었지만, 그는 시종 자신의 신앙과 원칙을 지켰다. 당시가 아무리 비바람에 흔들리던 사회이든, 아니면 전쟁에 휘말려 있든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일생은 중국이 봉건제도에서 현대사회로 전환되던 시기를 목격했다. 그의 서예작품은 그 시대 문화의 상징이며 무수한 후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유춘림의 정신과 그가 남긴 문화유산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날의 비처럼, 중국의 대지를 풍성하게 만들었고, 중화민족정신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과거장원의 전설일 뿐아니라, 중국문인이 역사풍운변환과정에서의 불굴과 견지를 보여준다.
6. 결론
유춘림의 일생은 과거영광에서 절개를 지키는 전설이다. 그는 탁월한 재능과 굳건한 신앙으로 중국역사상 마지막 장원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그는 국가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적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문화와 교육으로 민족존엄을 보위하려 했다. 이런 정신이야말로 중화민족이 비바람에서도 굳건하게 서 있으면서 쓰러지지 않았던 원인이다.
유춘림의 이야기와 정신은 이미 시대를 초월하여, 중화문화의 보물중 일부가 되었고, 게속하여 후대의 중국인들의 귀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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